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불이공 공불이색 色不異空空不異色
한국불교와 물질관
한국불교는 이상하리만큼 물질을 '배척의 대상'이나 '극복해야 할 욕심의 제공자'라고 생각하는 , 심지어 물질의 풍요는 곧 정신적 타락과 오염이라는 지극히 배타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듯 합니다. 그것은 스님들의 법문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런데 저는 이렇듯 편협한 된 관점이 물질의 본성과 실상實相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다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한 물질적 성과는 이루어지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연계의 절대 법칙인 엔트로피(entropy.무질서)증가 법칙의 한 가지 범주인 것입니다. 설사 그것이 인위적일지라도 물질이 하나라도 더 생기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엔트로피 증가의 법칙에 속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 모두의 소망인 '잘 먹고, 잘 살자'도 물질의 풍요, 즉 무질서의 증가가 이루어지지 않으면 결국 불가능 합니다.
부처님은 깨달음을 설하시며 한국의 스님들처럼 일방적으로 물질을 '책망'한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은 물질을 무조건 멀리해야 하는 대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물질을 제대로 보고 제대로 다스리는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즉, 물질을 '공'空으로 보라 하신 것입니다.
뒤에 공에 대해 따로 설명하겠지만, 물질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물질 본연의 성품' 이상의 욕심을 일으키는 내 '마음'이 문제라는 가르침이 불교의 바른 물질관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만족할 줄 모르는 나의 욕심을 탓해야지 자꾸 물질을 원인 제공자로 매도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아직도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아이들이 셀 수 없이 많은 현실에서 내가 굶지 않는다고, 수행에 장애가 되는 물질을 배척하자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자재를 설명하며 언급한 원효와 여인의 얘기에서도 알 수 있듯 원효의 마음이 장애였지 여인이 수행을 방해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불교를 믿는 국가는 다 가난하다, 불교는 현실적이지 못 하다라는 기독교인들의 말에 화를 낼 것이 아니라, 왜 그런 말이 나오게 되었는지 반성하자는 뜻이 담겨있는 주장이기도 합니다.
깨달음이란 물질을 떠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 집착하지 않고, 물질의 있는 그대로의 본성을 공으로 받아드리는데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은 더 적극적인 표현으로는 '물질을 충분히 활용하여 쓰되, 집착하여 마음에 두거나 욕심을 일으켜 물질의 노예가 되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아주 거칠게 표현하면, 법문을 통해 물질을 책망하려거든 차를 타지도, 신문이나 방송에 출연하지도, 책을 출간하지도, 마이크를 사용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전기누전으로 불이 나면, 부주의를 탓하지 말고 전기를 발명한 에디슨을 경멸해야 합니다. 나아가 신도에게 재물을 보시 받기보다, 오히려 인간이 물질을 거듭 만들어내기 이전으로 돌아가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그것도 부처님이 수행하듯이 숲 속의 큰 나무 밑에서 말입니다.
무소유란 말 자체도 물질의 양적인 소유에 대한 상대적 표현이니 때에 맞게 사용해야 합니다. 우리는 보시와 공덕을 말하면서, 무소유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무소유를 실천하는 사람이 어찌 보시를 할 능력이 있겠습니까? 정신적 무소유라고요? 그렇다면 더더욱 소유, 무소유의 문제로 설명할 부분이 아니라 물질이 공이라는 반야심경의 정신으로 설명하는 것이 더 정확한 것 아닐까요?
제가 이렇듯 한국불교에서 그냥 넘어가고 있는, 별 것 아닌듯한 부분을 현미경을 들이대듯 분석하며 성토하는 데는 또 다른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성법스님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