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6칙 장사의 봄기운〔長沙春意〕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43
 

 

 

제36칙1) 장사의 봄기운〔長沙春意〕


(본칙)

장사(長沙)스님이 하루는 산을 유림한 후 문 앞에 이르자,

-오늘 하루는 온종일 (무명의) 풀 속에 빠졌구나. 앞에서도 풀 속에, 뒤에서도 풀 속에 떨어졌구   나.

수좌(首座)가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십니까?”

- 이 늙은이를 시험해봐야 한다. 화살은 저 멀리 신라로 날아갔다.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풀 속에 떨어져서는 안되지. 적잖게 잘못이 드러났군. 형편없는 놈!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내질렀군. 다녀온 곳이 있으면 풀 속에 떨어진다. 서로가 불구덩이로 끌고 가는구나.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 나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느니라.”

-허물이 적지 않군. 원래 가시덤불 속에 앉아 있었지.


“아주 봄날 같군요.”

-서로 잘도 주고받네. 잘못을 인해 더욱 잘못을 저지르는군. 사람을 추켜올렸다 깎아내렸다 하네.


“아무렴, 가을날 이슬 망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

-흙 위에 진흙을 더하는구나. 앞에 쏜 화살은 오히려 가벼운 편인데 뒤의 화살이 깊게 박혔다.    언제 (생사의 윤회를) 끝마칠 기약이 있겠는가?


설두스님은 착어하였다.

“대답에 감사드립니다.”

-떼거리 모두가 진흙덩이를 회롱하는 놈이다. 세 사람 모두 한 죄상으로 다스려라.


(평창)

장사(長沙) 땅의 녹원사(鹿苑寺) 초현(招賢)스님은 남전(南泉)스님의 법을 이었으며, 조주(趙州)․자호(紫胡) 스님 등과 동시대의 인물이다. 기봉(機鋒)이 민첩하여 상대방이 교(敎)에 대해 물으면 곧 교를 말해주고, 송(頌)을 요구하면 곧 송으로 대답해주었다. 만일 작가로서 만나고자 하면 바로 작가로서 맞아주었다.

앙산스님은 평소부터 기봉에 있어서는 제일인자였다. 하루는 장사스님과 함께 달 구경을 하다가 앙산스님이 달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사람마다 ‘이것’이 있지만 쓰지 못할 뿐이다.”

“옳지! 그것 좀 빌려서 써봤으면 좋겠다.”

“그대가 사용해보시오.”

그러자 장사가 한 발에 걷어차서 넘어뜨렸다. 앙산스님은 일어나면서 말하였다.

“사숙(師叔)께서는 마치 호랑이〔大蟲〕와 같군요.”

그 이후로 사람들은 장사를 잠대충(岑大蟲 : 높은 산의 호랑이)이라 불렀다.

하루는 장사스님이 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는데, 수좌도 그 회하의 문도인터라 대뜸 물었다.

“스님께서는 어딜 다녀오십니까?”

“산을 유람하고 오는 길이다.”

“어디까지 다녀오셨습니까?”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되돌아왔느니라.”

이는 시방의 모든 사람을 꼼짝 못하게 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옛사람들은 들고남에 있어서, ‘이 일’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빈주(賓主)로 서로 교환하거나, 상대방의 문제의 핵심〔當機〕을 대뜸 결판을 내려 용서해주지 않았다.

이미 산을 유람한 뒤인데 무엇 때문에 “어디를 다녀오셨습니까?”고 물었을까? 만일 요즘 참선하는 사람들이었다면 “협산정(夾山亭)까지 다녀온다”고 말했을 것이다.

옛사람을 살펴보면, 실오라기만큼도 이러쿵저러쿵 헤아림이 없고, 안주하여 집착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처음엔 향기로운 꿀을 따라갔다가 그리고서는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수좌는 바로 그의 뜻에 맞추어, 그에게 “아주 봄날 같군요”라고 하자, 장사스님은 “아무렴 가을날 이슬 방울이 연꽃에 맺힌 때보다야 낫지”하고 말하였다. 설두스님이 “대답에 감사드립니다”고 한 것은, 그를 대신하여 끝에 가서 한마디 한 것이다. 양쪽에 있지만 결국은 양쪽에 있지 않다.

예전에 장졸(張拙)이라는 진사(進士)가 「천불명경(千佛名經)」을 보고서 장사스님에게 물었다.

“백․천의 많은 부처님에 대해서 그 이름을 들어왔습니다만은, 도대체 어느 국토에 거처하며, 또 중생을 교화하고 있는지요?”

“최호(崔顥)가 ‘황학루(黃鶴樓)’시를 써낸 이후로, 그대는 황학루에 관한 시를 써본 적이 있었는가?”

“아직 쓰지 못했습니다.”

“한가할 때 시 한 편을 써보는 것이 좋겠다.”

