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장광록 (百丈廣錄)
1.
말로는 불법과 세속을 가려야 하고, 총론과 각론을 나누어야 하며,
궁극적인 교설(了義敎語)인지 방편교설(不了義敎語)인지를 분별해야 한다.
궁극적인 교설로는 맑음을 논하고 방편교설로는 탁함을 논하며,
염법(染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범부를 가려내고,
정법(淨法) 쪽의 허물을 설명하여 서인을 가려내야하니,
이것은 9부교(九部敎:교학의 총칭)에 입각해서 설명하는 것이다.
목전의 눈 먼 중생에게는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해 주어야 하며,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 말할 경우에는 직접 그를 출가시켜
계율을 지키고 선정을 닦으며 지혜를 배우게 해 주면 된다.
한편 테두리를 벗어난 범부에게는 그런 식으로 지도해 서는 안되니
유마힐 (維摩詰)이나 부대사(傅大士) 같은 부류가 여기에 해당한다.
백사갈마(白四갈磨)를 받은 사문 앞에서 말할 경우,
그들은 계?정?혜(戒定慧)의 힘을 빠짐없이 갖추고 있으니,
다시 그런 식으로 설명한다면 그것을 맞지 않는 말(非時語)이라 할 것이며,
맞지 않는 설명이르모 꾸며서 하는 말(綺語)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사문에게라면 청정한 법 쪽의 허물을 설명해야 한다.
즉 있다 없다(有無)하는 등의 법을 여의고, 닦고 증득하는(修證) 모두를 떠나며,
그것을 떠났다는 것조차 떠날 것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다.
물든 습기(習氣)를 깎아 없애려는 사문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도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없애버리지 못했다면 역시 귀머거리속인이라 할 것이니,
그에게도 선정을 닦을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한다.
이승(二承)의 경우는 탐욕과 성내는 병통을 다 쉬어 버렸으나 탐내는 마음이 없어진
경계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나 이는 무색계(無色界)이다.
그러나 이것은 부처님의 광명을 가리고 부처님 몸에 피를 내는 것이므로
그에게도 선정을 닦고 지혜를 배우게 해야 하며, 깨끗하고 더러움을 구별해 주어야 한다.
더러운 법이란 탐욕.성냄.애착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우며,
깨끗한 법이란 보리.열반.해탈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운다.
여기에서 비추어 깨달으면(鑑覺) 깨끗하고 더러운 양쪽 갈래와 범부다 성인이다 하는 법과 색,소리,냄새,맛,촉감,생각과 세간 출세간법에 털끝만큼의 애착(愛取)도 전혀 없게 된다.
이미 애착하지 않게 되고 나서는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아 옳다고 여기는데
그것을 처음선(初善)이라 한다.
이것은 조복된 마음(調伏心)에 안주하는 것이며 뗏목이 아까와 버리지 못하는
성문으로서 이승(二乘)의 도이며, 선나과(禪那果)이다.
애착하지도 않고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앉지도 않으면 이를 중간선(中善)이라 한다.
이는 반자교(半子敎)로서 아직은 무색계(無色界)이나 이승과 마군의 도에 떨어짐은 면하였으나,
선병(禪炳)과 보살의 속박이 있다.
애착하지 않음에 눌러 앉지도 않고 눌러앉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것은 마지막선(後善)이라 한다.
이는 마자교(滿字敎)로서 무색계에 떨어짐을 면하고,
선울 닦는 병통에 떨어짐을 면하며,
보살승에 떨어짐을 면하고,
마왕의 지위에 떨어짐을 면한다.
그러나 지혜(智)에 막히고 지위(地)에 막히고 행(行)에 막혀 자기 불성(佛性)을 보는 데에는
마치 밤에 무엇인가를 보는 것과 같다.
불지(佛地)에서 두 가지 어리석음(二愚)을 끊는다 하는 경우는
첫째 미세소지우(微細所知愚),
둘째 극미세소지우(極微細所知愚)이다.
그러므로 ‘큰 지혜를 가진 사람은 미진(微塵)을 타파하여 경전(經卷)을 벗어났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가령 이 3구(三句:세가지 善)를 꿰뚫어 세 단계에 매이지 않는다면
교학(敎家)에서는 그것을 세 번 뛰어 그물을 벗어난 사슴에 비유하며
번뇌를 벗어난 부처라고 하는데 그를 구속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이는 연등불(然燈佛)의 뒷 부처님이 속하며,
최상승(最上乘), 상상지(上上智)로서 불도 위에 선 것이다.
이 사람은 불성을 가졌으며 스승(導師)으로서 막힘없는 바람과 막힘없는 지혜를 구사한다.
뒤에 가서는 인과와 복덕?지혜를 자재하게 굴리니,
수레를 만들어 인과를 실어 다르며 삶에 처하여도 삶에 매이지 않고
죽음에 처하여도 죽음에 매이지 않으며,
5음(五陰)에 처하여도 문이 여닫히듯 5음에 매이지 않아,
가고 머뭄에 자유롭고 드나듬에 어려움이 없다.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지위와 우열을 논할 것이 없으며 개미 몸을 받아서까지도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불가사의한 정토일 것이다.
그렇다 해도 이는 속박을 풀어주는 말일 뿐이니 저들 스스로에게 부스럼이 없다면
긁어 부스럼을 만들지는 말아야 한다.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것도 부스럼이니,
있다 없다는 식으로 법을 설명했다 하면 모조리 긁어 부스럼이 되는 것이다.
일체법은 모두 유?무(有無)에 포함되는데,
10지보살(十地菩薩)은 탁류(濁流)가 되고, 일체중생(一切衆生)은 청류(淸流)가 된다.
맑은 모습은 곱게 설명하지만 그것은 흐린 쪽의 허물만 말하는 것이 된다.
지난날 10대제자(十大弟子) 사리불(舍利弗) 부루나(富樓那)와 바른 믿음을 가진 아난(阿難)
삿된 믿음을 가진 선성(善星) 등은 저마다 본보기나 법칙이 있었는데,
모두들 부처님에게 설파당했던 것이다.
그들은 팔만겁을 선정에 머무는 사선팔정(四禪八定)의 아라한은 아니었으나
행할 바를 의지하고 집착하여 정법(淨法)이라는 술에 취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성문인(聲聞人)의 불법을 들으면 위 없는 도를 행할 마음을 내지 못하고
그래서 선근(善根)을 끊은 불성 없는 사람이라 하는 것이며,
경정(敎)에서는 이를“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는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라고 하였다.
한 생각 마음이 물러나 지옥에 떨어지는 것은 쏜살같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물러난다고만 할 수도 없으며
그렇다고 일방 적으로 물러나지 않는다고 할 수도 없다.
문수.관음.세지 등이 수다원(須陀洹)지위로 되돌아와 같은 부류가 되어
이끌어 주는 경우를 물러났다 할 수는 없으니,
그런 상황을 수다원이라 부를 뿐이다.
비추어 깨달아(鑑覺) 유.무 모든 법에 매이지 않고 3구(三句)와 맞고 안맞는
모든 경계를 꿰뚫으면 백천만억의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였다는
소문을 듣는다 해도 듣지 못한 긋하고,
그 듣지 않는다는 것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
이런 사람을 두고 물러났다 한다면 잘못 생각하는 것이이다.
그들은 어디에도 매어 둘 수 없는데 이를 “부처님은 늘 세간에 계시면서도 세간법에 물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 부처님이 법륜 (法輪)을 굴리느라 물러난다고 해도 불.법.승 (佛法僧)을 비방하는 것이며,
부처님이 법륜을 굴리지 않아 물러나지 않는다고 해도 역시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조법사(肇法師)가 말씀하시기를 ,
“보리의 도는 재볼 수 없음이 위없이 높고 끝없이 드넓으며 끝없이 깊숙하여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말을 하면 살받이가 되어 화살을 부르는 꼴이다” 라고 하엿다.
비추어 깨닫는다(鑑覺) 할 때,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니 비추어 깨닫는 것이
그런 것이라 인정 한다면 비추어 깨닫는 것 바깥에 따로 무엇이 있어 모조리 마군의 말이 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을 붙들고 머문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과 같으며,
자연외도 (自然外道) 의 말이라고도 한다.
여기서 말하는 비추어 깨닫는다는 것이 자기 부처라 해도 그것은 짧은 말이며 헤아리는 말이니
여우 울음소리와도 같아서 오히려 끈끈하게 달라붙는 집착 쪽에 속한다.
스스로 알고 절로 깨닫는 이것이 자기 부처인 줄 전혀 알지 못하고,
밖으로 치달려 부처를 찾는다.
선지식의 설법을 의지하여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것이 나오게 하는 약을 지어
밖으로 치달려 구하는 병을 치료한다.
이윽고 밖으로 치달려 구하지 않게 되면 병이 나았으니 약은 버려야 한다.
스스로 알고 스스로 깨닫는 데에 집착한다면 그것은 선병(禪病)이며, 영락없는 성문이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면 얼음 자체가 물이긴 하나 목마름을 풀어주기 어려운 것과도 같으며,
또는 꼼짝없이 죽을 병이라 하기도 하니 세상 의원들도 속수무책일 뿐이어서
원래 이들은 부처가 아니다.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한다.
부처란 중생 편에서 쓴 약이니 병이 없으면 먹을 필요가 없다.
약과 병이 함께 없으지면 맑은 물과 같다.
부처란 감초를 넣은 물이나 꿀물과도 같아 매우 달콤한 것이나
맑은 물 쪽에서 보면 원래 없다거나 있다거나를 집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또 이 이치는 누구나 본래 가진 것이며, 모든 부처와 보살은
구슬(珠)을 보여주는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그것은 원래 어떤 물건이 아니므로 그것을 알 필요도 없고 이해할 필요도 없으며,
그것이 옳다 그르다 할 필요도 없다.
그저 상대적인 개념 (兩頭可)을 끊기만 하면 된다.
있다느니 있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고, 없다느니 없지 않다느니 하는 말을 끊으면
양쪽의 자취가 나타나지 않아 양쪽에서 그대를 잡아당겨도 끌리지 않으며,
어떠한 테두리(量數)도 그대를 얽어 매지 못한다 .
그리하여 부족하거나 완전하지도 않고 범부도 성인도 아니며 밝음도 어두움도 아니다.
앎이 있음도 앎이 없음도 아니고, 얽매임도 해탈도 아니어서 어떠한 이름도 붙일 수 없다.
어째서 실다은 말이 아닌가.
허공을 다듬어 불상을 만든다든가 허공을 청.황.적.백으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법은 무엇으로도 견줄 수 없고 비유할 수도 없으므로,
법신은 함이 없어 어떠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法身無爲不墮諸 數)”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의 몸은 이름이 없어 설명할 수 없으며,
실다운 이치인 공문(空門)에는 닿기 어렵다.
마치 어디든지 앉을 수 있는 파리도 불꽃 위에는 앉지 못하듯 중생도 그러하여
어디든 반연할 수 있으나 반야(般若)에는 반연하지 못한다.
선지식을 찾아뵙고 하나 하나 알기를 (知解)구한다면 그것은 선지식 마군이니,
말과 견해를 내기 때문이다.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내어 일체중생을 다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겠다도 발원 하면
이는 보살법지(法智)의 마군이니,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다.
재계(齋戒)를 지키고 선(禪)을 닦으며 지혜(慧)를 배우는 것은 유루선근(有漏善根)이다.
그들은 비록 도량에 앉아성불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항하사수 모래알만큼의 사람을 제도 한다 해도 모두 벽지불과(壁支佛果)를 얻을 뿐이니,
이는 선근 (善根)의 마군으로서 탐착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어디에도 탐착하지 않고 물들지 않으며 신령한 이치만이 오롯이 남아
매우 깊은 (禪定)에 들어앉아 더이상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삼매(三昧)의 마군이니,
오래동안 맛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열반에 올라 탐욕을 떠나 고요해지면 그것은 마군의 업 (業)이다.
지혜로 해탈하였다 해도 얼마간 마군의 그물을 벗어나지 않으면
비록 백권 위타경(圍陀經)을 이해한다 할지라도 모조리
지옥의 찌꺼기로서 부처님과 같아지고자 하나 될 수 없는 일이다.
