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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식은 또한 팔행으로 들어간다. 마음이 바르기 때문에 팔행으로 들어간다. 정의(定意)의 자심이 정법을 생각하는 것이 직신(直身)이다. 지성스러운 말, 부드러운 말, 돌아오지 않는 말은 직어(直語)이다. 지혜와 믿음과 인욕이 마음에 있으면 직심(直心)이다. 곧 성식(聲息)(식심(息心), 신심(身心))으로써 십선(十善)이 되어 도행으로 들어간다. 수식은 직견(直見)으로 들어간다. 제관(諦觀)이므로 직견이 된다. 또한 직행(直行)에 들어간다. 오로 향함으로써 직행이 된다. 또한 직치(直治)로 들어간다. 《삼십칠품경》을 행하기 때문에 직치다. 또한 직의(直意)로 들어간다. 진리를 생각하기 때문에 직의다. 또한 직정(直定)에 들어간다. 마음이 희고 깨끗하여 마병을 괴멸하기 때문에 직정이 된다. 이를 팔행이라 한다. 어떤 것이 마병인가. 곧 색, 성, 향, 미, 세활이 마병이고, 받아들이지 않음이 마병을 괴멸하는 것이다.
해설 팔행에 대한 설명이다. 드디어 수식 등은 여덟 가지 실천으로 들어간다.
팔행은 팔정도(八正道), 팔성도지(八聖道支), 팔현성도(八賢聖道), 펄정로(八正路), 팔직도(八直道), 팔품도(八品道)라고도 하며 여덟 가지 실천이다. 팔정도는 중도(中道)이고 정도(正道)이며 직도(直道)이다. 여덟 가지 가야할 길은 직신, 직어, 직심, 직견, 직행, 직치, 직의, 직정 등이다.
직신은 올바르고 곧은 몸가짐으로써 고요한 마음으로 자비심을 갖고 올바른 법을 생각하는 것이라고 했다. 마음이 적정에 있으면 사물을 올바르게 보게 되고 자비심을 갖게 된다. 올바른 법은 대상에 대한 바른 분별이다. 고요한 마음과 올바른 법의 바른 관계에서 바른 몸가짐이 나온다. 우리의 몸은 정신과 마음의 물질적인 요소들의 조화로운 집합체이다. 고요한 마음은 올바른 정신이요, 조화로운 몸은 올바른 법이다. 고요한 마음으로 올바른 법인 몸을 생각한다면 마음과 몸이 떠나지 않아서 곧은 몸, 곧 올바른 몸가짐이 있게 된다. 이것이 직신이다. 흔히 팔정도의 첫째 항목으로 정견(定見)을 꼽는다.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보는 것이다. 모든 사물을 올바르게 보려면 마음이 고요하여 자비심을 갖고 법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정견이 곧 직신이 된다.
직어는 올바른 말이니 정어(正語)라고도 한다. 올바른 말은 지성스러운 말, 부드러운 말, 바른 말, 돌아오지 않는 말이라고 했다. 말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마음이 성실하고 평온하며 바르면, 말도 성실해지고 부드러워지며 바르게 된다. 이런 말은 서로 마음이 통하여 듣는 사람도 성실하고 평온하며 바르게 만든다. 남을 허황되게 하거나 흥분시키고 그릇된 말은 올바른 말이 아니다. 또한 이러한 말은 불환어(不還語)가 아니다. '돌아오지 않는 말'은 다시는 욕계로 돌아오지 않는 진리의 말, 즉 열반에 이르도록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이 이른바 직어이다.
직심은 '마음속에 지혜와 믿음과 인욕이 있는 것'이라고 했다. 지혜와 믿음과 인욕이 있는 마음이 올바른 마음이다. 직심이 되려면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수행하여 마침내 열반에 들어야 하니, 이러한 수행을 하는 사람은 성문(聲聞)이라고 한다. 지혜를 얻고자 하고 믿음을 갖고 인욕을 잘 행하는 사람은 십선(十善)을 행하는 도인이 된다. 도인이 되려면 먼저 성문의 단계에서 수행을 쌓아야 한다.
수행의 단계에서 호흡을 조절하여 마음을 고요히 함으로써 지혜도 생기고 믿음도 생기며 인욕도 있게 된다. 경에서는 '성식으로써 이것이 십선이 되어서 도행으로 들어간다.'고 했다.
성식은 성문의 숨, 성문의 호흡 수행을 말한다. 수식 등 안반수의법은 바로 성문도에 속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이 성문도를 통해서 불도가 이루어지게 된다. 《대지도론(大智道論)》 제 19권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묻되, 삼십칠품(三十七品)은 곧 성문벽지불의 길이고, 육바라밀은 보살마하살의 길입니다. 어찌하여 보살도 중에서 성문법을 설하십니까.
답하되,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일체의 선법(善法)과 일체의 도를 배워야 한다. 부처님이 수보리에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함에 일체의 선법과 일체의 도를 배운다. 곧 건혜지(乾慧地) 내지 불지(佛地)니라.'고 하신 바와 같다. 구지(九地)는 마땅히 배워서 깨달아 취하지 말고, 불지는 또한 배워서 증득할지니라."
성문법에 속하는 수식 등을 통해서 십선에 이르면 수식 또한 취하지 않는다. 직심은 십선이 이루어져서 도를 행하는 단계로 들어가게 된 올바른 마음이니 불지는 직심을 떠나지 않는다. 또한 직견은 정견이라고도 하며 제법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제법의 실상을 보려면 모든 법에서 사제(四諦)의 도리를 보아야 한다. 사제의 도리를 보면 사물의 이치를 알아서 의혹이 생기지 않고 지혜를 얻는다. 곧 법인(法忍)으로 순조롭게 나아가게 된다. 이러한 제관(諦觀) 속에서 정사유(正思惟)가 이루어진다. 정견이 곧 정사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때에는 일체의 분별사유가 그릇되었음을 알고 끊어야 한다. 모든 분별사유가 실답지 않고 전도된 것임을 알면 일체 사유가 공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니, 이것이 정사유다. 정사유 속에 머물러서 올바름과 그릇됨을 분별하여 보지 않게 된다. 곧 모든 사유분별을 지나간 것이다. 이 또한 정사유다. 일체의 사유분별은 모두 평등하다. 평등하기 때문에 마음의 집착이 없다. 이것이 보살의 정사유의 모습이다. 또한 직행이란 도를 향해 가는 것이다.
직치는 마음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으로 이를 위해서 37종의 수행을 한다. 《삼십칠품경》은 바로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방법이다.
직정이란 정정(正定)이니 마음이 희고 깨끗한 세계에 이르러서 외부의 일체 자극에 끌리지 않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희고 깨끗한 마음은 청정함을 말한다. 마치 달빛과 같이 더러움이 없고 빛난다. 더러움이란 번뇌요, 빛은 법을 아는 것이다. 희고 깨끗한 마음은 삼매의 세계로 열반이라고도 한다.
걸림이 없고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으면 인연의 의해서 생하고 멸하는 바를 알고 스스로 고요함 속에서 노닌다. 그러므로 밖에서 들어오는 물질이나 소리, 향기, 맛이나 감촉에 끌리지 않는다. 우리가 괴로움을 느끼는 이유는 감각기관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것에 끌리기 때문이다. 눈, 귀, 코, 혀, 몸, 마음 등의 육근(六根)이 색, 성, 향, 미, 촉(세활), 법 등 육경(六境)을 받아들여서 이에 끌리기 때문에 고가 있다.
육근이 청정하면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것이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이를 '마병을 괴멸한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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