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담주 지도 각(智度覺) 장로에게 드리는 글
지극한 도는 간단하고 쉬우면서도 깊고 오묘하여 애초에 등급이나 사다리를 세우지 않고 만 길 절벽에 서 있으니, 이것을 본분 소식이라 합니다. 이 때문에 마갈타(摩竭陀)에서 방문을 잠그고 바른 법령을 시행한 일과 비야리(毘耶離)에서 침묵으로 근본 종지를 천양한 것도 오히려 본분의 선지식이 있었다면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터이니, 하물며 현묘함에 빠져 마음과 성품을 설명하고 따지는 경우야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땀 냄새 밴 장삼을 착 붙혀 입고 벗어버리지 않는다면 더더욱 낭패를 볼 뿐입니다. 이것은 소실과 조계의 가풍과는 전혀 다르며, 임제스님과 덕산스님의 기량은 뼈를 발라낸 듯하며, 용과 호랑이가 달리고 천지가 회전하듯 하여서, 경쾌(慶快)한 사람은 끝내 진흙탕으로 이끌지 않는 법입니다.
옛부터 크게 통달한 사람은 지극한 곳을 철저히 믿기만 하면 재빠른 새매와 같아서, 바람타고 날아올라 해를 빛내고 등 뒤로 장애와 막힘도 없었습니다. 칠통 팔달하여 말아 들이고 펴며 서로 잡고 놓아주면서, 성인의 지위에도 오히려 머물려 하지 않았는데 어찌 범부의 부류에 처하려 하였겠습니까. 가슴은 텅 비어 지금과 옛을 모두 감싸고 풀 한 줄기 집어서 장육금신(丈六金身)을 만들고 장육금신을 집어서 한 줄기의 풀을 만들기도 합니다.
그렇기는 하나 애초에 낫고 못하고, 취하고 버림이 없어 오직 활발하고 우뚝하게 기연에 응할 뿐입니다. 어떤 때는 사람을 빼앗아도 경계는 빼앗지 않으며〔奪人不奪境〕, 어떤 때는 경계는 빼앗아도 사람은 빼앗지 않으며〔奪境不奪人〕, 어떤 때는 사람과 경계를 함께 빼앗기도 빼앗지 않기도 하면서〔人境俱奪俱不奪〕 형식과 종지를 초월하여 완전히 말숙한 경지를 이룬 것입니다.
어찌 사람을 가두며 사람을 덮고 옮기며 치닫게 하는 것만을 귀하게 여긴 것이겠습니까. 무엇보다 참된 자리에 당하여 기댐이 없는 무위무사(無爲無事)의 큰 해탈로서 각각의 본분사를 밝게 보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옛사람은 티끌 바람에 풀끝이 움직이면 그에 앞서 알아차리고 털끝이 나오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잘라버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개나 반개도 얻지 못했는데, 어찌 피차 어리석음 속에서 서로 뒹굴고 끌고 당기며 선문답을 두고 이리저리 따지고 가려서 격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매몰시켜서야 되겠습니까. 이는 눈을 뜨고 침상에 오줌 싸는 격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저 눈 밝은 사람은 결코 이런 틀에 박힌 짓은 하지 않습니다.
대장부의 의기(意氣)로 여러 사람을 놀라게 함에는 모름지기 임제스님의 근본 종지를 올바르게 이어, 할 한마디 몽둥이 한 대, 한 기틀, 한 경계에서 분명히 해결해야만 합니다. 듣지도 못하였습니까. "취모검을 쓰고 나서는 재빨리 다시 갈아두라"고 했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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