선.악과 유.무 등 보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으면 즉시 공(空)에 떨어지는데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는 줄을 모르므로 도리어 공에 떨어지는 것이다.
부처와 보리 ,유,무 등의 모든 법을 구하는 것은 근본을 버리고 지말을 쫓는 것이다.
지금 거친 밥으로 생명을 잇고 헤진 옷을 기워 추위를 막으며
목마르면 물을 마시는 일 외에는 모두 유.무 등의 법일 뿐이어서
털끝만큼도 매인 생각이 없다면 이 사람은 점차 가볍고 밝아질 소지가 있다.
선지식은 있음(有)에 집착하지 않고 없음(無)에도 집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 마군의 말을 벗어나 말을 꺼내도 사람을 얽어매지 않는다.
설법을 해도 스승이라 자칭하지 않고 골짜기의 메아리같이
말이 천하에 가득 차 입으로 짓은 허물이 없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쏠린다.
만일 “나는 설법할 수 있다”라든가 “나는 스승이고 너는 제자이다”하고 말한다면
그것은 마군의 말이다.
또 “눈빛이 부딪치는 곳에 도가 있다”라든가, “부처는 부처가 아니고, 보리.열반.해탈...”
하면서 근거없는 말을 한다.
또한 하나하나 알음알이 (知解)를 근거없이 설명하며
한손을 들고 한 손가락을 세우는 것을 보고는 “이것이 선(禪)이고 도 (道)다”라고 한다.
이런 말은 사람을 얽어매는 것으로 그칠 기약이 없이 비구에게 결박만 더해주는데,
말하지 않는다 해도 구업(口業)을 짓은 것이다.
그러니 마음의 스승이 될지언정 마음을 스승으로 삼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방편교설(不了義敎)에는 인간.천상의 스승이 있고,
부처님(導師)이 있으나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에서는
인간.천상에게 스승이 되지 않으며 법을 스승삼지도 않는다.
마음(玄鑑)을 붙잡지 못했거든 우선 궁극적인 교설에 의지해야 할 것이니
조금은 가까운 데가 있기 때문이다.
방편교설은 귀머거리 속인 앞에서나 설명하는 것이 합당할 뿐이다.
한편 유 무 모든 법에 머물지 않고 머뭄 없는 데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그를 큰 선지식 또는 오직 한 분이신 부처님이라 한다.
이 큰 선지식에는 두 사람이 없으니 나머지는 모조리 외도이거나 마군의 말이다.
여기서는 상대적인 개념으로서의 모든 유무 대경법(對境法)을 깰뿐이다.
탐착하고 물들지 말것이며, 결박을 푸는 일을 하지 않기만 하면 되니,
사람을 가르치는 말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가르칠 말이 따로 있고,
사람에게 줄 법이 따로 있다고 한다면 이를 외도나 마군의 말이라 한다.
궁극적인 교설인지 방편교설인지를 알아야 하며,
생사를 말하는 것인지 약병(藥病)을 말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또한 반대로 비유를 든 것인지(逆喩) 유사한 비유를 든 것인지(順喩)를 알아야 하며,
총론인지 각론이지를 알아야 할 것이다.
만일 “닦아서 부처가 된다”, “닦을 것도 있고 깨칠 것도 있다”,
“마음이 곧 부처다”,“마음 그대로가 부처다”,
이것은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방편교설이고
부정논법이 아니며 총론이고 한 됫박쯤 되는 말이다.
또한 염법(染法) 쪽만을 가려 하는 말이고 유사한 비유를 드는 말이며,
죽은 말이고 범부 앞에서 하는 말이다.
한편“닦아서 부처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닦을 것도 없고 깨칠 것도 없다”,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
“부처도 부처님 말씀이다”라고 한 것은 궁극적인 교설이고 부정논법이며,
각론이고 백 섬들이 말이다.
또한 3승교(三乘敎) 밖의 말이고 반대 비유를 드는 말이며,
정법(淨法) 쪽에서 하는 말이다.
살아 있는 말이며 수행 지위에 있는 사람 앞에서 하는 말이다.
수다원으로부터 곧장 10지(十地)에 오르기까지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더러운 법진(法塵)에 속하고,
번뇌 쪽에 포함되며,
방편교설에 속한다.
궁극적인 교설에서는 지키라(持)하고,
방편교설에서는 범하라(犯)하는데 부처님의 경지에는 지키고 범할 것이 없어
궁극적인 교설과 방편교설을 다 인정하지 않는다.
싹을 보고 토질을 알아내고 탁함으로 맑음을 분별하는데,
여기서 비추어 깨닫는 것을 맑은 쪽에서 헤아려 본다면 그 비추어 깨달음은 맑음이 아니고,
비추어 깨달음아니 해도 역시 맑음이 아니며,
맑지 않음도 아니며, 견해(見)도 아니다.
물이 더러우면 물이 더럽다고 말하나 물이 맑으면 아무 것도 말할 것이 없으니,
말을 하면 도리어 그 물을 더럽히는 것이다.
묻지 않는 물음도 있고 설명 없는 설명도 있다.
부처님 부처를 위해 설법하지 않으니 평등한 진여법계(眞如法界)에는 부처가 없고,
중생을 제도하지도 않으며,
부처는 부처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은 참다운 복전(福田)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주관인지 객관인지 그 말을 가려내야 한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에 탐착하고 물들어 그 경계에 혹하면 자기 마음이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으며,
생각을 내지 않는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부처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보살에 속한다.
마음마음은 주인(主宰)이고 관조하는 작용은 바깥경계(客塵)에 속하는데
파도로 물을 설명하듯 만상을 관조하고는 할 일이 없다.
이렇게 고요함과 동시에 관조하면서도 현묘한 이치라고 자처하지 않으면
자연히 고금을 관통할 수 있다.
그래서“신령함은 관조하는 일(功)이 없으나 지극한 효험(功)이 항상 있어서
어디서든 부천님(導師)이 될 수 있다“라고 한 것이다.
중생의 분별하는 성품(性識)은 한번도 부처님의 단계를 밟은 적이 없기 때문에
끈끈하게 집착하는 성품으로 때때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집착한다.
그들은 잠깐 묘한 이치를 맛보아도 약이 되지 못하며,
잠깐 틀을 벗어난 도리를 들어도 믿음이 가지 못한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보리수 아래서 49일을 말 없이 사유(思惟)하셨다.
지혜가 깜깜하여 무어라 설명하기도 어렵고 비유할 수 도 없기 때문에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바탕하는 것이며,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해도 불,법,승을 비방하는 것이다.
불성이 있다고 하면 집착한다는 비방을 듣고 불성이 없다고 하면 허망하나는 비방을 들을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불성이 있다 하면 보태는 오류(增益謗)를 범하고,
불성이 없다 하면 덜어내는 오류 (損減謗)를 범하며,
불성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고 하면 앞뒤가 안맞는 오려(相違謗)를 범하고,
불성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고 하면 희론의 오류(戱論謗)를 범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말하지 않으려 했으나 중생이 해탈할 기약이 없겠고,
처음부터 말을 하면 중생이 또 말에 따라 이해를 하여 적은 데는 덧붙이고 많은 것은 덜어낼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설법을 하지 않고 빨리 열반에 들겠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 뒤 과거 부처님 모두가 3승법(三乘法)을 말씀하셨음을 돌이켜 생각하고는
방편설로 거짓 이름을 세웠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그에게 부처라 하고, 본래 보리가 아닌데 보리,열반,해탈등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그가 백 섬을 지고는 일어나지 못함을 알고 우선 한되?한홉을 지워주었으며.
궁극적인국 교설은 그가 믿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방편교설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하여 선법(善法)이 퍼져 악법(惡法)을 누르기도 하였으나
선과(善果)의 기한이 다 되면 악과(惡果)가 바로 도래하였다.
부처가 되면 중생도 나타나고,
열반에 들면 생사가 나타나며,
밝아지면 어둠이 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들은 엎치락 뒤치락하는 유루인과(有漏因果)로서 그것을 받기를 생각하지 않을 자가 없다.
엎치락뒤치락하는 일에 휘말리지 않으려거든 상대적인 개념을 끊기만 하면 되니,
어떠한 테두리도 그를 매어두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며, 가깝지도 멀지도 않다.
높낮이도 없고 평등도 없으며 가고 옴도 없다.
문자가 집착하지만 않으면 그대를 막는 양쪽 극단이 그대를 붙들지 못하여
번갈아 나타나는 고락과 엇갈리는 명암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진실된 실제 이치가 진실이 아니기를 하며 허망도 허망이 아니기도 하니,
다듬을 수 없는 허공처럼 테두리를 갖는 물건이 아니다.
마음에 조금이라도 알음알이를 낼틈을 준다면 테두리에 메이게 된다.
또한 괘(卦)의 조짐이 금?목?수?화?토에 관할되듯 아교풀이 다섯 군데를 함께 붙여 버리듯
마왕이 자유롭게 자기 집으로 붙잡아 갈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모두 처음선?중간선?마지막선 세 구절로 연결되어 있다.
처음에는 그에게 좋은 마음을 내도록 하는 것이며, 중간엔 좋다는 마음마저 타파해야 하며
그런 뒤에야 비로소 마지막선이라 하는 것이다.
예컨대 “보살은 보살이 아니니, 그래서 보살이라 한다”,
“법은 법이 아니며, 법 아님도 아니다”라 하니, 같은말이다.
여기서 한 구절만을 설명하면 중생들은 지옥에 빠지며,
세 구절을 한꺼번에 설명하면 스스로 지옥에 들어갈 것이니,
그것은 부처님과는 상관없는 일이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이 자기 부처라는 것까지 설명하면 처음선(初善)이며,
지금은 ‘비추어 깨달음’에 붙들고 머물지 않는다면 중간선(中善)이며,
불들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내지 않는다면 이는 마지막선(後善)이다.
이상과 같다면 연등부처의 뒷 부처에 속하니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다.
그렇다고 부처는 법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라고 잘못 말하지 말라.
이 땅의 초조(初組)께서 말씀하시기를,
“잘 하는 것도 없고 성스러움도 없어야 성스러운 부처님이다.”하고 하셨다.
여기서 성스러운 부처란 9품(九品)의 망상꾸러기(精靈)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용,축생 등의 부류와 제석범천 이하 모든 것들은 다신통변화를 부릴 수 있고,
상품(上品)의 정령도 백겁 고금의 일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찌 그들을 부처라 하겠는가.
저 아수라 왕은 수미산 두 개와 맞먹을 정도로 몸이 매우 크다.
그러나 제석천과 싸울 때에야 힘이 그만 못하다는 것을 알고
백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연뿌리 구멍으로 들어가 숨는다.
그들의 신통변화와 변재가 적은 것은 아니나 부처님의 가르침이라 할 수는 없으니
절차와 등급이 느슨하여 오르고 내림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 깨닫지 못했을 때를 탐진(貪瞋)이라 하고, 깨닫고 나면 부처님의 지혜라고 한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옛날과 사람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옛날 하던 것(行履處)과 다를 뿐이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2.
누군가가 물었다.
“초목을 베고 땅을 개간하면 죄보를 받습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죄가 있다고 단정하지도 못하고 죄가 없다고 단정하지도 못한다.
죄가 있고 없고는 사실 그 사람에게 달린 것이다.
있다 없는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고 물들어서 버리고 취하는 마음이 남아
3구(三句)를 꿰뚫어 마음이 허공과 같지만 허공 같다는 생각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죄가 없다고 단정한다.”
다시 말씀하셨다.
“죄를 짓고 나서 죄가 있다고 보지 않는다고 하면 말이 안되고,
죄를 짓지 않았는데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안 될 말이다.
율(律)에서 말하기를,
‘본래 미혹하여 살인을 하거나 나아가 서로 살인을 한다 해도 살생죄라 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하물며 선종(禪宗) 문하에서이겠는가.
마음이 허공 같아서 어디에도 머물지 않으며,
허공 같다는 생각도 없는데 죄가 어디에 자리하겠는가.“
다시 말씀하셨다.
