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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칠품은 응당 거둔다. 만일 스스로 몸을 관하고 남의 몸을 관해 음탕함을 그치면 마음이 흩어지지 않고 나머지 마음을 그친다. 스스로 아프고 가려움을 관하고 타인의 아픔과 가려움을 관하여 노여움을 그치고, 스스로 마음을 관하고 타인의 마음을 관하여 어리석음을 그치고, 스스로 법을 관하고 타인의 법을 관하여 도를 얻으면 사의지를 이룬다.
해설 《삼십칠품경》에서 설해진 37종의 수행이 이루어지는 것이 안반수의라고 했다. 그러면 37종은 무엇인가.
먼저 사의지가 이루어진다고 했다. 사의지란 사념처(四念處), 사념주(四念住)라고도 하니, 신념처(身念處)는 우리의 몸에 부정함이 많다고 관찰하여 마음이 몸에 끌리지 않게 한다. 경에서는 "내 몸의 부정을 보고 남의 몸의 부정을 관하면 남의 모든 부정을 보고 그에 끌리지 않아 탐욕이 그친다."고 했다.
수행자는 먼저 37종의 수행으로 들어감에 있어서 사념처를 닦아야 한다. 몸(身)을 통해 부정을 보고, 모든 감수작용(受)으로 인해서 고가 따른다는 사실을 관하고, 마음은 무상하다고 관하고, 법은 실체가 없다는 무아를 관한다.
몸의 부정을 관하는 것이 신념처다. 나와 남의 몸에 부정함이 많다는 사실을 관찰하면 집착이 없어진다. 감수작용을 통해서 받아들여지는 자극은 고의 원인이 된다. 가령 아픔이나 가려움 등의 희로애락은 나의 감숙작용에 의한 것일 뿐 진실한 것은 아니다. 이것이 나에게 고통을 준다는 사실을 깨달으면 노여움이 그친다. 곧 수념처(受念處)다.
숨의 들어오고 나감에 마음이 같이 머물면 이러한 감수에 끌리지 않게 된다. 즉 수념처에 머물게 된다. 아픔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면 괴롭지 않다. 괴로움은 아픔과 아픔을 주는 자극이 대립하고 있을 때에 생긴다. 또한 마음은 항상 움직이고 있으므로 무상하다. 마치 숨이 들어오면 나가고 나가면 들어고는 것과 같으므로, 숨과 마음이 하나가 되어 무상함을 알면 마음이 영원하리라고 여기는 어리석음을 그치게 된다. 그러면 심념처(心念處)에 머물게 된다.
모든 존재는 실체가 없이 인연법에 따라서 생하고 멸한다. 이러한 법을 고나찰하여 무아임을 알면 인연에 따르는 도를 얻는다. 이것이 법념처(法念處)다. 이들 사념처는 부정과 무상과 고와 무아를 알아서 도로 들어간다.
몸의 움직임을 호흡의 출입과 같이 행하면 몸이 깨끗하다는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나고, 마음의 움직임이나 느낌도 무상한 고임을 알아서 그릇된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고, 모든 존재의 인연법을 알게 된다.
수행자는 항상 사념처에 머물러서 상(常), 낙(樂), 아(我), 정(淨)의 네 가지 전도를 파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사념처를 수행의 첫 단계로 삼아야 한다. 이들 네 가지가 얻어지면 네 가지 노력인 사정근이 있게 된다. 《수행도지경》 5권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수행자는 마땅히 알지니, 몸과 수(受)와 심(心)과 법(法)이 생하고 멸하는 곳에 아픔과 가려움, 마음과 법이 있다. 일어나고 멸하는 근본을 관하여 그 인연과 과거와 당래(當來)를 관찰한다. 무원정(無願定)을 행하여 해탈문으로 들어가 생사의 고를 관찰한다. 이 오음을 생각함에 곧 우환과 호의(弧疑)가 있지 않으니 이때 고법인(苦法忍)을 알게 된다. 이미 고의 근본을 보면 곧 혜안을 얻어 십결(十結)을 없앤다. 십결을 버리면 이 마음을 얻어서 무루(無漏)로 향하여 정견으로 들어가 범부지를 떠나 성도(聖道)에 머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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