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보감(人天寶鑑)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 (大覺 懷璉) 선사

通達無我法者 2008. 2. 20. 11:05
 

11.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 / 대각 회연 (大覺 懷璉) 선사



원통사 (圓通寺) 의 거눌 (居訥:1010~1071, 운문종) 선사는 신주 ( 州)  사람이다. 성품이

단정하여 자기를 다스리는 데에 엄격하고 대중에게는 법도있게 대하였다. 밤이면 반드시 선

정에 들어가는데, 처음에는 자연스럽게 차수하다가 한밤중이 되면서 차츰차츰 손이 가슴에

까지 올라와 있었다. 시자는 늘 이것을 보고 날 새는 시간을 짐작하곤 하였다.

송나라 인종 (仁宗) 이 그의 명성을 듣고 조서를 내려 정인사 (淨因寺) 에 주지하도록 하였

으나 병을 핑계로 사양하고 대신 회연 (懷璉:1009~1090, 운문종)  선사를 추천하였다. 인종

이 회연스님을 보고 대단히 기뻐하여 대각선사 (大覺禪師) 라는 법호를 내리셨다. 영종 (英

宗) 은 손수 조서를 내려 천하 어느 절이든 마음내키는 대로 주지하라 하였으나 회연스님이

입밖에 내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소동파 (蘇東坡) 가 신규각 (宸奎閣) 의 비문

을 짓게 되어 회연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그런 사실이 있었는지를 알아 보았다.

"신규각 비문을 외람되게도 지었으나 늙고 공부를 그만둔 사람의 글이라 돌에 새길 만한 것

인지 모르겠습니다. 참요 (參寥:?~1106, 운문종) 스님의 말을 들으니 스님께서 서울을 떠나

실 때 왕 〔英宗〕 께서 전국 어느 절이든 마음에 드는 곳에 주지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직

접 내리셨는데, 과연 그런 일이 있었습니까? 있다면 전문 (全文) 을 써 보내주십시오. 비문

에 이 한 구절을 넣을까 합니다."

회연스님은 그러한 사실이 없다고 회답하였다. 그러나 스님께서 입적하자 편지함 속에서 그

조서가 나왔다. 소동파가 이 소식을 듣고는, 도를 얻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이런 덕을 간

직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 소동파의 신규각 비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스님께서는 세상에 나와 사람들을 제도했으나 매우 엄격하게 계율을 지켰다. 황제가 용뇌

목 (龍腦木) 으로 만든 발우를 하사하였는데, 스님께서는 사자 앞에서 태워버리고 말하였다.

ꡒ우리 불법에는 먹물옷 입고 질그릇 발우로 밥을 먹게 되어 있으니, 이 발우는 법답지 않

습니다." 사자가 돌아와 보고하니 황제가 오랫동안 찬탄하였다. 스님께서는 집과 옷과 그 밖

의 물건들로 보물방을 차릴 수도 있을 정도였지만 그런 일은 하지 않고 성 밖 서쪽에 백 명

쯤 살 수 있는 작은 절을 짓고 살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