잠대충은 이처럼 일평생 사람을 지도함에 구슬이 구르는 듯, 그 자리에서 이해하도록 해주었다. 송은 다음과 같다.


(송)

대지엔 티끌 한 점 없는데

-문을 활짝 열어놓고 대청에 서 있는 자는 누구인가? 누구도 ‘이것’을 없앨수 없지. 천하가 태평   하다. 


어느 사람인들 보려 하지 않으랴.

-이마에서 큰 광명이 쏟아져나와야 한다. 흙과 모래를 뿌려본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처음엔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아주 잘못했네. 이는 한 번 풀 속에 떨어진 정도가 아니네. 다행히도 앞에서 이미 말을 했기 망   정이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네.

-곳곳이 온통 참되도다. 아뿔사, 돌아왔구나. (발밑에) 진흙이 석 자나 되네.


파리한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움하고

-이리저리 멋대로 한마디 보태는군. 더더욱 허다한 쓸데없는 일만 있네.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을 분다.

-몸소 쓸데없이 힘을 들였기 때문이다. 한 구절을 더하려 해도 안되고 한구절을 줄이려 해도 안   된다.

장사(長沙)의 한없는 뜻이여!

-(원오스님은) 쳤다. 최후 한 구절에서 무엇을 말했을까? 한 구덩이에 묻어버렸다. 귀신의 굴 속   에 떨어졌구나.


쯧쯧!

-형편없는 놈! 도적이 떠난 뒤에 활을 당겼다. 결코 용서해줘서는 안된다.


(평창)

말해보라, 이 공안이 앙산스님이 (제34칙의 본칙에서) 어느 스님과 주고받았던 것과 같은가 다른가를.

“요즈음 어느 곳을 떠나왔느냐?”

“여산에서 왔습니다.”

“오로봉에 가 보았는가?”

“아직 못 가 봤습니다.”

“스님은 아직 산을 유람하지 못했군.”

흑백을 분별해보아라. 이는 같은가 다른가? 여기에 이르러서는 모름지기 알음알이〔機關〕를 다하고 의식(意識)을 망각하여, 산하대지와 풀과 지푸라기와 사람과 축생마저도 조금치도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옛사람이 말한 “아직도 승묘경계(勝妙境界)에 있다”는 데 해당된다.

듣지 못하였느냐, 운문스님의 말을. “설령 산하대지와 실오라기만큼의 잘못이 없다 해도, 오히려 대상에 얽매인 말이다. 모든 색(色)을 보지 않는다 해도 겨우 반절쯤밖에 설명하지 못한 것이다. 반드시 온전히 설명해내는 시절과 향상(向上) 관문이 있는 줄을 알아야만이 비로소 편안히 앉을 수 있게 될 것이다.” 만약 이를 뛰어넘을 수 있다면 그대로 산은 산, 물은 물이다. 각각 제자리에 안주하며, 각각 본체에 해당하여, (경계에 현혹되지 않는) 완전히 눈먼 장님과 같을 것이다.

조주스님이 말하였다.


첫 닭이 울면 축시(丑時)라.

근심스러이 돌아보노니, 그저 허물투성이.

저고리와 장삼(승려다운 몸가짐)은 하나도 없고

가사(袈娑)의 그림자만 조금 남아 있구나.

잠방이에 속곳이 없고, 바지는 발 넣을 곳 없으니

머리 위 흰머리는 너덧 말이라.

본디 수행할 때는 중생을 제도코자 하였는데

그 누가 알았으랴, 도리어 어리석은 놈이 될 줄을.

참으로 이러한 경계에 이르면 어느 사람인들 눈을 뜨지 않으랴. 마음대로 엎어지고 나자빠지는 대로 두어도, 모든 곳이 다 ‘이 경계’이며, 다 ‘이 시절’이다. 시방세계에 창문〔壁落〕도 없고 사방에도 문이 없다. 그러므로 “처음 향기로운 풀을 따라갔다가, 다시 지는 꽃을 따라서 돌아왔다”고 말한 것이다. 설두스님은 매우 솜씨가 좋아서 그 좌측에 한 구절을 붙이고 우측에도 한 구절을 붙여 마치 한 수의 시처럼 이루어놓은 것이다.

“파리한 학은 차가운 나무 위에서 발돋움하고, 미친 원숭이는 옛 누대에서 휘파람 분다.” 설두스님은 이에 이르러 스스로의 잘못을 깨닫고 얼른 말하였다. “장사의 한없는 뜻이여, 쯧쯧!” 이는 마치 깊은 꿈을 꾸다가 깨어난 것과도 같다. 설두스님이 일할(一喝)을 했지만, 아직은 철저히 끊어버리지 못한 것이다. 만일 산승이었다면 이렇게 말하질 않고, “장사의 한없는 뜻이여! 땅을 파 더욱 깊이 묻어버리리라”고 했을 것이다.

1)제36칙에는 〔수시〕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