“선도(善道)는 닦을 것이 없으니 물들지만 않으면 된다.”
“안팎의 마음을 녹여 다하기만 하면 된다.”
“경계를 관조하는 쪽으로 말하지만 지금 유,무 등 모든 법을 관하는데
아무 탐욕과 집착이 없고 또한 집착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공부하면 될 것이다.
공부는 때묻은 옷을 빠는 것과도 같은데 옷은 본래 있는 것이나 때는 밖에서 온 것이다.
유,무 등 모든 소리와 색은 기름때와도 같은 것이니 아예 마음에 두지 말라.
보리수 아래 32이상과 80종호는 색에 속하고, 12분교(十二分敎)는 소리에 속한다.
그러니 이제 유,무와 모든 성색으로 흐르는 허물을 끊고 마음을 허공같게 해야 한다.
이렇게 공부하기를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할 것이다.
죽는 마당에서는 옛날부터 익숙했던 길을 찾아간다 해도 오히려 끝까지 가지 못하는데,
그때 가서 새로 조복하여 공부한다면 기약이 없다.
죽는 순간에는 좋은 경계가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나는데 마음으로 더 좋아하는 곳을 먼저 받게 된다.
지금 나쁜 일을 하지 않으면 그때 가서도 나쁜 경계가 없고 설사 나쁜 경계가 있다 해도 좋은 경계로 변한다.
죽는 순간에는 두렵고 미친 마음으로 자유롭지 못하다.
낱낱의 경계법에 아무런 애욕과 물들임이 없다 해도 그렇다는 생각에 머물지 말아야 자유인이다.
지금은 인(因)이고 죽음은 과(果)인데 과업(果業)이 나타나면 어째서 두려워 하는가.
옛과 자금이 달라짐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옛에도 지금이 있다면 지금에도 옛이 있을 것이며,
옛날에 부처가 있었다면 지금도 부처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자유를 얻는다면 미래 세상까지 자유로울 것이다.
한 생각 한 생각이 유?무 등 모든 법에 매이지 않는다면 예나 지금이나 부처가 사람이고 사람이 부처일 뿐이다.
이것이 삼매정(三昧定)이기도 하니,
정을 가지고 정에 들어갈 필요가 없고,
선(禪)을 가지고 선을 생각할 필요도 없으며,
부처를 가지고 부처를 찾을 필요도 없다.
다음의 말씀과 같은 것이다.
“법은 법을 구하지 않고 법은 법을 얻지 않으며,
법은 법을 행하지 않고 법은 법을 보지 않아서 자연히 법을 얻는 것이지,
얻음으로써 다시 얻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보살은 이렇게 바르게 법을 사유하여 독존해야 하며,
독존한다고 인식하는 법지(法智)도 없어야 한다.
본성은 그대로가 여여(如如)하여 인(因)에 의해 자리가 매겨지는 것이 아니니,
이것을 체결(體結)또는 체집(體集)이라 이름하기를 한다.
지혜로 알 수도 없으며 식(識)으로 분별할 수도 없는 것으로서 사량이 끊긴 곳이며 응적(凝寂)한 자체가 다하여 헤아림이 영원히 없다.
마치 바다에서 큰 물결이 다하면 파랑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과도 같다.”
또 말씀하셨다.
“큰 바닷물에 바람이 없다가 홀연히 소용돌이가 생기면 그
것이 생긴 줄을 안다하니, 이것은 미세한 가운데 거침(細中之추)이다.
앎에서 앎이 없어져 여여(如如)함으로 돌아감은 미세한 가운데 미세함(細中之細)이니,
이것은 부처의 경계이다.
여기서부터 비로소 아는 것이니 이를 최고의 삼매(三昧之頂),
삼매왕(三昧王) 또는 이염지(爾염智)라고도 한다.
이것이 모든 삼매를 내고 모든 법왕자(法王子)를 관정(觀頂)하며?색?성?향?미?촉?법 모든 국토에서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고 안팎으로 통달하여 어디든 막힘이 없다.
일색(一色)이 일진(一塵)이고 일불(一佛)이 일색(一色)이며 일체불이 일체색이고,
일체진이 일체불이다.
또한 모든색?성?향?미?촉?법도 이처럼 낱낱이 모든 세계에 두루 가득하다.
이는 미세한 가운데 거친 것으로서 좋은 경계이니,
모든 상근기가 알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이며,
모든 상근기가 생사에 드나들면서 일체 유?무 들을 뛰어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상근기가 설명하는 것이며,
상근기가 드는 열반이며,
더할 것 없는 도이며,
견줄 것 없는 주문(呪)이다.
모든 말씀 가운데 으뜸가는 가정 심오한 말씀으로 다다를 사람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신다.
마치 맑은 파도가 맑고 흐리며 깊고 넓은 물의 모든 작용을 설명할 수 있는 것처럼 모든 부처님이 아껴주는 것이다.
행주좌와에 이렇게 할 수만 있다면 나는 당장 깨끗하고 밝은 몸을 나타낼 것이다.
또 말씀하셨다.
“그대들 스스로는 평등하고 말도 평등하듯 나도 그러하며 불국토 하나 하나마다 소리?냄새?맛?촉감 등 모든 일이 다 마찬가기다.
이로부터 연화장세계(蓮華藏世界)에 오르기까지 가로 세로가 모두 이와 같다.
처음 안 것을 붙들고 깨달았다(解)고 한다면 그것은 ‘정결(頂結)’또는 ‘정결에 떨어졌다(墮頂結)’고 한다.
그것은 모든 번뇌의 근본으로 스스로 지견(知見)을 내어 밧줄도 없이 자기를 결박하기 때문이다.
알 대상에 일부러 얽매여 25유(二十五有)의 세간이 있게 되면,
다시 일체 번뇌문을 흩어 다른 사람을 결박한다.
여기서 처음 안다 한 이승의 견해를 ‘이염식(爾염識)’또는 ‘미세한 번뇌’라 한다.
바로 이것을 끊어없애고 나면 ‘정신을 돌려 공(空)의 소굴에 안주한다’ 하며,
‘삼매의 술에 취한다’고 한다.
또한 ‘해탈 마군에게 결박되어 세계의 생성과 파괴가 좌우되는 정력(定力)이 다른 국토로 새어나가도 전혀 느끼거나 알지 못한다’하며,
‘두려워할 해탈의 깊은 구덩이’라 하여 보살은 모두가 이를 멀리 여윈다.
경전을 읽고 교학을 공부하며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필연코 자기에게로 환원되어야 한다.
모든 말씀은, 지금의 비추어 깨닫는(鑑覺) 성품이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휩쓸리지 않음을 밝혀주는 것이다.
그대들 여러스님네가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경계에 붙들려 있음을 반조해 본다면
그것은 금강의 지혜(金剛智)로써 자유롭게 홀로 설 자격을 갖추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줄 알지 못한다면 12부경을 다 외워낸다 해도 증상만(增上慢:깨치지 못하고서 깨쳤다고 착각하는 자만심)을 이룰 뿐이어서 부처님을 기만하는 것이지 수행이랄 수 없다.
모든 색과 소리를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안
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아야 수행이랄 수 있다.
경전 읽고 교학을 공부하는 것은 세속의 입장에서라면 훌륭한 일이겠지만
이치를 밝힌다는 입장에서는 답답한 일이니,
10지 수행인도 벗어나지 못하고서 생사 강물에 들게 되는 것이다.
3승교(三乘敎)는 다만 탐내고 성내는 등의 병통을 치료하는 것이 우선이지
그 의미를 이해하려 들 필요는 없다.
이해가 탐욕이 되고 탐욕은 다시 병통이 되기 때문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그것에서도 떠나
3구 바깥으로 철처히 벗어나면 저절로 부처와 다를 것이 없다.
자기가 부처인데, 부처가 되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할까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그저 부처 아닌 것이 근심일 뿐이다.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에 얽매이면 자유롭지 못하다.
이치를 확실히 알지 못한 채 복과 지혜부터 갖추면 복과 지혜에 실려다니는 것이
마치 천민이 높은 분을 부리는 꼴이 되니,
우선 이치를 확실히 안 뒤에 복과 지혜를 갖추는 것이 좋겠다.
복과 지혜를 갖추려 하는가.
그때그때마다 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금으로 만들며,
바닷물을 소락(소酪)으로 변화시키고 수미산을 쪼개 가루로 만들어야 한다.
또한 사해바닷물을 움켜서 한 터럭에 넣으며,
하나의 의미에서 무량한 의미를 내고,
무량한 의미에서 하나의 의미를 내야 할 것이다.“
또한 이렇게도 말하였다.
“실각(失脚)해서 전륜왕(轉輪王)이 되면 4천하(四天下) 사람들에게 하루에 10선(十善)을 행하게 하나 그 복과 지혜는 자기를 비추어 깨닫는 것과 비교할 수 없다.
그것을 왕이 될 인연이라 하나. 유?무 모든 모든 법에 반연하고 집착함을 전륜왕이라 하는 것이다.
지금 가슴속으로 유?무등 모든 법을 일체 받아들이지 않아서
4구(四句) 밖으로 벗어남을 비었다(空)고 한다.
공(空)을 불사약(不死藥)이라고도 하는 것은 죽은 왕(前王)을
다시 불러오기 위해서 그렇게 이름한 것이다.
불사약이라고는 하나 왕과 함께 복용하니 두 가지도 아니고 그렇다고 한 가지도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다 둘이다 하는 생각을 내면 역시 전륜왕이라 할 것이다.
지금 어떤 사람이 복과 지혜와 네가지 물건(四事:의?식?주?약)으로
4백만억 아승지세계의 6취4생(六趣四生)에게 공양하여 꼬박 80년을
그들의 바램을 들어주고는 뒤에 생각하기를,
‘그러나 이 중생들은 모두가 노쇠하였으니 불법으로 그들을 인도하여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얻게 하고 아라한도(阿羅漢道)까지도 얻게 하리라’한다 하자.
중생에게 즐겁게 하는 것만을 베푼다 해도 그 공덕이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수다원과와 아라한도를 얻게 한 이 시주(施主)의 무량무변한 공덕에랴.
그러나 50번째 사람이 경전을 듣고 따라서 기뻐한(隨喜) 공덕만은 못한 것이다.
「보은경(報恩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마야부인은 5백의 태자를 낳아 그들 모두 벽지불과(벽支佛果)를 얻었는데
멸도(滅度)하고는 각각 탑을 세워 공양하고 낱낱에게 예배하며 찬탄하였다.
그러나 위 없는 보리를 얻을 자식 하나 낳아서 내 마음(心力)더느니만은 못하다.“
지금 백천만 대중 가운데서 체득한 사람이 하나 있다면 그 가치는 삼천대천세계와 맞먹을 만하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이치를 깊이 깨달으라고(玄解) 늘 대증에게 권하는 것이다.
스스로의 이치가 현묘하여 복과 지혜를 부릴 수 있다면
마치 높은 사람이 천한 사람을 부리는 것과도 같으며, 머물지 않는 수레와도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면 ‘상투 속의 구술’이라 하며,
또는 ‘값을 매길 수 있는 보배 구슬’이라 하며, 또는 ‘똥을 퍼 들여온다’고도 한다.
이것을 붙들고 깨달았다는 생각을 내지 않으면 왕의 상투 속에 있는
밝은 구슬을 그에게 주는 것과도 같으니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라 하며, 또는 ‘똥을 퍼냈다’고도 한다.
부처님은 속박을 벗어난 사람인데도 도리어 얽매임 속으로와서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또한 생사 저쪽 사람이며, 현묘하게 끊긴 저쪽 사람인데도
이쪽 언덕으로 돌아와 이렇게 부처가 되셨다.
그러나 사람과 원숭이는 함께 가지 못하는 법이니,
여기서 사람은 10지(十地)보살을 비유하고 원숭이는 범부를 비유한 것이다.
