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2-2. 네 가지 상념을 끊음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8:42

12-2. 네 가지 상념을 끊음

 

도인은 마땅히 사의지를 생각할지니라. 첫째, 나는 전생에 몸을 사랑하였기 때문에(몸을) 벗어나지 못한다. 둘째는 생각에 심한 원한이 있기 때문에 욕구로 애욕이 생기면 마땅히 끊어야 하니, 이미 끊어서 밖의 몸을 위하여 지(止)를 관한다. 네 가지 마음의 그침이란, 마음이 몸에 있지 않음이 (몸에서의) 마음의 그침이 되고, 통양이 없음이 (감수작용에서의) 마음의 그침이 되며, 마음이 없음이 (마음에서의) 마음의 그침이 되고, 법에 있지 않음이 (법에서의) 마음의 그침이 된다. 색에 따라서 인식이 곧 생하는 것이 그치지 않음이 된다.

해설
사의지(四意止), 곧 사념처(四念處)에 대한 설명이다. 앞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으나 다른 각도에서 다시 설명하고 있다. 수행자가 사의지를 매우 중요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신념처(身念處), 수념처(受念處), 심념처(心念處), 법념처(法念處)의 사의지는 곧 마음이 몸과 감수작용과 마음과 법에 머물러서 실상을 파악하는 수행이다.

신념처, 곧 신의지는 몸에 대한 애착을 끊는 수행이니 전생부터 몸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부모로부터 받은 이 육신은 깨끗하지 못하므로 집착할 것이 못됨을 알아야 한다. 몸의 부정함을 알기 위해서는 몸을 잘 관찰해야 한다.

수념처, 곧 수의지는 감수작용으로 인한 객관세계, 곧 밖의 사물에 대한 집착을 끊음으로서 이에 대한 마음의 그침에서 얻어진다고 한다. 밖에서 주어진 자극, 예를 들어서 마음에 원한이 깃들어 있으면 그것이 집착이 된다. 원한 역시 내 욕구를 체워주지 못해 나타나니 애욕에 끌리게 된다. 애욕으로 인한 원한을 없애려면 먼저 그 원인을 없애야 한다. 곧 마음을 그쳐야 한다. 《법구경》에도 "원한은 원한으로 그치지 않는다. 원망하는 마음을 그쳐야 없어진다. 이는 영원한 진리니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런 마음을 없앨 수 있는가. 마음에서 일어나고 없어지는 원한을 관하면 마음을 끊었을 때 원한이 없음을 증득할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한 상태에서는 사랑의 애착이나 원한이 없음을 실증하게 된다. 몸을 통해서 마음의 부정을 보면 마음이 더 이상 몸에 남아 있지 않게 된다. 곧 집착이 사라진다.

감수작용인 아픔이나 가려움 등도 마음 때문에 생기나, 이러한 감수작용도 고요한 마음이나 굳은 마음을 흔들지는 못한다. 우리의 마음도 늘 변하고 생멸을 거듭한다는 사실을 살펴서 알면 그 마음도 집착할 바가 아님을 알게 된다. 곧 마음이 그치면 마음 그 자체도 없는 것이다. 이러한 진리를 깨닫지 않으면 안 된다.

법, 곧 일체의 존재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음은 자성으로서의 공이니, 인연에 따라서 생기고 없어진다. 그러므로 일체의 존재는 그 사물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주관인 우리의 마음과 대상의인연에 의해서 존재한다. 그러니 주관이 없으면 객과도 없고, 주관과 객관이 없으면 법도 없다. 이와 같이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과 법은 이것과 저것의 인연으로 생하고 멸한다. 다시 말해 색과 인식, 곧 객관과 주관에서 비롯되므로 주관과 객관이 없음을 증득하는 법념처의 수행을 닦으면 일체의 법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된다.

수식 등을 통해서 청정에 이르면 사의단(四意斷)이 이루어지고, 사의단이 이루어지면 사의지(四意止)가 이루어진다. 수식관은 숨의 출입을 관하여 마음을 진정시키는 관법이다. 마음의 진정은 끊음에서 다시 멸로 나간다.

《성실론》 제 14권 <출입식품(出入息品)> 제185에 "아나파나(阿那波那)는 열여섯 가지 행이니, 들어오는 숨이 길거나 짧음을 생각하고, 몸에 두루 차는 것을 생각하고, 몸의 모든 움직임을 없애고, 기쁨을 알고, 즐거움을 알고, 마음의 움직임을 제거하고, 출입식을 생각하여 마음을 알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거두어들이고, 해탈케 한다. 출입식을 생각하는 것은, 무상함에 따라서 관하여 끊고, 떠나고 멸함에 따라서 관하여 들어오고 나가는 숨의 길고 짧음을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사의지를 닦는 것은, 우리의 몸은 무상하여 반드시 없어질 것이며, 이 몸의 모습은 몸 속에서는 얻어질 수 없으니 몸의 안에도 없고 밖에도 없다. 몸은 공(空)이라 허망한 인연으로 생했으니 이 몸은 거짓으로 되어 있으며 본래의 업에 속한다. 또한 모든 감수작용도 이와 같아서 우리의 마음에 괴로움이나 즐거움,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은 것이 들어와 걸려 있으나, 본래의 우리 마음은 이에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오직 인연에 의해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사실을 관한다.

또한 우리의 마음에 온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으며, 오직 내외의 인연화합으로 생하고 멸한다. 이런 마음은 실다운 모습이 없고 실다운 생(生), 주(住), 이(異), 멸(滅)도 없다. 과거, 현재, 미래도 없다. 마음은 안에도, 밖에도, 중간에도 없다. 생멸이 서로 이어지고 있을 뿐이나 이를 억지로 이름 붙여서 마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마음은 얻을 수 없으며 본성은 불생불멸이고 항상 청정하다고 관해야 한다.

법념처의 관도 이와 같으니 일체법이 인연화합이요, 법의 모습은 불가득이다. 일체 제법은 인연생이므로 자성도 없고 오직 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