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圓悟心要)

118.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15:48
 





118. 선인(禪人)에게 주는 글



서방의 대성인이 카필라 성에서 나와 한량없는 오묘한 작용을 지으셨고, 티끌 같은 세계에 셀 수 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훌륭한 정인(正因)을 드러내 여러 중생들을 인도하셨다. 그 맞고 거슬리고 열고 닫고 하는 방편과 나머지 말씀은 경전에 남겼고 보장(寶藏)에 가득 차서 넘친다. 그러나 끝에 가서야 한 소식을 드러내셨으니, 이를 “교 밖에서 따로 행하며 심인(心印)만을 외길로 전함”이라 한다. 금색(金色)의 늙은이(가섭) 이래로 분명하고도 끊임없이 다만 “사람의 마음을 곧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가 되는 것”만을 말했을 뿐, 단계를 세우거나 알음알이를 내지 않았다.



지혜로운 상근기들은 무명(無明)의 소굴 속에서 단박에 번뇌의 뿌리와 기둥을 부수는 가운데 활발하게 벗어나 시절인연에 응하여 초월 증득하여 완전한 해탈을 얻는다. 그러므로 인도 땅의 28대 조사와 중국 땅의 6대 조사가 모두 용과 코끼리가 차고 밟듯, 스승은 훌륭하고 제자는 강력하였다. 기연과 경계 및 언어문구와 어묵동정에 최상승 근기는 격식 밖에서 알아차려 그 자리에서 업장(業障)이 얼음 녹듯 하였다. 곧장 알아차리고 걸머져 그런 뒤로는 스스로 감당하고 몸에 지녀 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세상을 제도하고 번뇌의 흐름을 끊어 단박에 부처님의 경지에 계합하나 거기서 썩은 물 속에 잠기려 하지 않는다. 도리어 현묘함을 꿰뚫고 불조를 초월하여 기연을 제거하고 언어적인 설명(露布)을 끊을 것을 제창하였다. 마치 태아(太阿)의 보검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신령한 위엄이 늠름하였으니 뉘라서 감히 접근하랴. 작가선지식이라면 확실하게 헤아릴 줄 알아서 향상향하나 묘한 이치, 작용이 털끝만큼이라도 있으면 즉시 옛부터 내려오는 씨앗이 아니라고 꾸짖는다. 단박에 충분히 단련하여 푹 익혀서 착실히 실천하여야만 비로소 약간 놓아줄 만하다고 하리라.



비록 그렇다고 해도 행여나 어느 때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사람들에게 누를 끼쳐서 정법의 눈을 멀게 할까 염려스럽다. 아! 눈먼 여우같은 어떤 족속들을 보니 꿈에서도 조사를 보지 못하고, 달마스님은 태식법(胎息法)을 사람들에게 전했다고 하면서 이를 두고 ‘법을 전하여 미혹한 중생들을 구제했다’고들 한다. 그런가 하면 옛날부터 가장 오래 살았던 종사인 안국사(安國師)와 조주스님 같은 분들까지 끌어다가 모두 이 기(氣)룰 닦았다고 한다. 나아가 초조 달마스님이 총령에서 한 쪽 신을 끌고 갔던 것과 보화(普化)스님이 죽은 뒤 관이 텅 비었던 것까지를 과장하면서 이 모두가 태식법의 영험이었다고 말한다. 마침내는 온몸 전체가 빠져나간 것을 두고 육체와 정신이 모두 오묘해진 것이라고들 말한다. 사람들 중에 이 방법을 매우 좋아하는 이들은 죽는 날의 공포를 두려워하여 “진(眞)으로 돌아가는 법”이라고 다투듯이 전한다.



죽는 날 그림자를 바라보며 주인공(主人公)이라 부르면서, 이로써 세월을 점치기도 하고 누각의 북소리를 듣고 입속 침을 증험하고 안광(眼光)을 보기도 하면서, 이것이 생사를 벗어나는 법이라 여긴다. 이는 참으로 성한 사람을 속이고 거짓과 소굴을 날조하여 고상한 사람의 비웃음을 사는 일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무리들은 초조의 태식법과 조주스님의 ‘십이시별가(十二時別歌)’와 방거사의 ‘전하거송(轉河車頌)’을 끌어다가 서로서로 가리켜 전수하고 비밀스레 전하여 가짐으로써 오래 살고 또 온몸이 벗어나기를 도모하기도 하며, 혹 3백년이고 5백년이고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들은 참으로 망상의 애견(愛見)임을 전혀 몰랐다 하리라. 본래는 선인(善因)이었으나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거친 풀숲에 떨어진 것이다. 호걸이나 걸출난 사람 중에 높은 언변으로 조사를 무시하는 자가 이를 더러 믿는다. 이들이 어찌 원래의 걸음걸이를 잃었는 줄을 알랴. 호랑이를 그린다는 것이 이리를 그린 격이다.



언젠가 확실히 통달한 식견있는 이를 만나 밝은 눈에 간과 당할 날이 있으리라. 그들은 평소에 대중 가운데 거처하면서 묵관(?觀)만을 하는 가엾은 이들이니, 어찌 석가모니와 역대 조사들의 체제가 이러한 데에 그쳤으랴. 한번도 스스로 처음과 끝을 회광반조하지 않았음을 확실히 알 수 있다.



온 세상에는 이를 배우는 자들이 벼, 삼, 대나무, 갈대만큼이나 많다. 고상하고 원대한 식견을 갖춘 이는 주춤거리지 않겠지만, 지금 막 뜻을 낸 사람은 깊은 데까지 들어가지 못할까 걱정이다. 아무리 목적을 높이 세우고 실천이 원대하다 해도 증상만(增上慢)을 만나거나 이 사견(邪見)의 숲 속에 빠져들 것이다.



처음 한 번 어긋나면 영원히 윤회에 빠지고 그 흐름이 차츰차츰 넓어지면 막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말을 해주는 것이니, 대해탈과 대총지(大總持)에 원을 세운다면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무생(無生)의 큰 살바야해(薩婆若海)에 함께 들어가서 작은 배를 띄워 여러 중생을 제도하며, 바르고 오묘한 도가 영원토록 퍼지게 한다면 어찌 통쾌하지 않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