경전을 읽어 알고자(知解) 하는 것을 일방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아니나
3승교를 이해하여 영락의 장엄구를 훌륭히 얻고
32상의 굴택을 얻는 것으로 부처를 찾는다면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경에서 말하기를, “소승의 3장학(三藏學)을 탐착하는 자와는
가까이 하지도 말라”하였는데, 하물며 스스로 그러는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그는 파계한 비구이며 이름뿐인 아라한(名字羅漢)으로서,
「열반경」에서는 16악율의(十六惡律義)에 넣고 있다.
그것은 물고기를 사냥하며 이익을 위해 고의로 살생하는 것과 똑같은 짓이다.
대승방등(大乘方等)은 감로수 같기도 하고 독약 같기도 하니,
없애버릴 수 있다면 감로 같고, 없애버리지 못하면 독약과 같다.
경전을 읽으면서 저 생사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결코 그 의미를 꿰뚫지 못할 것이니,
아예 읽지 않는 것이 휠씬 낫다.
한편으로는 경전도 읽고 선지식도 참례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스스로 안목을 갖춰 그 생사라는 말을 분별해야 할 것이다.
명백하게 분별해내지 못한다면 결국 꿰?지 못할 것이어서 비구라는 속박만 가중될 뿐이다.
그러므로 교학에서 현묘한 종지를 배운 사람은 문자를 읽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마치 ‘자체(體)는 설명하여도 모습(相)은 설명하지 않으며,
의미는 설명해도 문자는 설명하지 않는다’고 한것과도 같다.
이렇게 설명하는 것을 ‘진실한 말’이라 하며,
문자를 설명하면서 모조리 비방이라 한다면 그것을 ‘삿된 말’이라 한다.
보살의 설명은 법다워야 하니, 그래야 ‘진실한 말’이라 할 것이다.
증생들에게 마음(心)은 지키게 하되 현상(事)에는 매달리지 않게 히야하며,
실천(行)은 하게 하되 이론(法)을 붙들지는 않게 해야 한다.
사람은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되며 의미를 설명해야지 문자를 설명해서는 안된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설명하는 것 역시 두 눈을 가진 사람의 말이다.
‘욕계에는 선(禪)이 없다’고 말했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색계(色界)에 이룰 수 있을까.
먼저 발심 수행의 단계[因地]에서 두 가지 정(定)을 익혀야 뒤에
초선(初禪)의 유상정(有想定)과 무상정(無想定)에 이를 수 있다.
유상정은 색계사선(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나고,
무상정은 무색계사공(無色界四禪) 등의 하늘에 태어난다.
그러므로 욕계에는 선이 없음이 분명하며 선은 색계이다.
3.
어떤 이가 물었다.
“지금 이 국토엔 선이 있다고 하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동하지도 않고 선에 들지도 않음이 여래선(如來禪)인데,
선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조차 떠났다.”
4.
어떤 이가 물었다.
“‘유정(有情)은 불성이 없고 무정(無情)은 불성이 있다’ 한것은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람으로부터 부처에 이르는 것은 성인이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며,
사람에서 지옥에 이르는 것은 범부라는 생각에 집착하는 것이다.
범부와 성인 두 경계에 물들고 애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를 ‘유정은 불성이 없다’라고 하며,
범부와 성인 두 경계와 유?무 모든 법에 갖고 버리는 마음이 전혀 없으며
갖고 버림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면 ‘무정은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망정의 얽매임이 없기 때문에 무정(無情)이라 이름하는 것이지
목석이나 허공?노란 국화꽃?푸른 대나무 등 감정이 없는 것을 가지고 불성이 있다 하는 것과는 다르다.
이들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면 그들 중에 수기를 받고 성불했다는 자를 경전에서 볼 수 없는 까닭이 무엇인가?
지금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유정의 변화를 받지 않는 점이 푸른 대나무와도 같으며,
모든 근기에 다 응하고 모든 상황을 다 아는 것이 노란 국화꽃과도 같다는 것이다.“
다시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았다면 무정에 불성이 있다 하겠지만
부처님의 단계를 밟아 보지 못했다면 유정에게 불성이 없다하겠다.”
5.
한 스님이 물었다.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법화경 화성유품에 나오는 부처님)은
10겁(十劫)을 도량에 앉아 있었는데도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서 불도를 이루지 못하였다 합니다.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겁(劫)이란 ‘막힘’ 또는 ‘머뭄’이라고도 하니 하나의 착함에 머물고 열 가지 착함에 막히는 것을 말한다.
인도에서는 부처(佛)라 하고, 이 땅에서는 그것을 깨달음(覺)이라 하는데,
자기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이 착함에 막히고 집착되므로 선근인(善根人)에게서 불성이 없다.
그러므로 ‘불법이 목전에 나타나지 않아 불도를 이루지 못했다’고 한 것이다.
악에 부딪치는대로 악에 머무는 것을 ‘중생의 깨달음’이라 하고,
선에 부딪치는대로 선에 머무는 것을 ‘성문의 깨달음’이라 하며,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음을 옮다고 여기는 자를 ‘이승의 깨달음’ 또는 ‘벽지불의 깨달음’이라 한다.
선?악 양쪽에 머물지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내지 않음을 보살의 깨달음‘이라 한다.
또한 머물지 않고 어디에도 머물것이 없다는 생각을 내지 않아야만 비로서 ’부처의 깨달음‘이라 하니, 마치 ’부처가 부처에 머물지 않아야 진실한 복전(福田)이라 이름한다‘고 한 것과 같은 이야기다.
천에 하나 만에 하나라도 홀연히 이를 체득한 자가 있다면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배라 하니,
어디서나 스승이 되어 부처가 없는 곳에서는 부처라하고,
법이 없는 곳에서는 법이라 하며, 스님 없는 곳에서는 스님이라 하며
’큰 법 바퀴를 굴린다‘고 하는 것이다.
6.
어떤 스님이 물었다.
“옛부터 조사들께서는 모두 비밀스러운 말씀으로 계속 전수 해왔다 하니 무슨 의미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비밀한 말은 없으며, 여래께서는 비밀스럽게 간직한 것이
없으시다. 비추어 깨닫는다 함은 말은 분명하나 형상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하니 이것이 ‘비밀스러운 말’이다.
수다원(須陀洹)에서 10지(十地)에 오르도록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모조리 법의 티끌에 속하고,
무슨 말이든 있기만 하면 번뇌라는 테두리에 들어가고 방편교설에 속하니 말이 있었다는 하면 무엇이든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궁극적인 교설마저도 부정하는데 다시 무슨 ‘비밀한 말’을 찾겠는가.”
7.
또 물었다.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허공이 대각(大覺)에서 생겼다 하였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허공은 물거품에, 바다는 자성(自性)에 비유된 것이다.
신령하게 깨닫는 자기 본성은 허공을 능가하므로
‘바다에서 물거품 하나가 일어나듯 대각에서 허공이 나왔다’고 한 것이다.”
8.
또 물었다.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 하였는데 무슨 말입니까?”
스님께서 말씀 하셨다.
“숲은 마음에 나무는 몸에 비유된 것인데,
숲으로 설명해야 두려운 마음이 생기므로 ‘숲은 베어도 나무는 베지 말라’고 한
것이다.“
9.
또 물었다.
“말을 하면 표적이 되어 화살을 부른다’하니,
말을 하여 표적이 되고 나면 근심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근심에 매인 점이 똑같다면 무엇으로 승속을 구별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화살을 쏘아 도중에 딱 부딪치듯 해야만 한다.
만일 어굿난다면 반드시 다치는 것이 있을 것이다.
골짜기에서 메아리를 찾는다면 여러 겁 동안 찾아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으니
메아리는 입가에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잘 잘못은 찾아와서 묻는데에 있다.
귀결점을 묻는다면 도리어 화살을 맞을 것이니,
역시 ‘허깨비인 줄 알면 허깨비가 아니다’ 한 말씀과 같다.
삼조(三租)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종지를 모르고 망념을 가라앉히느라 헛수고하는구나‘ 하셨다.
또 ’보이는 것(物) 보는 것(見)이라 오인한다면 마치 기와 부스러기를 가진 것과 같으니
무엇에 쓰겟으며,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목석과 무엇이 다르랴‘하고 하셨다.
그러므로 보는 것이다 아니다 하면 둘 다 잘못이니,
이 한가지 예로 모든 것을 견주어 보라.”
10.
또 물었다.
“번뇌와 32상이 본래 없다는데, 어떻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는 부처님 쪽의 일이다.
본래 번뇌가 있었다거나 지금 32상이 있다는 것은 범부의 생각일 뿐이다.”
11.
또 물었다.
“끝없는 몸을 가진 보살(無邊身菩薩)이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한다 하니 어째서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끝이 있다 없다는 견해를 냈기 때문에 여래의 정수리를 보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등의 모든 견해가 전혀 없고 그 견해 없음마저도 없다면
이것을 ‘정수리가 나타난다’고 하는 것이다.”
12.
또 물었다.
“지금 사문들은 다들 말하기를,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경?논?율?선(禪)과 지식(知解)을 낱낱이 배우므로
신도들에게 네 가지로 공양을 받을 만하다’고들 하는데 정말 받을 만합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관조하는 작용(照用)으로 볼 때 소리?색?냄새?맛과유?무 모든 법 등
낱낱의 경계에 티끌만큼의 집착이나 물들음도 없고,
집착하거나 물들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다면
이런 사람은 매일 만 냥의 황금도 받아 먹을 수 있다.
그러나 유?무 등 모든 법을 대할(照) 때 6근의 반연을 다 깎아내
털끌만큼도 탐욕과 애착을 다스려 버리지 못하고,
나아가서는 시주에게 쌀 한톨 실낱 하나라도 구걸한다면
축생이 되어 무거운 짐을 지고 끌려다니면서 하나하나 갚아주어야 할 것이다.
그것은 부처님을 의지하지 않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집착이 없는 사람이며 구함이 없는 사람이며 의지함이 없는 사람이니,
지금 분주하게 부처가 되고자 탐착한다면 모두가 등지는 짓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오랫동안 부처를 가까이 하면서도 불성을 모른 채
세상을 구제하는 자를 구경할 뿐,
6취(六趣)에 윤회하면서 오랫만에야 부처를 보는 자,
그를 두고 부처 만나기 어렵다 한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문수는 7불의 스승이며 사바세계에서 으뜸가는 보살이라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부처를 보노라 나는 법을 듣노라 하는 근거없는 생각을 내어
부처님에게 위신력을 받고 두 철위산(鐵圍山)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알지 못한 것은 아니었으나 다만 모든 학인들에게 본보기가 되어 주고,
후학들이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도록 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보배 여의주’라 하며,
‘보배 꽃으로 발꿈치를 받쳐 든다’하는 것이다.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내는 것은 유?무 등으로 보는 것이니 이것을 두고
‘눈병난 눈으로 사물을 본다고 하며,
‘봄에 매임(見纏)’‘봄에 덮임(見蓋)’ 또는 봄의 재앙(見蘖)이라고도 한다.
이제 생각 생각 모든 견문각지(見聞覺知)와 모든 티끌 때를 다 없앤다면
한 티끌 한 색이 온통 한 부처이며 한 생각 일으켰다 하면 그대로 한 부처인데,
3세5음(三世五陰)의 생각 생각이라면 그 숫자를 뉘라서 헤아리겠는가.
이것을 ‘허공을 가득 메운 부처’라 하며,‘분신불(分身佛)’,‘보배탑’이라 하니,
그러므로 항상 찬탄하는 것이다.
지금 연명하는 것을 보면 쌀 한 톨과 한 포기 채소에 의지한다.
먹지 못하면 굶어 죽고,
물을 마시지 못하면 목말라 죽으며,
불을 쬐지 못하면 추워서 죽는다.
하루라도 없으면 살지 못하고,
하루 쯤 없다 해도 죽지는 않으나 4대(四大)에 붙들려 여전하지 못하다.
도통한 옛사람은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고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다.
불에 타고자 하면 탔고, 물에 빠지고자 하면 빠지지 않았다.
살겠다면 살았고, 죽겠다면 죽었다.
이렇게 가고 머물음이 자유로우니,
그에게는 자유로울 분수가 있었던 것이다.
마음이 어지럽지 않다면 부처를 구하거나 보리?열반 구할 필요가 없다.
