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록(碧巖錄)

제37칙 반산의 마음을 구함〔盤山求心〕

通達無我法者 2008. 3. 3. 09:44
 

 

 

제37칙 반산의 마음을 구함〔盤山求心〕


(수시)

번개치는 듯한 기봉을 생각으로 헤아리려 한다면 헛수고이며, 허공에 내려치는 천둥소리는 귀를 막아도 되지 않는다. 머리 위로는 (적진을 향한) 붉은 깃발을 펄럭이고 귓전 뒤로는 쌍검을 돌린다. 만일 눈빛이 예리치 못하고 손이 날쌔지 못하면 어떻게 이 경지에 이를 수 있겠는가? 어떤 사람은 고개를 떨구고 오랜동안 생각하며 의근(意根)으로 헤아리지만, 해골 앞에서 무수한 귀신을 본다는 것을 참으로 모른 것이다. 말해보라, 의근에 떨어지지도 않으며 득실에 얽매이지 않고, 문득 이렇게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대해야 할까? 거량해보리라.


(본칙)

반산스님이 말했다.

“삼계(三界)에 법이 없는데

-화살이 활시위를 떠났으니 되돌아올 수는 없다. 달이 밝아 통금 위반자를 비추는구나. 맞혔다.    법을 아는 자만이 두려워할 줄 안다. 말하자마자 때려야 한다.


어느 곳에서 마음을 구할까?“

-사람을 속이지 말았으면 좋겠다. 수고롭게 다시 거량하지 말고 스스로 살펴보라. (원오스님은)    문득 치면서 “이 무엇인가?”라고 했다.


(평창)

북쪽 유주(幽州)의 반산 보적(盤山寶積)스님도 마조(馬祖)스님 회하의 큰스님으로서, 뒤에 제자 보화(普化)스님이 있었다.

스님은 임종 때 대중에게 말하였다.

“나의 초상화를 그릴 사람이 있느냐?”

대중이 모두 초상화를 그려 바치자, 스님은 모조리 꾸짖었는데, 보화스님이 대중 속에서 나오더니 말하였다.

“제가 그릴 수 있습니다.”

“왜 노승에게 바치지 않느냐?”

보화스님은 훌쩍 재주를 넘으며 나가버리니 스님이 말하였다.

“이놈이 이후로 미친 놈처럼 사람을 제접하리라.”

하루는 대중 법문을 하였다.

“삼계(三界)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는가? 사대(四大)가 본디 빈〔空〕것인데 부처는 무엇을 의지해 안주하였느냐?” 선기옥형(璿璣玉衡 : 천문관측기인데 여기서는 마음을 비유)을 움직이지 않고 고요하여 흔적이 없다. 곧바로 드러내줄 뿐 결코 그 밖의 일이 없다.

설두스님은 두 구절을 들어 노래하였는데, 이는 제련하지 않은 금덩이 같고, 가공하지 않은 옥덩이처럼 질박하기만 하다.

듣지 못하였느냐? “병이 치료되면 많은 약들이 필요치 않다”는 말을. 산승은 무엇 때문에 “말하자마자 쳐라”고 말하였을까? 이는 그가 형틀을 짊어진 채로 판결문을 건네주었기 때문이다. 옛사람은 말하기를 “소리 밖의 구절을 들을지언정 의식 가운데에서 구하지 말라”하였다.

말해보라, 그의 뜻이 무엇이었는가를. 이는 급류가 흐르는 듯, 칼을 휘두르는 듯, 번갯불이 치는 듯, 별이 나는 듯하다. 만일 머뭇거리며 생각하면 일천 부처님이 출세하여도 그것을 찾지 못한다. 이처럼 심오한 경지에 깊숙이 들어가 뼛속까지 사무치고 투철히 깨치면, 반산스님도 한바탕 실수를 한 것이다. 말을 이용해서 종지를 알려고 하여 좌우 종횡으로 사량분별한다면, 반산스님이 한 말이 결국 그대를 속박하는 말뚝이 될 뿐이다. 만일 언어문자나 소리나 모양으로 궁리를 했다가는 꿈속에서도 반산스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은사이신 오조(五祖)스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저 쪽’으로 뚫고 지나가야 자유로운 경지가 있다”하였다. 듣지 못하였느냐? 삼조(三祖)스님의 말씀에 “집착하면 법도를 잃게 되어 반드시 삿된 길로 들어가며, 놓아버리면 자연스러워져서 본래 가고 머뭄이 없다”는 것을. 여기에서 “부처도 없고 법도 없다”고 말한다면 또한 귀신의 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옛사람은 이를 “해탈이라는 깊은 구덩이”라고 말했는데, 본디 이는 원인은 좋았는데 나쁜 결과를 초래한 것이다. 그러므로 반산스님은 “하염없고 할 일 없는 사람이여, 오히려 쇠고랑차는 변을 당한다”고 하였다. 궁극적으로는 여기에까지 이르러야 한다. 말이 없는 곳에서 말할 수 있고 행할 수 없는 데에서 행할 수 있다면, 이를 몸을 돌리는 곳이라고 한다.

