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대대로 불법을 보호하다 / 여몽정 (呂蒙正)
대승상 여몽정 (呂蒙正) 은 낙양 (洛陽) 사람이다. 벼슬하기 전에는 생활이 막연하였는데 한달동안 끊임없이 눈이 내리자 부자 집을 두루 찾아다녔지만 그의 어려움을 보살펴주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때 지은 시는 대략 다음과 같다.
열군데 붉은 대문 찾아가면 아홉 곳은 문마져 굳게 닫고
온몸 가득 눈바람 맞고 돌아오니
집에 들면 처자얼굴 보기 민망하여
밤새껏 차가운 화롯불을 하염없이 뒤적인다.
十謁朱門九不開 滿身風雪又歸來
入門懶妻兒面撥 撥盡寒爐一夜灰
그의 정황을 상상할 만하다. 하루는 길에서 스님 한 분을 만났는데 그의 어려운 형편을 가엾게 생각하여 절로 초대하였고, 돌아갈 때 음식, 의복과 얼마의 돈을 주어 보냈다. 그러나 겨우 한 달이 지나자 또다시 어렵게 되어 다시 스님을 찾아가니 스님이 말하였다.
ꡒ이는 대책이 못되니 식구를 절 행랑으로 옮겨서 살게 하시오. 공양 때가 되면 대중이 먹는대로 죽이건 밥이건 줄터이니 이렇게 하면 긴 대책이 될 것이오.ꡓ
여공은 그의 말을 따랐다. 의식이 곤란하지 않자 드디어 모진 마음으로 책을 읽고서 그 해 과거에 응시하여 향시 (鄕試) 에 급제하니, 스님이 말과 노비를 마련하고 행장을 갖춰 주어 도성의 과거장에 들어가게 되었다. 성시 (省試) 에서도 급제하여 전시관이 호명하는데 그가 장원이었다. 처음 서경통판 (西京通判) 에 임명되어 스님과 만났으나 평상시처럼 변함 없었고, 10년이 지나 드디어 재상이 되었다.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교사 (郊祀) 때가 되어 봉급이 내려지면 이를 모두 내각 (內閣) 에 보내 보관시키니 태종 (太宗) 이 하루는 그에게 물었다.
ꡒ경은 여러 차례 교사 (郊祀) 를 지냈는데도 어째서 봉급을 청하지 않는가?ꡓ
ꡒ신 (臣) 은 사사로운 은혜를 갚지 못한 곳이 있습니다.ꡓ
태종이 다그쳐 묻자 그가 하는 수 없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태종은 ꡒ승려 중에도 이런 사람이 있었던가ꡓ 하면서 감탄하였다. 그리고는 그 스님의 이름을 자세히 기록하여 올리도록 명하고 붉은 가사와 사호 (師號) 를 추가하여 그의 남다른 행적을 표하였다.
여공은 그가 쌓아둔 봉급 수만냥을 계산하여 서경 (西京) 에 편지를 보내고, 그 스님에게 사찰 수리와 대중공양에 필요한 경비를 요청하도록 하였다. 그 절은 원래 철마영 (鐵馬營) 에 있었는데 태조 (太祖) 와 태종 (太宗) 두 황제가 태어난 곳이다. 태조 때에 이미 절을 지었으나 그 이름은 잊혀졌으며, 그 스님이 바로 그곳의 주지다. 태종이 특별히 돈을 하사하여 사원을 중건하고 친필 액자와 도첩을 주었다.
여공은 날마다 새벽에 일어나면 예불하고 다음과 같이 축원하였다.
ꡒ우리 집안에 삼보를 믿지 않는 사람이 태어나지 않도록 하여 주시고, 자손 대대로 조정의 녹을 먹으면서 불법을 외호하도록 하여 주십시오.ꡓ
그의 조카 신국공 (申國公) 여이간 (呂吏簡) 은 해마다 정월 초하루가 되면 집안의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곧 향불을 사르고 광혜 원련 (廣慧元璉:951~1036) 선사에게 서신을 써 보내면서 더욱 그를 존경하였다. 신국공의 아들 여공저 (呂公著) 또한 신국공에 봉해졌는데 정초마다 천의 의회 (天衣義懷)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우승상 여호문 (呂好問) 도 설날이 되면 원조 종본 (圓照宗本)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으며, 우승상의 아들 여용중 (呂用中) 도 설날마다 불조 고 (佛照曠) 선사에게 서신을 보냈다. 그 집안이 대대로 마음으로부터 불교를 믿고 몹시 공경한 데에는 역시 그 유래가 있었던 것이기에 이 사실을 기록하여 후세를 일깨우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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