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오심요(圓悟心要)

119. 원유봉의(遠猷奉議)에게 드리는 글

通達無我法者 2008. 2. 21. 15:56
 





119. 원유봉의(遠猷奉議)에게 드리는 글



옛부터 단박에 깨쳐 들어가는 외길과 대뜸 초월해 오르는 데에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 가리켜 성품을 보아 부처를 이루는 것 말고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 마음은 그저 고요하고 깊어 성인이니 범부니 하는 계급을 벗어났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지혜로운 상근기가 갖가지로 얽힌 무명의 굴에서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고 단박에 계합함을 귀하게 여길 뿐입니다.



확연히 사무치고 영명(靈名)하여, 유정(有情)이나 무정(無情)이나 유성(有性)이거나 무성(無性)이거나에 상관없이 한 몸이어서 큰 법과 서로 호응하여 작용을 일으킵니다. 고금을 꿰뚫고 초월하며 소리를 누르고 물색을 덮어, 텅 비었으면서도 신령하고 고요하면서도 환하게 비춥니다. 한량없고 장애 없는 불가사의한 큰 해탈이 낱낱이 종횡으로 뚫려 서로 전혀 관계할 바 없이 곧바로 귀결점을 압니다. 그 때문에 옛 불조께서 이를 외길로 전하고 가만히 분부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마치 도장을 허공에 찍는 듯도 하고 도장을 진흙에 찍는 듯도 하고 도장을 물에 찍는 듯도 합니다. 모든 덕이 환하여 시방을 눌러 앉아 홀로 초연히 깨치니 애초부터 아무것에도 의지함이 없습니다. 가령 견해를 일으켜 형상을 짓는다면 벌써 빗나가 어찌해 볼 도리가 없어집니다.



요즈음 시대에도 크게 종성(種性)을 갖춘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허깨비 같은 인연과 경계를 타파하고 용맹하게 분발하여 이쪽으로 옵니다. 그런가 하면 오랫동안 마음을 두어 깊숙이 탐구하는 자가 있긴 합니다만, 그러나 방편의 힘이 부족하여 지견의 알음알이로써 명료함을 삼는 데 그치고 마니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는 앉아 있는 놈 전체가 식심(識心)일 뿐이라는 사실을 전혀 몰랐다 하겠습니다.



설사 이해가 부처님 근처에까지 이르렀고 더 이상 수행할 곳이 없는 자리에 도달했다 해도,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자취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로부터 작가종사는 알음알이의 조작으로 이해하는 것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알음알이를 버려서 가슴 속에 털끝만큼도 남기지 않아 허공같이 호호탕탕하게 되는 것만을 허락했을 뿐입니다. 오래도록 길러서 익어지면 이것이 바로 본지풍광이며 본래면목입니다. 이 고금에 뻗친 경지에 도달하면 생사를 벗어남에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배상국이나 방거사처럼 곧장 믿어서 단박에 힘을 얻고 자유롭게 수용하면 6진의 반연과 허망한 경계가 어찌 다른 곳에서 나오겠습니까. 만일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진실을 살피면 하루 종일 모든 사물을 굴리되 굴린다는 생각[能相]이 없습니다. 무심하게 텅 비어 마음을 내거나 생각을 움직이지 않고 스스로의 천진함을 따라 평소 항상함과 진실함을 간직합니다. 그리하여 관직에서 유유히 일하며 모두 꿰뚫어 살피는데 이것이 누구의 은혜를 받은 것이겠습니까.



이미 ‘그것’을 알아차리고 나면 마치 물을 따라 내려가는 배처럼, 그저 좌우를 돌아보면서 붙잡고 가면 자연히 신속하게 반야와 서로 맞아떨어지게 됩니다. 이것이 선객들이 말하는 “스스로 하는 공부는 어느 곳에서나 세월을 헛되게 버리지 않는다”한 것입니다. 끊임없이 오래도록 불퇴전의 마음을 갖추면 반드시 세간의 유루와 유위를 다 버린 뒤에야 무위 무사의 경지에 들어가는 것은 아니니, 이는 원래 다른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그러므로 만일 버리고 취하는 마음을 품는다면 두 견해를 세우는 것입니다. 언제든 어디서든 그저 이것을 실제로 삼고 힘써 실천하면 모든 번뇌의 휘말림을 끊고 큰 안락을 얻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