“삼계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느냐?”고 하였는데, 그대들이 알음알이로 이해한다면 그의 말 속에서 죽게 될 것이다. 설두스님의 견처(見處)는 종횡으로 뚫려 있기에 송을 하였다.


(송)

삼계에 법이 없는데

-아이고 귀 따가워! 또 그 소리냐.


어디에서 마음을 찾을까?

-애써 거듭거듭 들먹거리지 말라. 스스로 살펴보라. (원오스님은) 치면서 말한다. 이는 무엇이냐?


흰 구름은 일산이요,

-머리 위에 머리를 얹혔다. 천만 겹이로다.


흐르는 물소리 비파소리라.

-들었느냐? 서로 장단을 잘도 주고받네. 들을 때마다 애닯구나.


한두 곡조도 아는 이 없나니

-궁(宮)․상(商)의 소리도 아니고 각(角)․치(徵)의 소리도 아니다. 남이 닦어놓은 길을 따라가는    군. 오음육률(五音六律)이 모두 분명하다. 스스로 잘못을 인정하리라! 들었다가는 귀먹는다.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

-내리치는 우레는 귀막을 겨를이 없다. 말이 많네. 어디에 있느냐? (원오스님은) 쳤다.


(평창)

“삼계에 법이 없는데 어디에서 마음을 찾겠느냐?”는 설두스님의 노래는 마치 화엄(華嚴)의 경계와 같다.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이 무(無) 속에서 노래를 하였다”하는데, 눈꺼풀 뜬 놈이라면 이처럼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설두스님은 거기에 두 구절을 더하여 “흰 구름은 일산이요, 흐르는 물소리는 비파여라”하였다.

소내한(蘇內翰 : 소동파)이 조각(照覺)선사를 뵙고 송을 하였다.

시냇물 소리 장광설(長廣舌)이요,

산색인들 어찌 청정법신 아니랴.

밤 사이 팔만사천의 게송을

다른 날 어떻게 사람에게 일러줄까?


설두스님은 흐르는 물소리를 빌어 한바탕 설법을 했다. 그러므로 “한두 곡조도 아는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듣지 못하였느냐? 구봉 도건(九峰道乾)스님의 말을. “목숨〔命〕을 아느냐? 흐르는 물은 목숨이요, 맑고 고요한 것음 몸이며, 일천 파도가 다투어 일어나는 것은 문수의 가풍이요, 하나같이 맑은 허공은 보현의 경계이다.”

“흐르는 물소리 비파여라. 한두 곡조도 아는 이 없다”하였는데, 이러한 곡조는 모름지기 지음(知音)이어야 알 수 있으며, 해당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부질없이 귀만 기울이고 있을 뿐이다. 옛사람은 “귀머거리가 호가(胡家)라는 노래를 부르지만, 좋고 나쁨과 높낮이를 전혀 듣지 못한다”고 하였으며, 운문스님은 “말해주어도 돌아보지 않으니 서로가 어긋났다. 이를 생각으로 헤아린다면 어느 세월에 깨닫겠는가?”라고 했다. 거량은 본체이며, 돌아보는 것은 작용이니, 말하기 이전과 조짐이 나뉘기 전에 볼 수 있다면 핵심이 되는 길목〔要津〕마저도 꽉 막을 수 있다. 만약 조짐이 나뉜 뒤에 본다면 사량분별〔意根〕에 떨어진다.

설두스님은 자비심이 대단하여 다시 그대들에게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고 말해주었다. 이 송에 대해서 일찍이 어느 사람은 “설두스님에게는 한림학사의 재예(才藝)가 있다”고 찬미하였다. “비 개인 밤 못엔 가을 물이 깊다”하니 여기에 착안하여 살펴보도록 하라. 다시 머뭇거리거나 의심한다면 찾을 수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