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10칙 목주의 할이 다한 뒤〔睖州喝後〕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7:38
 

제10칙 목주의 할이 다한 뒤〔睖州喝後〕


(수시)

그렇다 그렇다. 아니다 아니다. 만일 말로써 이러쿵저러쿵한다면 하나하나 모두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위로 치켜 올라가면 곧 석가․미륵․문수․보현과 천만 성인과, 천하의 모든 종사(宗師)들도 모두가 숨을 들이쉰 채 찍 소리도 못 하며, 아래로 내려가면 해파리․하루살이와 굼실거리는 곤충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큰 광명을 쏟으며 모두가 만 길 벼랑에 서 있을 것이다”라고 했다.

만일 위로도 아래로도 향하지 않는다면 또한 어떻게 해야 할까? 조문(條文)이 있으면 조문을 따르고 없으면 구례(舊例)를 따르라. 그럼 본칙의 거량을 살펴보아라.


(본칙)

목주(780?~877?)스님이 어떤 스님에게 “요사이 어디 있다 왔느냐?”고 물으니

-(물고기를 유인해 잡기 위한) 탐간(探竿)과 영초(影草)로다.


스님이 갑자기 소리질렀다.

-작가 선객이로다. 아는 척하지 마라. 그러나 벌써 이렇게 했구나.


“노승이 너에게 일할(一喝)을 당하였구나”하니,

-호랑이 잡는 솜씨로 남을 놀려서야 되겠는가?


스님이 또다시 소리지르자

-(저 용감한 놈) 머리의 뿔을 보라. 비슷하긴 비슷하나 옳지 않으니 용두사미가 될까 염려스럽다.


“서너 차례 소리지른 다음에는 어찌하려는고?”하였다.

-소용돌이치는 파도에서는 일찍이 한 사람도 빠져나오질 못했다.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가?


스님이 아무런 말이 없자,

-예상했던 대로 찾을 수 없다.


목주스님이 문득 치면서 말하였다.

-만일 목주에게 명령을 발휘하여 행하게 했더라면 온 대지의 초목을 모두다 세 동강이 내버렸을 것이다.


“이 사기꾼!”

-한 수 봐줬더니만 제2의제에 떨어졌구나.


(평창)

대체로 최고의 가르침을 세우려면 모름지기 본분종사(本分宗師)의 안목이 있어야 하고, 본분종사로서의 작용이 있어야 한다. 목주스님의 솜씨〔機鋒〕는 번득이는 번갯불과 같다. 즐겨 강사스님들을 감파하였는데, 평소에 하시는 일언반구는 가시덤불과 같아서 어떻게 손을 대볼 수 없었다. 그는 웬 스님이 오는 것을 보자마자 “지금 이 장소가 바로 그대로 드러난 공안〔見成公案〕이다. 그대에게 삼십 방망이를 때리리라”했다. 또 어떤 스님을 보고서는 “상좌(上座)야”하고 부르며, 그 스님이 머리를 돌리면, 목주는 “외곬수야!”라 하였다. 또한 대중 법문에서 “아직 깨달음을 얻지 못했으면 모름지기 깨달음을 얻어야 하며, 깨달음을 얻었으면 노승을 저버리지 말라”하였다. 목주스님은 사람을 가르칠 적에 흔히 이처럼 하였다.

(본칙에서 말한) 이 스님도 잘 다듬어지기는 했으나 용머리에 뱀 꼬리가 된 것을 어찌하랴. 그당시 목주스님이 아니었더라면 그에게 한바탕 현혹 당하였을 것이다. 그가 “요즈음 어느 곳을 떠나왔느냐?”고 묻자 스님은 갑자기 소리질렀다. 말해보라. 그 뜻이 무엇인가? 목주스님도 서둘지 않고 느긋하게 “노승이 그대에게 일갈(一喝)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마치 그의 말을 알고서도 한쪽에 밀어두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를 시험한 듯도 하다.

몸을 비스듬히 하고서 그가 어떻게 하는가를 살폈더니만, 이 스님이 또다시 소리지르니 비슷하기는 바슷하나 옳지 않다. 그 늙은이(목주스님)에게 오히려 콧구멍을 뚫렸다. 마침내 묻기를 “서너 차례 소리지른 뒤에는 어찌하려느냐?”고 하니, 그 스님은 예상했던 대로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목주스님은 문득 그를 치면서 “이 사기꾼!”이라 하였다.

사람을 시험하는 분명한 곳에서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사람을 알아볼 수 있다. 참으로 애석하도다. 그 스님은 아무런 말도 못하고 목주스님에게 “사기꾼”이라는 말을 하도록 만들었다. 여러분이라면 “서너 차례 소리지른 뒤엔 어찌하겠느냐?”는 목주스님의 물음을 받았을 때, 어떻게 대답하여 “사기꾼”이라는 그의 꾸지람을 면하겠는가? 만일 존망과 길흉을 알고 참다운 경지〔實地〕를 밟는 사람이라면 “서너 차례 소리지른 뒤엔 어찌하겠느냐”는 말에 누가 말려들겠는가? 다만 그 스님이 아무런 말이 없었기에 그 늙은이가 그의 자백에 의하여 판결한 것이다. 설두스님의 송을 들어보아라.


(송)

두 번째 질러댄 소리와 세 번째 질러댄 소리여.

-우레 소리는 큰데도 빗방울은 전혀 없다. 자고 이래로 이같은 사람이 드물다.


작가 선객인지라 기연에 맞출 줄 알았다.