만일 부처를 집착하고 구한다면 탐심에 속하며,
탐심이 변하여 병이 된다.
그러므로 ‘부처 병 고치기가 가장 어렵다’고 하는 것이다.
불법을 헐뜰어야만 밥을 먹을 수 있는데,
여기서의 밥이란 신령하게 알아보는 자기 본성으로서 번뇌 없는 밥(無漏飯)?해탈밥(解脫飯)을 말한다.
이 말은 10지(十地)보살을 치료하는 것으로서 초발심부터 십지에 이르기까지이다.
지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모두다 ‘파계승’,‘명자나한(名字羅漢)’ 또는 ‘여우’라 이름하는데, 그들은 분명히 공양을 받을 자격이 없다.
지금 메아리같이 고르게 소리를 듣고, 바람같이 평등하게 냄새를 맡으면서 일체 유?무등의 법을 떠나고, 떠났다는 것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이런 사람에게는 어떠한 허물도 얽어매지 못한다.
위 없는 보리?열반을 구하기 때문에 ‘출가’라고 이름하나 그래도 그것은 삿된 발원이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나는 안다’하면서 세간에서 승부를 다투며 논쟁하는 경우이겠는가.
한 문중을 탐하고 한 제자를 아끼며, 한 안주처에 연연해 하고 한 신도와 관계를 맺는다.
옷 한 벌, 밥 한 그릇, 명예 하나, 이익 하나에 다시 ‘나는 그 모두에 걸림이 없다’하는데, 이는 스스로를 속일뿐이다.
자기 5음(五陰)에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다른 사람에게 몸 마디마디가 토막난다 해도 원망하거나 아깝다는 마음이 전혀 없고 번뇌도 없다면,
나아가서는 자기 제자가 다른 사람에게 머리 끝에서 발 끝까지 채찍을 맞고 이상과 같은 낱낱의 일을 당한다 해도 한 생각도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이 없다며,
그래도 한 생각도 없다는 그것을 옳다고 여겨 거기에 머문다면 그것을 ‘법 티끌’이라 하니,
10지(十地)에서도 이를 벗어나지 못하고 생사의 강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항상 사람들에게 권하기를 ‘삼악도(三惡道)를 두려워하듯 이 법 티끌을 두려워해야만 홀로 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가령 열반을 능가하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조금도 값지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걸음마다 부처로서 연꽃을 밟을 것도 없이 백억의 몸을 나툰다.
유?무 등 모든 법에 털끌만큼이라도 애욕에 물든 마음이 있다면 연꽃을 밟고 다닌다 해도 마군의 짓과 똑같은 것이다.
‘본래 청정하다’거나 ‘본래 해탈하였다’는 데에 집착하여 이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이해했다고 자처하는 자는 자연외도(自然外道)에 속하며, 한편 인연에 집착하여 닦아 증득을 이루는 자는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무(無)에 집착하면 단견되도(斷見外道)에,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亦有亦無)는 데 집착하면 변견외도(邊見外道) 또는 우치외도(愚痴外道)에 속한다.
부처다 열반이다 하는 등의 견해를 내지 않기만 하면 된다.
유?무 등 모든 견해가 전혀 없으며 견해가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봄(正見)이라 한다.
또한 아무것도 들음이 없고, 들음이 없다는 것도 없음을 바르게 들음(正聞)이라 하며, 이것을 두고 외도를 꺾었다 하는 것이다.
또한 범부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아주 신통한 주문(大神呪)이며, 보살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가장 높은 주문(無上呪)이며, 나아가 부처라는 마군이 찾아오지 못하게 하는 견줄 바 없는 주문(無等等呪)이다.
중생 아수라를 변화시키고 2승 아수라를 변화시키며, 보살 아수라를 변화시키니, 이렇게 하여 3변정토(三變淨土)가 되는 것이다.
유무(有無) 범성(凡聖) 등 모든 법은 광석에 비유되고, 자기의 여여한 이치(如理)는 금(金)에 비유된다. 금과 광석이 분리되면 순금이 드러나니 홀연히 어떤 사람이 돈과 보배를 찾으면 금을 돈으로 만들어 그에게 주는 것이다.
마치 국수 자체는 진정 모든 모래와 진펄이 없어 어떤 사람이 시루떡을 구걸하면 국수를 시루떡으로 만들어 주는 것과도 같다.
또는 지혜로운 신하가 왕의 마음을 잘 알아서 왕이 행차할 때 선타파(先陀婆)*하고 부르면 즉시 말을 대령하고, 밥 먹을때 선타파 하고 부르면 즉시 소금을 바치는 것과도 같다.
이상은 현묘한 종지를 공부하는 사람이 잘 통달하여 어김없이 기연에 응함을 비유 한 것이며, 또는 육절사자(六絶獅子:6근?6진을 끊은 사람)라고도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하기를, ‘사람에 따라 백 가지 변화를 지어낸다’고 하였다.
10지(十地)보살은 주리지도 않고 배 부르지도 않으며,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다.
그러나 태우려 해도 태울 수 없으니, 일정한 테두리(量數)에 의해 한계 지워진다.
*선타파: 원래는 소금, 그릇,물,말(馬)을 뜻하는 말, 왕의 마음을 잘 아는 총명한 신하가 제때제때 알아서 이것들을 바친데서 유래하여, 지혜로운 이를 뜻하는 말이 되었다.
부처님은 그렇지 않아서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지만, 타려하면 타고 빠지려 하면 빠진다.
바람?물등 4대를 자유롭게 부리므로 모든 색이 부처님 색이며, 모든 소리가 부처님 소리다.
더러운 찌꺼기인 변하는 자기 마음이 다하여 3구(三句) 밖으로 뚫고지나야 이 말을 할 수 있다.
청정한 보살 제자는 매우 밝아서 무슨 말을 하든지 유무에 집착되지 않고 모든 작용(照用)에 있어서도 청탁에 구애되지 않는다.
병이 있는데도 약을 멱지 않으면 어리석은 사람이며, 병이 없는데 약을 먹으면 성문(聲聞)이다.
한 가지 법을 단정적으로 집착하면 정성성문(定性聲聞)이며,
그저 많이 듣기만 하면 증상만성문(增上慢聲聞)이다.
또한 남을 알면 유학성문(有學聲聞)이며,
공정(空寂)에 빠지고 자기를 알면 무학성문(無學聲聞)이다.
탐?진?치등은 독이며 12분교(十二分敎)는 약이니, 독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약을 떼지 못한다.
그러나 병 없이 약을 먹으면 약이 도리어 병이 되어, 병이 없어져도 약은 없어지지 않는 것이다.
나지 않고 소멸하지 않음은 무상(無常)의 의미이다.
「열반경」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세 가지 약한 욕심이 있다.
첫째는 사부대중이 에워싸주었으면 하는 욕심이고,
둘째는 모든 사람이 내 문도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며,
셋째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성인이나 아라한임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욕심이다.
또한「가섭경(迦葉經)」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첫째는 미래의 부처님을 뵈었으면 하는 것이며,
둘째는 전륜왕(轉輪王)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며,
셋째는 찰리(刹利)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넷째는 바라문의 큰 성씨를 가졌으면 하는 것이며,
나아가서는 생사를 싫어하고 열반을 구하는 것이다.’
이상의 약한 욕심부터 먼저 끊어야 한다.
집착하고 물들어 요동하는 마음이 있기만 하면 그것을 ‘악한 욕심’이라 하는데,
모두가 6욕천(六欲天)에 들어가 파순(波旬)에게 부림을 당할것이다.”
13.
또 물었다.
“이십년 동안을 항상 ‘똥을 치우라’하셨는데 무슨 뜻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지견을 쉬고 모든 탐욕을 쉬어 낱낱이 3구(三句) 밖으로 뚫고 지나면 이를 ‘똥을 치웠다’고 한다.
부처와 보리를 구하며,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구하면 그것은 똥을 퍼 들여오는 것이지 또을 펴낸다고 하지는 않는다.
부처라는 견해를 지어내 볼 것이나 구할 것, 집착할 것이 있다 하면 ‘희론의 똥’이라 하며,
‘거친 말’, ‘죽은 말’이라 한다.
마치 ‘큰 바다는 죽은 시체를 잠재우지 않는다’ 한 말과도 같다.
부질없이 지껄이는 말을 ‘희론’이라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이 청?탁을 분별하면 그것을 ‘희론’이라 한다.
경전에서는 모두 스물 한 가지 공(空)으로 중생의 티끌 번뇌를 닦아 없애준다고 한다.
또한 사문이 재계(齋戒)를 지키고,
인욕과 화합을 닦으며 자비희사(慈悲喜捨)하는 것은 일상적인 승가의 법도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이해한다면 완전히 부처님의 가르침에 의지하는 것이니 탐착으로 의지하는 것을 인정 할 수는 없다.
부처나 보리 등의 법을 얻고자 하는 자는 손을 불에 갖다 대는 것이다.
문수보살은 ‘부처다 법이다 하는 견해를 일으키기만 하면 자기를 다치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문수보살은 부처님 앞에서 칼을 빼어들었고, 앙굴마라는 부처님에게 칼을 들이댔던 것이다. 저 ’보살은 5무간업(五無間業)을 지어도 무간 지옥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한 말씀과도 같다.
그들 보살은 원통(圓通)으로 빈틈없으니 5역죄(五逆罪)로 빈틈없는 중생의 그것과는 다르다.
파순으로부터 부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가진 기름때를 털끌만큼도 갖지 않는다 해도 그런 데에 의지하여 집착하면 ‘이승의도’라 한다.
하물며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이해한다 하며 논쟁과 승부 다투는 말을 하는 경우이겠는가.
이들은 논쟁승(論爭僧)이지 무위승(無爲僧)은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탐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남이 없음(無生)이라 하며,
바른 믿음(正信)이라고도 한다.
일체법을 믿고 집착하면 ‘믿음을 갖추지 못했다’하며, ‘믿음이 완전하지 못하다’,
‘치우쳐서 고르게 믿지 못한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를 일천제(一闡提:성불할 종자가 없는 중생)라고 이름한다.
이제 단박에 깨치려 하는가.
사람(人)과 법(法)을 동시에 딱 끊어 비우고(空), 3구(三句) 밖으로 꿰뚫어야 하니,
그것을 ‘온갖 테두리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믿음이며, ‘법’이란 계율?보시?지혜(聞慧)등이다.
보살은 차마 성불하지 않고 차마 중생이 되지도 않으며,
차마 계율을 지니지도 않고 차마 파계를 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던 것이다.
지(智)는 흐리고 관조(照)는 밝으며, 혜(慧)는 맑고, 식(識)은 탁하다.
부처로 말하자면 관조하는 지혜(照慧)라고 하며, 보살이면 지(智)하 하고,
이승과 중생 쪽으로 치면 식(識) 또는 번뇌라고 한다.
부처라는 결과 속에는 중생이라는 원인이 들어 있고 중생 원인 속에도 부처라는 결과가 들어 있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법륜을 굴린다(轉法輪)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법륜이 구른다(法論轉)하고,
보살에 있어서는 영락장엄구(纓珞莊嚴具)라 하고,
중생에게 있어서는 오음총림(五陰叢林)이라 한다.
부처에게 있어서는 본지무명(本地無明)이라 하는데, 이는 무명의 밝음(無明明)이다.
그러므로 ‘무명이 도의 바탕이 된다’하였으니,
어둡게 가리운 중생의 무명과는 다르다.
저것(彼)은 객관이고 이것(此)은 주관이며, 저것은 들리는 것(所聞)이고 이것은 듣는 것(能聞)이다.
그것은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 (不一不異),
아주 없어지지도 않고 항상하지도 않으며(不斷不常),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不來不去).
살아 있는 말(生語句)이며,
틀을 벗어난 말 (出轍語句)로서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며,
부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니다 다 이와 같다.
온다 간다, 단멸이다 영원하다, 부처다 중생이다 하는 것은 죽은 말이다.
두루하다 두루하지 않다, 같다 다르다, 단멸이다 항상하다 하는 등은 외도의 설이다.
