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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몸의 허물이 있고 마음의 허물이 있다. 몸은 곧으나 수식을 얻지 못하면 마음의 허물이 되고, 몸이 굽어서 수식을 얻지 못하면 몸의 허물이 된다. 좌선을 하여 마음의 안정을 얻었음을 자각하여 마음에 기쁨이 있으면 마음이 흩어진다. 기쁘지 않으면 도의 마음이 된다. 좌선하여 생각과 숨이 이미 그쳤으면 곧 관이 된다. 관을 그치고 다시 숨을 행한다. 사람이 도를 행하면 마땅히 이로써 떳떳한 법으로 삼는다.
해설 몸과 마음에 잘못됨이 없어야 수식이 이루어진다. 몸이 단정하고 마음이 이에 따라야 한다. 수식은 마음이 바른 상태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몸을 단정히 하고 마음에서 수식이 이루어지도록 하되, 수식이 이루어져서 마음의 안정을 얻었더라도 기쁨을 느끼면 완전한 안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기쁨은 마음이 흩어졌을 때 느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기쁨까지도 그치는 상태가 바로 지(止)의 세계다.
지가 이루어져서 생각이 그치고 숨도 그친 상태에서 사물을 관찰하는 것이 관(觀)의 단계다. 숨이 그쳤다고 하나 실은 숨에 의식이 가서 느끼지 않을 뿐, 실제로는 숨을 쉬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도 숨을 쉬고 있는지를 모를 정도로 된 상태에 이른 것이다.
예를 들면 고양이가 쥐를 잡으려고 노려보고 있을 때에는 숨을 죽이고 쥐의 동작을 감시하여 기선을 잡는다. 이때는 스스로 숨을 느끼지도 않고 어떤 생각도 일으키지 않는다. 무녀무상의 상태에서숨이 그친 듯이 고요히 행해진다. 이 상태가 바로 도에 들어간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이 정신이 항상 어떤 것에 집중되어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면서도 몸과 마음을 모두 잊은 상태에 이르러서야 올바른 진리를 깨달을 수 있다.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그친 상태인 지와 그 그침까지도 떠난 관은 수레의 두 바퀴에 비유되고 있다. 지에서 떠나야만 사물을 자재롭게 관찰할 수 있다. 이때 떠났다는 것은 마음이 그친 상태에서 떠남을 말한다. 그러므로 지를 떠나지 않은 관이다. 관은 마음이 그친 무심의 상태에서 사물을 관찰한다. 이때 숨은 여전히 들어오고 나가면서 가장 고요하고 몸과 마음과 하나가 되어 행해진다. 마음과 몸과 숨이 하나가 된 상태다. 이렇게 되어서 비로소 마음은 올바른 상태에 안주하고 몸은 건강하게 유지되며 숨도 올바르게 된다.
여기에서 마음의 고요함을 자각하면 1선(禪), 기쁨을 느끼는 단게를 2선(二禪)이라고 한다. 더 나아가 기쁨까지도 그친 단계가 3선이다. 이때 관이 있게 된다. 관을 그치고 다시 숨을 행하는 단계가 제4선이다.
경에서 말한 관을 그치고 다시 숨을 행한다.'는 숨을 마음대로 행하면서도 고요함을 떠나지 않는 것이다. 동중정(動中靜)이다. 《성실론(成實論)》 제14권 <정난품(定難品)>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만일 정(定)에 의해서 장애가 되는 여러 온(蘊)을 떠나면 능히 큰 이로움을 얻는다. 경에서 설한 바와 같이 정난(定難), 정(定)의 어려움은 기쁨(鹿喜)이다. 기쁨이 생하면 수행자는 마땅히 마음의 난법(難法)이라는 기쁨을 일으키지 말라. 탐착 등의 허물이 있어서 정심(定心)을 흐트러뜨리기 때문이다.
묻되, 법에서 기쁨이 생하는데 어찌 생하게 하지 말라고 하십니까? 답하되, 수행자가 공(空)을 생각할 때에는 기쁨이 생하지 않는다. 중생은 생각이 있으므로 기쁨이 생한다. 오음은 공이니 중생도 없다. 어찌 기뻐할 것인가. 또한 수행자는 마땅히 이렇게 생각하라. '인연에 의하기 때문에 여러 가지 법이 생한다. 곧 광명등이니 이 속에 어떤 것이 기뻐할 것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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