-작가가 아니라면 어떻게 (상대를) 시험할 수 있으랴. 다만 이렇지 못할까 염려스럽다.


범 대가리에 올라탔다고 여긴다면

-와-아! 눈먼 장님아, 범 대가리에 어떻게 올라탄단 말이냐? 몇 사람이나 이럴 수 있을까?  그러나 그런 사람도 있다.

둘 다 눈먼 장님이 되리라.

-자신의 말은 자신의 입에서 나온다. 어찌 둘만 되겠는가? 냉큼 꺼져라.


누가 눈먼 장님인가?

-누구더러 분별하게 할까? 다행히도 마지막 한마디가 있구나. 하마터먼 사람을 속일 뻔했  다.

온 세상에 들추어내어 사람들에게 보여주리라.

-보기는 하겠지만 마주치면 눈이 먼다. 드대들이 눈여겨보려 한다면 (그것은) 두 손으로 허공을 움켜쥐는 꼴이다. 이처럼 거량하였으니, 말해보라, 이게 몇 번째 기연인가?


(평창)

설두스님에게는 참으로 학인을 제접한 곳이 있다. 작가 선지식이 아니었다면 제멋대로 소리를 질러댔을 것이다. 그러므로 옛사람(임제스님)은 “어떤 때의 일할(一喝)은 일할로 쓰지 않기도 하고, 어떤 때의 일할은 일할로 쓰기도 하며, 어떤 때의 일할은 땅에 웅크리고 앉은 사자 같기도 하고, 어떤 때의 일할은 금강왕 보검과 같기도 하다”고 하였다.

흥화(興化 : 830~888)스님은 “내가 그대들을 보니 동쪽 행랑에서 소리지르고 서쪽 행랑에서도 소리지르는데, 제멋대로 소리를 질러대지 말라. 설사 소리 쳐서 나를 삼십삼천(三十三天)에 올려놨다가 다시 처박어 가느다란 호흡마저 끊어지도록 하더라도 내가 다시 깨어 일어나 그대에게 말하리라, ‘아직 멀었다’라고 무엇 때문인가? 나는 일찍이 붉은 비단장막 안에서 그대들을 위해 진주를 뿌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저 제멋대로 소리친다면 무엇하겠는가?”하였다.

임제(臨濟)스님은 이르기를 “나는 그대들 모두가 나의 소리지르는 것을 배운다고 들었다. 내 그대들에게 묻노니, 동당(東堂)에서 어느 스님이 나오고, 서당(西堂)에서 어느 스님이 나와 두 사람이 서로 소리를 지른다면 누가 손님〔賓〕이며, 누가 주인〔主〕이겠느냐? 그대들이 빈(賓)․주(主)를 분별하지 못한다면 앞으로는 나를 흉내내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설두스님은 “작가 선객인지라, 기연에 알맞게 맞출 줄 알았네”라고 송하였다. 그 스님이 목주스님에게 당하긴 했으나, 그도 상대의 기연에 맞출 줄 알았다. 말해보라, 무엇이 그스님이 기연에 맞춘 것인가?

녹문(鹿門)의 지선사(智禪師)가 이 스님을 점검하여 이르기를 “법을 아는 자만이 법이 무서운 줄 안다”라고 하였으며, 암두(巖頭)스님은 “말로 따지면 모두가 달라진다”하였으며, 황룡  심(黃龍心)화상은 “궁하면 변하고, 변하면 통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조사가 온 세상 사람들의 혀를 꼼짝 못하게 해버린 것이다.

그대가 기연에 맞출 줄 안다면 거량하기만 하면 바로 핵심을 알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길 “그가 말한 ‘서너 차례 소리지른 뒤에……’라는 말에 말려들어서 뭣하겠는가? 오로지 계속 소리지르면 된다. 무슨 삼십 번이나 이십 번 소리를 지르랴. 소리질러서 미륵불이 하생(下生)할 때까지 계속한다 해도, 이는 범의 머리에 탄 것이다”고 말을 한다. 만일 이렇게 이해했다면 목주스님이 뜻을 모르는 것은 그렇다 치고, 이 스님을 알아차리는 손아귀에 칼(태아의 보검)이 있고 겸하여 기연에 맞출 줄 알아야만 한다.

설두스님은 “이와 같으면 두 사람 모두 눈먼 장님이 된다”하니, 설두스님은 마치 하늘까지 닿는 긴 칼이 늠름하게 위엄을 일천 곳 일만 곳을 일시에 알게 되어, 뒤에 �은 설두스님의 송이란 주각(注脚)을 붙인 것일 뿐임을 알게 될 것이다.

또 “누가 눈먼 장님인가?”라고 하였으니, 말해보라, 이는 손님〔賓〕이 눈이 먼 것이냐? 주인〔主〕이 눈이 먼 것이냐? 아니면 손님과 주인이 모두 눈이 먼 것이냐? “온 세상에 들추어내어 모든 사람에게 보여주리라”하니, 이는 살아 있는 솜씨이다. 설두스님이 일시에 송을 다 해버렸는데 무엇 때문에 갑자기 “들추어내어 천하 사람들에게 보이리라”고 말하였을까?

말해보라, 무엇을 보았는지? 눈을 떠도 집착이요, 감아도 집착이다. 그렇다면 이를 면할 사람이 있을까?

불과원오선사벽암록 권제11)

1)신수대장경본에는 권제1 끝에 “夾山無礙禪師降魔表”가 있으나, 삼성본(三省本)에는 이것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