반야바라밀은 자기 불성인데 마하연(摩詞衍)이라고도 한다.
마하(摩詞)는 크다는 뜻이고, 연(衍)은 수레(乘)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자기의 지각(知覺)을 지켜 머물면 또한 자연외도(自然外道)가 된다.
지금의 비추어 깨달음(鑑覺)은 지킬 필요가 없으며,
따로 부처를 구할 것도 없다.
따로 구한다면 인연외도(因緣外道)에 떨어진다.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에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그르다 할 것도 있게 된다’고 하셨다.
어떤 것을 귀중하게 여기면 그것에 혹하게 되니, 믿으면 믿는데 혹하고 믿지 않으면 비방을 이룬다.
그러므로 귀하다 귀하지 않다 하지 말고, 믿는다 믿지 않는다 하지도 말라.
부처님은 무위(無爲)도 아니다.
무위가 아니라 해서 허공과 같은 적막함도 아니다.
또한 부처님은 허공같이 큰 마음을 가진 중생(大心衆生)으로서 비추어 깨달음이 많다.
비록 많다고는 하나 그 비추어 깨달음은 청정하여 탐내고 성내는 귀신이 그를 붙들지 못한다.
부처님은 온갖 번뇌를 벗어난 분으로 털끌만큼의 애욕과 집착이 없으며,
애욕과 집착이 없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이를 6도만행(六度萬行)을 빠짐없이 갖추었다고 한다.
장엄구(莊嚴具)가 필요하다면 갖가지가 다 있으며, 필요치 않아서 사용하지 않는다 해도 잃지 않는다. 이렇게 인과와 복지(福智)를 자유롭게 부린다.
이는 수행이며 수고롭게 일을 하며 무거운 짐을 진 것은 아니데,
이를 수행이라 부른다 해도 도리어 이같지 않다.
삼신이 한문(三身一體)이며, 한몸이 삼신(一體三身)이다.
첫째는 법신실상불(法身實相佛)로서 법신불은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으니 밝음과 어둠은 허깨비의 변화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의 모습(實相)은 헛것(虛)을 상대로 지어진 이름이다.
그러나 본래 이름이란 없는 것이다.
‘부처님 몸은 함이 없어(無爲) 어떻난 테두리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한 것과도 같다.
성불하여 일신을 공양하는 등은 한 됫박 한 홉 들이쯤 되는 말이다.
요컨대 탁함을 상대로 맑음을 가려내 붙인 이름이므로 ‘실상법신불’이라 한 것이다.
또한 청정법신비로자나불이라 이름하며,
허공법신불,
대원경지(大圓鏡智:제 8식의 전변),
제8식(第八識),성종(性宗)*,공종(空宗)*,깨끗하지도 더럽지도 않은 불국토,
굴 속에 있는 사자,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
무구단(無垢檀),
제일의공(弟一義空),
현묘한 종지(玄旨)라 이름붙이기도 한다.
*성종(性宗):차별상(差別相)을 중심으로 일체법을 설하는 상종(相宗)에 대해 평등하고 진실된 성품을 설하는 종지.
*공종(공종): 상(相)을 부정하여 일체법의 실상인 공(空)을 설하는 종지. 중국에서는 유종(有宗)과 공종(空宗),혹은 상종(相宗)과 성종(性宗)으로 제교(諸敎)를 분류해 왔는데 유종,상종에는 소승과 유식, 공종, 성종에는 삼론종, 화엄종등이 있다.
*금강후득지(金剛後得智):금강정(金剛定)을 얻은 뒤 다시 차별지를 써서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지혜.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현묘한 뜻은 알지 못하고 부질없이 생각만 고요히 한다’고 하였다.
두번째 보신불(報身佛)로서 보리수 아래의 부처님이다.
또는 환화불(幻化佛)이라고도 이름하며,
상호불(相好佛),
응신불(應身佛),
원만보신노사나불,
평등성지(平等性智:제7식의 전변),
제7식(第七識),
안과에 응하는 부처님(酬因答果佛)이라 이름하기도 한다.
52선나수(五十二禪那數)와 같고,
아라한, 벽지불, 모든 보살과 같다.
또한 생멸 등의 괴로움을 받는 것도 똑같지만 중생이 업에 매어 고통을 받는 것과는 다르다.
세번째는 화신불(化身佛)로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에 아무런 집착과 물듬이 없으며, 물들음이 없다는 것마저 없다.
4구(四句)를 벗어나 훌륭한 말솜씨를 갖추셨으니 화신불이라 이름한다.
이 분이 천백억화신 석가모니불이며,
대신변(大神變)이며,
유희신통(遊戱神通),
묘관찰지(妙觀察智:제6식의 전변),
제6식(第六識)이라고도 한다.
여기에 공양하면 3업(三業)이 청정해져서 전(前際)에도 끊을 번뇌가 없었고,
지금(中際)도 지킬 자성이 없으며,
뒤에(後際)에도 이룰 부처가 없다.
이렇게 3제(三際)가 끊겼고,
3업(三業)이 청정하며,
3륜(三輪)이 공적하고,
3단(三檀)이 공(空)하다,
무엇을 ‘비구가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신다’하는가?
6근(六根)에 번뇌(漏) 없는 것을 말한다.
그것을 장엄한다고도 하는데, 모든 번뇌가 빈(空無)것을 수풀과 나무로 장엄했다 하며,
모든 물듬이 빈 것을 꽃과 열매로 장엄했다 하는 것이다.
빈(空無) 불안(佛眼)으로 수행인을 파악하고 법안(法眼)으로 청탁을 분별하면서 청착을 분별한다는 생각을 갖지 않으면 그것을 눈 없는 데(無眼)까지 도달했다면 한다.
「보적경(寶積經)」에서는 ‘법신을 보고 듣고 느끼고 알고 하는 것으로는 구하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색(色)이 없기 때문에 육안(肉眼)으로 볼 것이 아니며,
망정이 없으므로 천안(天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모습을 떠났으므로 혜안(慧眼)으로도 볼 수 없고,
모든 행(行)을 떠났으므로 법안(法眼)으로 볼 것도 아니며,
모든 식이 떠났으므로 불안(佛眼)으로 볼 것도 아니다.
이러한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을 부처의 생각(佛見)이라고 한다.
색(色)은 색이나 형색(形色)이 아님을 진색(眞色)이라 하며,
공(空)은 공이나 창공(太虛)이 아님을 진공(眞空)이라 하나,
색과 공도 또한 약과 병이 서로를 다스린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법계관(法界觀)에서는 ‘색(色)에 즉하지 않았다느니 할 수 없으며,
공(空)에 즉했다느니 공에 즉하지 않았다는니 할 수도 없다’라고 하였다.
눈?귀?코?혀?몸?의식에 모든 법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제7지(第七地)에 전변해 들어간다‘고 한다.
7지(七地)보살은 칠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위로 3지(三地)를 올라(向上)간다.
모든 보살의 심지(心地)는 명백(明白)하여 쉽게 오염되어 불이라고 말만 해도 바로 탄다.
색계(色界)에서 올라겸 보시가 병이고 간탐(간貪)이 약이며,
색계에서 내려가면 간탐이 병이고 보시가 약이 된다.
유작계(有作戒)란 세간법을 끊는 것이며,
다만 몸과 손으로 조작하지 않아 허물이 없으면 이를 무작계(無作戒)라 하며,
또는 무표계(無表界),무루계(無漏戒)라 하기도 한다.
그러니 마음을 움찔했다(擧心動念)하면 모조리 파계(破戒)라 하는 것이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에 혹하지 않고 혹하지 않는 데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으면 그것을 ‘빠짐없이 배우고 부지런히 생각(護念)하며 널리 유포한다’고 한다.
깨닫지 못했을 때를 어미(母)라 하고,
깨닫고 나서를 자식(子)이라 하는데,
깨달음이 없다는 생각도 없음을 어미 자식이 동시에 없어짐이라 한다.
이렇게 선에도 매이지 않고 악에도 매이지 않으며,
부처에 얽매이지도 않고 중생에게 매이지도 않는다.
테두리(量水)에도 마찬가지며,
나아가서는 아무런 테두리에도 매이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처는 얽매임에서 벗어나 한량을 뛰어넘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앎(知解)이나 설명(義句)에 탐착하는 것은 마치 어머니가 자식을 사랑하여 소락(수酪)을 많이 먹이기만 할 뿐 소화가 되고 안되고는 전혀 상관하지 않는 것과도 같다.
이 말은 10지(十地)에 비유된다.
즉 인간?천상에게 존대받는 번뇌,
색계 무색계에 태어나 선정과 복락을 누리는 번뇌,
자유롭게 신통으로 날며 숨고 난타나면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 정토(淨土)에 두루다니며 법을 듣지 못하는 번뇌,
자비희사(慈悲喜捨)와 인연(因緣)을 닦는 번뇌,
공(空)과 평등한 중도(中道)를 닦는 번뇌,
3명(三明)?6통(六通)?4무애(四無碍)를 닦는 번뇌,
대승심을 닦아 사홍서원을 발하는 번뇌,
초지,2지,3지,4지에서 분명히 이해하는 번뇌,
5지,6지,7지에서의 모든 지견(知見)번뇌,
8지,9지,10지에서 이제(二諦)를 동시에 관조하는 번뇌와 나아가서는 불과(佛果)를 닦는라 백만아승지겁 동안 행하는 모든 번뇌까지 설명이나 앎을 탐할 뿐 도리어 얽어매는 번뇌임을 모른다.
그러므로 ‘강을 보아야만 향상(香象)을 뛰울 수 있다’고 했던 것이다.“
14.
누군가 스님께 물었다.
“보십니까?”
스님께서 대답하셨다.
“본다.”
다시 물었다.
“본 뒤에 어떻습니까?”
그러자 스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보는 것이 둘이 아니다. 이제 보는 것이 둘이 아니라면 보는 것으로 볼 것을 보지 않는다.
만일 보는 것을 다시 본다면 앞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냐, 뒤에 보는 것이 보는 것이겠냐.
마치‘볼 것을 볼 때엔 보는 것이 아니며,
보는 것은 오히려 보는 것을 떠나 보는 것이 미치지 못한다’고 말한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법을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실행되지 않으
면 모든 부처님께서 빨리 기약을 주신다(授記)고 하였다.”
그러자 이렇게 따져 물었다.
“보는 것이 이미 보는 것이 아니라 한다면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어떻게 기약을 주신다는 말이 되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먼저 종지(宗)부터 깨달은 사람은 빨아놓은 옷처럼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상(法相)에 구애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모습 떠난 것을‘부처’라 하는 것이다.
허와 실을 둘 다 간직하지 않고 중도만이 오롯하고 묘하다.
한 가닥 같은 이 길을 통달하여 후진들이 그 단계에 계합하므로 ‘기약을 준다’고 할 뿐이다.
무명(無明)은 아버지이고 탐애(貪愛)는 어머니이며,
자기는 병이고 다시 자기를 치료함은 약이다.
자기라는 칼로 다시 자기 무명과 탐애라는 부모를 죽이므로 ‘부모를 살해한다’고 했던 것이다.
한 마디 말로 일체법을 견주어 타파하니,
때 아닌 때에 밥을 먹는 것도 마찬가지로.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은 때 아닌 밥이며,
나쁜 음식이며 보배 그릇에 담긴 더러운 음식이다.
또한 파계이며, 망령된 말이며, 잡스러운 음식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있다 없다는 등의 모든 법을 탐하여 소유하거나 조작하면 모두가 위배되는 것으로 도리어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이렇게 탐하고 물들면 그것을 모조리 ‘수수(授手)’라고 이름한다.
탐내거나 물들지 않고, 탐내거나 물들지 않음에도 머물지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조차도 없으면 반야화(般若火)라 한다.
이것은 손가락을 태우고 신명을 아끼지 않으며,
사지를 마디 마디 찢고,
세간을 벗어나며 저 세계에서 이 세계를 다스리는 것이다.
오장육부에 12분교와 유?무등 모든 법을 털끝만큼이라도 남겨두었다면 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러므로 구하고 얻을 것이 있어 마음을 내고 생각을 움직였다 하면 여우라고 한다.
