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典/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12-5. 도인의 길인 四意止

通達無我法者 2007. 12. 5. 18:46

12-5. 도인의 길인 四意止

 

도인은 마땅히 사의지를 행해야 한다. 첫째로 눈과 색은 마땅히 몸 가운데의 악로를 생각할지니라. 둘째는 마음이 기뻐 즐거움을 생각하면 마땅히 통양의 고를 생각할지니라. 셋째는 나의 마음이 노하면 남의 마음도 노하고, 나의 마음이 바뀌면 남의 마음도 바뀌니, 곧 다시 마음을 바꾸지 말라. 넷째는 내 마음이 질투하면 남의 마음도 질투하고, 내가 남의 악을 생각하면 남도 나의 악을 생각하니 곧 다시 이를 생각하지 않음을 법이라 한다. 신의지는 스스로 몸을 관하고, 남의 몸을 관한다. 어떤 것이 몸인가. 통양(의지)은 이것을 몸이라고 말하나 아픔에는 수가 없다. 의(의지, 의의지(意意止)는 이것을 몸이라고 말하나 오히려 몸에는 과거의, 미래의가 없다. 법(의지)은 이것을 몸이라고 말하나 오히려 몸에는 과거와 미래의 법이 없다. 행(의지)은 이것을 몸이라고 말하나 행에는 형상이 없으니 몸이 아님을 안다. 이런 생각을 얻으면 사의지가 이루어진다.

해설
수행하는 도인은 사의지를 행해야 한다.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이나 법 등을 관해서 진실을 알고 선을 행하며 악을 제거하여 진리 그대로 인연에 따라서 살기 위해서다. 또한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 들어서기 위해서다.

그러면 몸이나 감수작용, 마음이나 법을 어떻게 관할 것인가. 이들 네 가지는 각각 나누어진 것만이 아니라 서로 관련되어 있다. 그러므로 신, 수, 심, 법의 순서로 각각 관할 수도 있고 총합하여 관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사의지를 각각 관하기도 하나 총체적으로 관하는 것이 좋다. 가령 신의지의 수행에서 내 눈을 관하여 눈 속에서 나오는 더러운 이물질들을 생각하여 내 몸만이 아니라 객관 세계의 모든 것, 곧 색(色) 등도 그 속에 더러움이 있다고 생각해야 한다. 눈뿐만이 아니라 눈의 대상인 색도 함께 관해야 한다. 나는 나의 대상을 인연으로 해서 있기 때문이다. 또한 통양의지의 수행에서 마음이 즐거울 때에는 마땅히 아픔이나 가려움 등의 괴로움을 생각해야 한다고 설했다. 즐거움에는 반드시 괴로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즐거움과 괴로움은 서로 표리관계에 있다. 즐거움이 있으면 반드시 괴로움이 있고, 괴로움이 있으면 반드시 즐거움이 있으니, 이것이 바로 인연의 법이다.

또한 심의지의 수행에 있어서 내 마음의 노여움은 남과의 관계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남의 마음도 헤아려 보아야 한다. 내가 노여워하면 남도 노여워한다. 그러므로 내가 마음을 바꾸면 남도 마음을 바꾼다는 인연법을 알아서 마음을 바꾸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한결같이 진리를 알아서 그에 따르는 마음가짐을 가져야 한다.

마음은 항상 변하고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마음에 끌려 노여움을 풀지 못할 짓은 하지 말아야 한다. 마음은 실체가 없이 항상 변하니 내가 노여움을 풀면 남의 노여움도 풀어지는 법이다. 이와 같이 의의지, 곧 심의지의 수행에 있어서 나의 마음과 남의 마음을 관하는 행을 닦아야 한다.

또한 법의지의 수행에 있어서도 내가 질투하면 남도 질투하고, 내가 악한 생각을 하면 남도 악한 생각을 하므로, 그런 생각을 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이 법의지의 실천 수행이다. 이와 같이 신, 수, 심, 법 사의지의 수행은 나와 남을 동시에 관해 인연법을 따르는 일임을 알아야 한다. 신도 인연이요, 수도 인연이요, 심도 인연이요, 법도 인연이기에 이들 넷을 인연법에 따라서 관한다. 그러면 어떻게 인연법에 따라서 관할 수 있는가에 대해 다시 보다 깊게 설법하고 있다.

선의지의 수행에서는 자기 스스로의 몸을 관하고 남의 몸도 관하되, 그 몸이 무엇인지까지도 관해야 한다. 나의 몸이나 남의 몸은 오온(五蘊)의 인연에 의해 존재하니 공이다. 공인 몸을 본다. 몸의 실체가 있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실체가 없는 내 몸이나 남의 몸을 관한다. 몸을 통해서 오온이 모두 공임을 관하여 몸이 부정하다는 것을 보고, 부정함이나 정에도 끌리지 않는 중도의 관이 이루어지게 한다.

통양의지에 있어서도 아픔이나 가려움 등의 감수작용은 몸에서 받아들이는 느낌이므로 실체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밖으로부터의 자극과 받아들이는 감수작용, 즉 이것과 저것의 인연으로 생길 뿐, 실체적으로는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곧 얼마나 아프고 가렵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수가 있을 수 없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통양의지도 인연임을 알아서 공으로 돌아감을 관한다. 또한 법의지도 마찬가지이다. 법이란 일체의 존재이니 실재한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는 말은 거짓이다. 과거에도 미래에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에는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있으면 거짓이요, 지금 존재하는 것이 미래에는 없어지니, 이는 인연에 의해서 존재하는 실체가 없는 공이다. 또한 우리의 행위도 마찬가지이다. 내 몸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말하고 싶으나 실제로는 그 행도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다. 즉 형체가 없는 행위이다.

이와 같이 사의지 자체에 대해서도 인연의 법을 떠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의지의 수행도 인연의 실천이며 수행 아닌 수행이다. 일체는 인연법에 의해서 존재하므로 승의(勝義)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속제(俗諦)에서는 사의지와 사의지의 수행이 있으나 승의로서는 사의지도 수행도 없다. 따라서 사의지의 수행은 범부에게는 깨달음에 이르는 길이지만 보살이나 부처에게는 이미 필요치 않은 수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