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般若心經)·성법스님

반야심경 / 성법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2. 1. 09:06
 고양시 용화사 성법스님  http://www.sejon.or.kr

⊙ 물질에서 진리를 찾아
관자재보살 행심반야바라밀다시 조견오온개공 도일체고액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 수상행식 역부여시 사리자 시제법공상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 법에서 수행방법으로

시고 공중 무색 무수상행식 무안이비설신의 무색성향미촉법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무무명 역무무명진 내지무노사 역무노사진 무고집멸도 무지 역무득 이무소득고
⊙ 수행방법에서 깨달음으로
보리살타 의반야바라밀다 고심무가애 무가애고 무유공포 원리전도몽상 구경열반 삼세제불 의반야바라밀다 고득야뇩다라삼먁삼보리 고지반야바라밀다 시대신주 시대명주 시무상주 시무등증주 능제일체고 진실불허 고설반야바라밀다주 즉설주왈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 모지사바하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무아'라면 어떻게 윤회하는가?

절대적이어야 할 종교에도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수년 간 세계적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킨, 댄 브라운의
'다 빈치 코드'
란 소설에 나오는 그런 음모론적인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특정 종교의 교리 자체를 이해해보려고 하는 사람이나, 심지어 자신의 종교에 절대적 믿음을 가진 신자들에게는 이성적으로 무조건 납득하고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에 앞서 당연히 일어나는 본질적인 의문들, 즉 교화시켜야 하는 처지에서는 설명해주기 아주 어렵고, 받아들이는 처지에 있는 사람은 혼란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
'네가 믿는 종교이니 무조건 받아 들여라' 한다거나, '의심은 믿음이 부족한 탓이다' 라고 밀어붙여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들이 종교의 교리 속에 있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경우 인간이 겪는 희로애락 중 어느 경우까지가 '신의 뜻'이고, 어느 경우까지가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자유의지'에 의한 것인가에 대한 회의에 납득할만한 기준점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신의 뜻이라고 단정 지으면서 경우에 따라서 선택적이고 자의적으로 자유의지 운운 하는 것은 분명 기독교의 교리 설명에 아킬레스건입니다.
이러한 지적에 대해 오히려 신의 뜻에 왜 교리 설명과 인간의 논리가 필요하냐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바로 그런 점이 한국 기독교의 최대 불행이라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인간의
'의지'
까지 신의 뜻과 범벅이 되어 인간 존재의 능동적 결정은 하나도 인정할 수 없는 결과가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논리라면 심지어 중인 제가 이런 글을 쓰는 것도
'신의 의지'
에 따른 행동이 됩니다.
물론
'사탄의 사주'
가 더 기독교적 판단이겠지만 말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의 주장대로라면 역설적으로
'신의 뜻' 중 정말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왜 석가모니를 '있게'하여 가엾은 사람들을 헷갈리게 만드느냐는 것입니다.

불교 역시 아킬레스건이 있습니다. 무아無我 윤회輪廻에 대한 논쟁입니다.
내가 없다면 어찌 윤회를 거듭할 내가 존재한다는 말인가? 다시 말해 내가 없는 것이 나의 실체라면, 윤회의 주체인 내가 없는 윤회가 어찌 있을 수 있는가?
실제로 이 골치 아픈 논쟁은 잊을 만하면 튀어나오는 논쟁인데, 필경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불교 쪽에서는 당연히 온갖 논리를 동원해 무아와 윤회를 둘 다 방어하려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무아는 불교의 헌법격인
삼법인三法印에서 제법무아(모든 법은 실체가 없다)
라고 했고, 윤회 또한 불교의 사상적 특허인데 절대 포기할 수 없지요.
그런데 냉정히 양쪽 주장을 검토해 보면 언어적으로는 방어하는 불교 쪽에 아쉬움이 느껴지는 것이 제 개인의 소견입니다.
불교 바깥쪽에서는 무아란 분명
'내가 없음'을 표현하는 말인데, 거기에 나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그것이 씨가 되어 윤회로 거듭난다면 '내가 전혀 없는 것'이 아니지 않느냐? 고 들이대면, 불교 안쪽에서는 논쟁의 방어고지를 사수하기 위해 무아란 '내가 전혀 없는 무의 개념이 아니다'
라고 열심히 설명합니다.
불교를 옹호하는 사람이야 불교 안쪽의 논리를 당연시 여기며 너희는 불교의 무아의 개념을 전혀 모르는구나 라고 답답해할 것입니다.
그러나 불교 밖에서 보는 일상적인 개념의 무아란 단어는
'내가 없다'는 말인 것도 사실 아닙니까?

그래서 저는 한국불교에 생각의 전환을 요구합니다.
즉, 무아란 말을 앞으로는
'공아'空我
로 대체하자는 것입니다.
다행히 무아와 윤회가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결국 상대에게 무아에 대해 설명하길
'그것은 없다는 무가 아니라 있고 없고를 넘어선 공의 개념이다'
라고 한결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무'無 자를 '공'空
자로 바꿔쓰면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윤회에 대해
'무'無 만 들먹이며 깐죽대는 사람이 있다면 대꾸해 주길 '당신은 없다 라는 일상적 언어인 무無의 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윤회와 불교를 제대로 알고 싶으면 공空을 공부해라'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금강경에서 '공'空이란 말을 한 마디도 못 쓰고, 300여년을 고민한 후 공을 쓰기 시작한 중국불교의 역사가 한국불교에 시사하는 점이 크다고 한 것입니다.

※ 성법스님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자년 새해에는
절이 용기와 도전으로,
망이 노력과 희망으로,
심이 베품과 자비로 변하는
해가 되시길 기원드립니다.
성 법 합장

주간 새소식
[알  림]

운영자 성 법입니다.
2007년이 벌써 다 가고 무자년인 서기 2008년이 되었습니다.
새해는 불기佛紀로는 2552년이 됩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2552년이 되는 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갈수록 고되지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 사람의 업보라 여기기에는, 힘없는 이들의 고통이 너무나 크고, 더욱 최선을 다하는 이들의 절망은 우리 모두의 절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부디 불법을 옹호하고 중생을 구호하는 화엄성중의 가피로 모든 중생이 절망에서 벗어나, 삶의 기쁨을 느낄 수 있다는 원을 세워서 그 원력으로 용화사에서 정월 초하루부터 7일간 화엄신중기도를 봉행할 예정입니다.
동참하시어 새해에는 모두 기쁜 일만 충만하시길 기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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