이제 오장육부에 아무 구할 것도 얻을 것도 없다면 대시주(大施主)이며 사자후이다.
이 사람은 또한 얻을 것이 없는 거기에 머물지도 않고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마저도 없으니 육절사자(六絶獅子)라고 부른다.
너다 나다 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모든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 겨자씨에 수미산을 받아들이면서 일체 탐?진?팔풍(八風) 등을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또한 입 속에 큰 바위의 물을 머금으면서 일체 허망한 말은 귀에 받아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남에게 전혀 나쁜 짓을 하지 않아서 모든 불을 뱃속에 넣은 듯이 한다.
이렇게 낱낱의 경계에 혹하지 않고 성내지도 기뻐하지도 않으며 자기 육근문두(六根門頭)에서 깎아내고 정화하면 일 삼을 것 없는 사람(無事人)으로서 모든 알음알이(知解)를 극복하고 두타행(頭陀行)정진한다 하겠다.
이를 천안(天眼), 또는 분명히 관조함으로써 눈을 삼는다(了照爲眼)고 한다.
또한 법계성(法界性)이라 하니, 수례를 만들어 인과를 싣는 것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면 앞 생각(前念)이 나지 않고 뒷 생각(後念)이 이어지지 않는다.
앞 생각의 활동(業)이 없어지는 것을 중생을 제도했다고 한다.
앞 생각에 성을 내면 기쁜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니,
그것을 부처님이 계셔 중생을 제도한다고 한다.
모든 말씀은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니 병이 같지 않으므로 약도 다르다.
그러므로 어떤 때는 부처님이 있다 하고 어떤 때는 부처님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실다운 말로 병을 다스려 차도가 있으면 낱낱이 실다운 말이지만 차도가 없으면 그 모두가 허망한 말이다.
그러나 실다운 말이 견해를 내면 망령된 말이되고,
망령된 말이 중생의 전도를 끊으면 실다운 말이 되니 병 또한 허망하여 허망과 약이 서로 다스리기 때문이다.
부처님이 세간에 출현하여 중생을 제도하신 9부교(九部敎)의 말씀은 방편교설(不了義敎)이다.
성냄과 기쁨, 병과약이 그대로 자기라서 다시는 두 사람이 없는데,
어느 곳에 세간에 출현하는 부처가 있으며 어느 곳에 제도할 중생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경(經)에서도 ‘멸도(滅度)를 얻은 중생은 사실 없다’고 하였다.
또는 ‘부처와 보리를 좋아하지 않고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고 물들지 않음을 남을 제도한다(度他)하고, 자기를 고집하여 머물지 않음을 자기를 제도한다(自度)’고 하였다.
병이 같지 않기 때문에 약도 다르고 처방도 다르니 한 쪽으로만 고집해서는 안된다.
부처와 보리 등의 법에 의지하면 모조리 일정한 방향에 의지함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에 있어서는 한결같지 않다’고 하였던 것이다.
경전에서는 그것을 노란 잎사귀를 돈이라고 속이고 빈주먹 속에 있다고 속여 어린 아이를 달래는 비유를 들어하고 있다.
그러나 사라음은 이 이치를 모르니 그것을 무명(無明)과 같다고 한다.
‘반야를 행하는 보살은 내 말에 집착하거나 가르침에 의지하지 않는다’하였다.
성내는 마음은 돌덩이 같고 애욕은 강물과 같다.
지금 성내는 마음과 애욕만 없다면 산하석벽을 꿰뚫고 당장 귀머거리 속인병을 다스리며 다문변설(多聞辯說)로 눈병을 다스릴 것이다.
사람이 부처가 되면 얻었다(得)하고 사람이 지옥으로 떨어지면 잃 었다(失)한다.
옳다(是)그르다(非)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삼조(三祖)께서 말씀하시기를, ‘시비득실을 동시에 놓아 버리라’하셨다.
있다 없다 하는 등의 모든 법에 집착하여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유연(有緣)에 머물지 않는다 하고,
머물지 않는 거기에도 머물지 않으면 그것을 공인(空忍:忍은 바른 앎,
지혜라는 뜻)에 머물지 않는다고 한다.
자기 그대로가 부처이며 선도(禪道)를 깨달았다고 고집하는 자를 내견(內見)이라 하며,
인연과 닦아 얻음을 통해 이룬다고 집착하는 자를 외견(外見)이라 한다.
지공(誌公)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견과 외견 모두가 착각이다’라고 하셨다.
눈?귀?코?혀가 각각 유?무 모든 법에 집착하여 물들지 않으면 이를 4구게(四句偈)를 수지(受持)한다고 하며, 사과(四果)라고도 한다.
6입(六入)에 자취가 없는 것을 육신통(六通)이라 한다. 유?무 모든법에 막히지 않고,
막히지 않음에 머물지도 않으며,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면 이를 신통(神通)이라 한다.
나아가 이 신통을 지키지 않으면 신통이 없다고 한다.
‘신통이 없는 보살은 자취를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가장 불가사의한 향상 부처님(佛向上人)이시다.
또한 자기천(自己天)이며, 지혜로 관조함이다.
찬탄은 기쁨이며 기쁨은 경계에 속한다.
이렇게 기뻐할 경계는 하늘이며 찬탄하는 것은 사람이어서 사람과 하늘이 만나니 이것을 ‘청정한 지혜(淨智)는 한늘, 바른 지혜(正智)는 사람’이라 하기도 한다.
본래 부처가 아닌데 부처라 하면 그것은 체결(體結)이며,
부처라는 생각을 내지 않고 거기에 머물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마저도 없으면 이를 매임을 없앴다(滅結), 또는 진여(眞如),체여(體如)라 한다.
부처를 구하고 보리를 구하는 것을 현신의(現身意)라 하니,
조금이라도 구하는 마음이 있다면 모조리 현신의라 한다.
그러므로 ‘보리를 구함이 훌륭한 구함이긴 하나 티끌(塵累)을 더할뿐이다’하였다.
부처를 구하면 부처 대중이며, 유?무 등 모든 법을 구하면 중생 대중인데 이제 비추어 깨달음으로 유?무등 모든 법에 머물지 않으면 대중의 테두리에 들어가지 않는다.
소리?냄새?맛?촉감?법 등을 낱낱이 좋아하지 않고,
그 모든 경계를 탐착하지 않아서 십구(十句)의 탁한 마음이 없기만 하면 요인성불(了因成佛)*이며,
글(文句)을 배워 깨닫고자 하는 자는 인연성불(因緣成佛)이라 한다.
*이치를 바로 비추어 부처가 되는 것을 요인 성불이라 하는 것에 비해 여러
부처님을 보고 부처님을 알면 부처님을 설명할 수 있지만 안다 본다 하면 되려 부처님을 비방하는 것이다.
부처가 알고 부처가 보고 부처가 설명한다 해야 맞을 것이다.
이것은 불(火)을 본다 하면 옳겠지만 불이 본다 할 수는 없고,
칼로 물건을 벤다 하면 옳겠지만 물건이 칼을 벤다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부처를 안다는 사람,
부처를 보았다는 사람,
부처를 설명하는 사람은 향하수 모래알 같으나,
부처의 앎, 부처의 봄, 부처의 들음, 부처의 말씀은 만에 하나도 없다.
이들은 자신에게 눈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 의지하여 눈을 삼을 뿐이다.
경전에서는 이를 추론(比量智)이라고 부르는데,
지금 부처의 지해(知解)를 탐하는 것도 역시 비량지이다.
세간법으로 드는 비유를 유사비유(順喩)라 하는데 방편교설이 그것이다.
궁극적인 교설(了義敎)은 반대비유(逆喩)인데 머리?눈?골수?뇌를 버린다 한 것이 그것이다.
지금 부처?보리등의 법을 사랑하지 않는다 함은 반대비유로서 버리기 어려움을 머리?눈?골수?뇌에 비유하였다.
있다 없다 하는 모든 경계법을 관조함을 머리라 하고,
있다 없다 하는 경계법의 모양에 꺾이게 됨을 손이라 하며,
목전에 경계를 전혀 관조하지 않을 때를 골수?뇌라 한다.
성지(聖地)에서 범인(凡因)을 익혀 부처님은 중생 속에 들어가 동류로 이끌어 주시니,
그들 아귀와 함께 사지 마디마디를 불에 태우며 반야바라밀을 설명하여 발심하게 한다.
만일 오로가지 수행하는 연(緣)을 빌어 부처가 되는 것을 인연성불이라 한다.
지 성인의 경지에 있기만 한다면 무엇을 의지하여 그들에게 가서 말해주겠는가.
부처님은 모든 부류에 들어가 중생들에게 배와 뗏목이 되어 주고 그들과 함께 무한한 수고로움을 받아들인다.
이렇게 부처님은 괴로운 곳에 들어가 중생과 함께 괴로움을 받지만,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 같지는 않다.
부처님은 헛되게 괴로움을 받지 않는데 어떻게 괴롭지 않을 수 있겠는가.
괴롭지 않다 한다면 이 말은 틀린 것이다.
쓸데없는 말 하지 말라.
부처님은 신통이 자재하다느니 자재하지 못하다느니 하고 잘못 만들 한다.
부끄러운 줄 아는 사람이라면 감히 부처님은 유위다 무위다하지 못하며,
감히 부처님은 자유롭다 자유롭지 않다 하지 못한다.
찬탄하는 약방문(藥方文)을 제외하고는 추한 양 갈래를 드러내고 싶어하지 않는다.
경에서는 말하기를, ‘어떤 사람이 불보리를 한 쪽에 봉안하려 한다면 그 사람은 큰 죄를 짓는 것이다’하였고, 또‘부처님을 모르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해 준다면 허물이 없다’라고도 하였다.
무루(無漏)우유가 유루(有漏)병을 치료하는 것과도 같으니 그 소는 고원에 있지도 않고 하습지에 있지도 않아서 이 우유로 약을 만들 만하다.
여기서 고원은 부처를 비유한 것이고 하습지는 중생을 비유한 것이다.
‘여래실지법신(如來實智法身)에게는 이 병이 없다’한 것과도 같다.
막힘없는 말솜씨로 자유롭게 날면서 나지도 없어지지도 않으면 그것을 쓰라린 생로병사의 아픔이라 한다.
이것이 버섯국을 가만히 마시고 설사병을 앓다가 돌아가신 것이며,
가만히 밝은 자취를 숨긴 것이다.
밝음과 어둠을 모두 버리고, 갖느니 갖지 않느니 하지를 말라.
또한 갖지 않다는 것마저 없애라.
그는 밝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다.
왕궁에서 태어나 야소다라를 받아들이고 여덟가지 모습으로 성도하였다(八相成道)한 것은 성문외도가 망상으로 헤아린 것이니, ‘잡다하게 먹는 몸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또한 순타(純陀:부처님께 마지막 공양을 올린 사람)가 말하기를,
‘나는 여래께서 결코 받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하였다.
무엇보다도 두 눈을 갖추고 양쪽 일을 관조해내야(照破)하며,
한 쪽 눈만 가지고 한 쪽으로만 가서는 안되니,
그러면 저쪽 어디에 가게 될 것이다.
공덕천(功德天)과 흑암녀(黑暗女)는 늘 같이 다니는데 지혜있는 주인은 둘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마음을 허공같이 하고 배워야만 비로소 이룰 것이 있다.
인도의 첫 조사께서 말씀하시기를 , ‘설산(雪山)은 큰 열반에 비유된다’하셨고,
이 땅의 초조(初祖)께서는 ‘마음마다 목석같이 하라’하셨다.
삼조(三祖)께서는 ‘분명하게 인연을 잊는다’하셨고,
조계(曹溪)스님께서는 ‘선이고 악이고 전혀 생각하지 말라’하셨으며,
스승(先師:마조)께서는 ‘길 잃은 사람이 방향을 못가리는 것과도 같다’하셨다.
또한 조공(肇公)은 ‘지혜와 총명을 막아 버리고 홀로 깨달아 그윽하고 그윽한 자이라’하셨으며,
문수는 ‘마음은 허공 같아서 예배?공경으로 볼 바가 아니며,
심오한 수다라(修多羅)는 듣지도 못하고 수지(受持)하지는 못한다’하셨다.
이제 있다 없다 하는 모든 법을 전혀 보지도 듣지도 말고 육근(六根)을 막아라.
이렇게 공부하고 이렇게 경전을 지녀야 비로소 수행할 자격이 있다 하겠다.
이 말은 귀에 거슬리고 입에 쓸 것이다.
이 가운데서 이처럼 할 수만 있다면 다음 생 다음 다음 생에 나서는 부처없는 큰 도량에 앉아서 평등하고 바른 깨달음 이루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고 선을 악으로 바꿔 악법으로 10지보살을 교화하고 선법으로 지옥?아귀를 교화한다. 밝은 곳에서는 밝음의 결박을 풀고 어두운 곳에서는 어두움의 결박을 풀 것이다.
황금을 흙으로 만들고 흙을 황금으로 만들면서 모든 것으로 자유롭게 변화해 낼 수 있다.
항하사 세계 밖에서 구제해 주기를 바라는 자가 있으면 부처님께서는 즉시 30상을 그 사람 앞에 나타내 그 사람의 언어로 설법해 주신다.
근기 따라 교화하고 상대에 맞우처 다른 모습으로 무든 세계에 변화해 나타난다.
이렇게 아(我)와 아소(我所)를 떠났다 해도 저쪽 일에 속하며,
작은 작용이며,
불사를 짓는 법위에 포함된다.
크게 작용하는 자는 형체없는 데에 그 큰 몸을 숨기고, 들릴락말락한 소리에 큰 음성을 숨긴다.
마치 나무 속의 불과 같고 종소리 북소리와도 같아 인연이 닿지 않았을 때는 그것이 있다 없다 할수 없는 것이다.
축생이 천상에 태어날 과보를 침 뱉듯 버린다.
보살은 육도만행을 닦으며 마치 죽은 시체를 타고 강둑으로 건너듯,
감옥에 갇혔다가 변소간 구멍으로 빠져나오듯 한다.
부처님이 30상을 나타낸다 해도 그것을 ‘기름때 절은 옷’이 라고 한다.
또한 ‘부처님은 한결같이 오음(五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한다면 틀린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부처님은 허공이 아닌데 어떻게 한결같이 받아들이지 않기만 하겠는가.
가고 머뭄이 자유로와 중생과는 다르다.
한 천계(天界)에서 한 천계에 이르며,
한 불국토에서 한 불국토에 이르기까지 부처님의 변함없는 법이다.
또 말하기를, ‘3승교(三乘敎)에 의거한다면 그들의 신심어린 공양을 받으면 그들은 지옥에 있으며,
보살은 자비를 행하여 동류가 되어 교화 인도하며 은혜에 보답해야지,
항상 열반에만 있어선 안된다’고 한다.
또 말하기를, ‘불이 불을 바라보둣이 만지지만 않으면 불이 사람을 태우지 못한다’라고 한다.
이제다만 10구(十句)가 없으면 된다.
탁한 마음?사랑하는 마음?물든 마음?성내는 마음?고집하는 마음?머무는 마음?기대는 마음?집착하는 마음?가지려는 마음?그리워하는 마음은 하나에 가각 3구(三句)가 있다 낱낱이 3구 밖으로 꿰?으면 일체 비추는 작용(照用)을 자유로이 내 맡기며 말하고 입 다물고 울고 웃는 모든 행위가 부처님의 지혜일 것
이다.
오래 서 있었다. 편히 쉬어라.“
15.
누군가 물었다.
“무엇이 대승도에 들어가 활짝 깨치는 요법입니까(大乘入道頓悟法)?”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무엇보다도 그대는 모든 인연을 쉬고 만사를 그만두라.
선(善)?불선(不善)?세간?출세간,일체 모든 법을 다 놓아 버리고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말라.
몸과 마음을 놓아 버려 완전히 자유로와야 한다.
마음을 목석같이 하여 입 놀릴 곳 없고 마음 갈 곳이 없어야 한다.
마음의 대지가 텅 비면 구름장이 열리고 해가 나오듯 지혜의 햇살이 저절로 나타날 것이다.
다만 모든 인연을 쉬어 탐애와 성냄과 집착,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면 5욕8풍(五欲八風)이 닥쳐도 꿈쩍하지 않는다.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막히지 않고 모든 법에 혹하지 않으면 자연히 갖가지 공덕과 신통묘용(神通妙用)을 갖춘 해탈인이니,
모든 경계를 대할 때 마음에 다툼과 혼란이 없다.
거두지도 않고 흩지도 않은 채 성색을 꿰?어 아무 걸림이 없으니 이런 사람을 도인(道人)이라 하는 것이다.
선악?시비 그 어느것도 쓰지 않으며, 한 법도 애착하지 않고,
한 법도 버리지 않으니 이를 대승인(大乘人)이라 한다.
모든 선악, 공유(空有), 더럽고 깨끗함, 유위와 무위, 세간과 출세간, 그리고 복이니 지혜니 하는 것에 매이지 않는 것을 부처님의 지혜라 한다.
시비나 미추, 옳은 이치다 그른 이치다 하는 온갖 알음알이(知解)와 망정이 다하면 얽어맬 수 없어서, 어딜 가나 자유로우니, 이를 초발심보살이 그대로 부처의 경지에 올랐다고 하는 것이다.“
16.
누군가 물었다.
“어떤 경계를 대할 때 어찌해야 마음이 목석 같을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법은 본래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공(空)도 스스로 말하지 않으며, 색(色)도 말하지 않는다.
또한 시비와 염정도 사람을 얽어맬 마음이 없다.
단지 사람 스스로가 허망한 마을을 내어 얽매이고 집착하여 몇가지로 이해와 지견을 지어내고 몇가지로 애욕과 두려움을 낼 뿐이다.
모든 법이 저절로 생기지 않고 자기 한 생각 망상이 전도되어 모습을 가짐으로써 있게 되었음을 깨달아 마음과 경계가 본래 서로 닿을 수 없음을 알면 그 자리 그대로가 해탈이고 낱낱이 모든 법이 어디나 그대로 적멸 도량이다.
또 본래 성품은 무엇이라 이름붙일 수 없어서 본래 법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니며,
더러움도 깨끗함도 아니며, 공도 유도 선도 악도 아니다.
단 이것이 모든 염법(染法)에 어울려주면 그것을 인간?천상?이승(二乘)의 경계라 이름하는 것이다.
더럽거나 깨끗한 마음이 다하여 속박에도 머물지 않고 해탈에도 머물지 않으며,
유위 무위?속박 해탈등 모든 헤아림이 없어 생사를 일으켜도 그 마음이 자재하면 마침내 허망한 허깨비인 5온(蘊) 18계(界) 등 티끌이나 나고 죽는 온갖 문(12人)과 합하지 않고 아득히 벗어나 기대지 않는다.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가고 머뭄에 걸림없어 문 열리듯 생사에 왕래하게 되는 것이다.
도는 닦는 사람이라면 괴로움과 줄거음,
마음에 맞고 안맞는 갖가지 일이 닥쳐오더라도 물러서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명이나 의식을 염두에 둔다거나 공덕과 이익을 탐내서는 안된다.
세간 어느 법에도 걸림 없으며 가까이 하거나 사랑하지 않고 괴로움과 줄거움을 똑같이 여기며,
거친 옷으로 추위를 막고 맛 없는 음식으로 연명해야 한다.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나 귀머거리?벙어리같이 되어야 약간이라도 비슷해질 여지가 있을 것이다.
만일 마음 속으로 널리 지해(知解) 경계의 바람에 휘말려 생사 바닷속으로 되돌아 갈것이다.
부처님은 구함이 없는 사람이니 구하면 이치에 어긋나고,
이치는 구할 것 없는 이치이니 구하면 잃는다.
그렇다고 구함 없는 데에 집착하면 다시 구하는 것과 같아지며,
무위에 집착하면 다시 유위와 같아진다.
그러므로 경에 말씀하시기를, ‘법에 집착하지 않고,
법 아니데 집착하지도 않으며, 법 아님이 아닌 데도 집착하지 않는다’
하였다.
또 말씀하시기를, ‘여래께서 얻어신 이 법은 실재(實在)도 아니며 헛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던 것이다.
일생동안 목석 같은 마음으로 5음 18계와 갖가지 처(人),
5욕 8풍에 휘말리거나 빠져들지 않을 수만 있다면 생사의 인(因)이 끊긴다.
자유롭게 가고 머물며 모든 유위인과(有爲因果)나 유루(有漏)에 매이지 않는다.
뒷날 다시 스스로 얽매이지 않는 이것으로 인(因)을 삼고 동사섭(同事攝)으로 이익케하며,
집착 없는 마음으로 모든 사물을 대하며,
걸림 없는 지혜로 모든 속박을 풀어줄 것이니, 그것을 ‘병에 따라 약을 쓴다’라고 한다.”
17.
누군가 물었다.
“이제 출가하여 계를 받고 몸과 입이 청정해져 이미 모든 법을 갖추었다면 해탈할 수 있겠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조금은 벗어났으나 아직 심해탈(心解脫)이나 일체처해탈(一切處解脫)은 얻지 못했다.
18.
누군가 물었다.
“무엇이 심해탈이며 일체처해탈입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불?법?승(佛法僧)을 구하지 않고, 복과 지혜,지해(知解)도 구하지 않으며,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망정이 다하고 구함없는 이것을 옳게 여겨 붙들지도 않으며,
다한 그곳에 머물지도 않으며,
천당을 좋아하고 지옥을 두려워하지도 않아서 속박과 해탈에 걸림 없으면 그것으로 몸과 마음,
그 어디에 대해서나 ‘해탈’했다 하는 것이다.
그대가 어느 정도 계율을 닦아 3업이 청정하다 하여 다 끝냈다 말하지 말라.
항하사 만큼의 계?정?혜(戒定慧) 방편과 무루해탈(無漏解脫)은 전혀 털끝 만큼도 맛보지 못했음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눈 귀가 어두어지고 백발에 주름살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당장에 힘써 용맹정진하여 끝끝내 성취해야 한다.
늙음과 괴로움이 몸에 닥치면 슬픔과 애착에 얽매여 눈에는 눈물이 흐르고 마음 속은 두려워 어디도 의지할 곳이 없어 갈 곳을 모를 것이다.
이럴 때 가서는 손발을 정리할래야 할 수 없고 설사 복과지혜,
명리나 물질이 있다 해도 전혀 구제하지 못한다.
마음 지혜가 열리지 않았기 때문에 모든 경계를 반연할 뿐,
반조할 줄은 몰라서 다시는 부처님의 도를 보지 못하고 일생 지었던 모든 선악의 업연(業緣)이 한꺼번에 눈앞에 나타난다.
종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6도(六道)의 5음(五陰)이 동시에 눈앞에 나탄난다.
찬란한 빛을 내며 장엄함 모습으로 펼쳐지는집,
선박, 수레등은 모두 자기 마음에서 탐내고 좋아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나쁜 경계는 모조리 좋아할 만한 경계로 변하는데,
거기서 더 좋아하고 탐낸 쪽을 따른다.
이렇게 업식(業識)에 끌려가서 붙는데로 생(生)을 받게 되는데 자기 의지라고는 전혀 없이 용(龍), 축생, 양민,천민 등 정처없이 가게 된다.”
19.
누군가 물었다
“어찌해야 자기 의지를 얻을 수 있습니까?”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지금이라도 할려면 할 수 있다.
5욕8풍을 마주하더라도 갖거나 버릴 마음이 없고,
간탐?질투?탐애 등 아소(我所)의 마음이 다하고 더러움과 청정함을 함께 잊으면 해와 달이 하늘에 떠 있는 듯 걸림없이 비출 것이다.
마음마다 흙덩이나, 나무토막?돌같이 해야 하고 생각생각 머리에 타는 불을 끄듯 해야 한다.
또한 큰 코끼리가 강물을 끊고 건너듯 의심과 착각을 없애야 하니,
이러한 사람은 천당 지옥 어디에도 끌려들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