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들이 머물 곳은
7-3-12 夫無常有二 一者 敗壞無常 二者 念念無常 人只知壞滅無常 而不覺念念無常. 論云 若動而靜 似去而留. 經說 無常速疾 猶似流動. 據理 雖則無常 前後不相往來 故如靜也. 雖則念念謝往 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故如留也. 又 雖說古今各性而住 當處自寂 而宛然念念不住 前後相續也. 則非常非斷 非動非靜 見物性之原也.
무상(無常)에는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사물이 허물어져 가는 패괴무상(敗壞無常)이고, 또 하나는 생각이 찰나찰나에 변해 가는 염념무상(念念無常)인데, 사람들은 다만 패괴무상만을 알고 염념무상은 깨닫지 못한다.
논에서는 무상을 “움직이면서도 고요한 것 같고, 가면서도 머무는 것 같다”고 하였고, 경에서는 “무상의 속도 빠름이 마치 물이 흘러가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치로 본다면 무상이나, 전후로 서로 오고 감이 아니기 때문에 고요한 것과 같다. 비록 생각생각이 흐르더라도 옛이나 지금이나 제각각의 성품으로 상주하여서 당처에 스스로 공적(空寂)하기 때문에 그 자리에 머무는 것과 같다. 또 비록 옛이나 지금이나 제각각의 성품으로 상주하여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공적하더라도 분명히 생각생각에 머물지 않으니 전후로 상속하는 것이다. 이것은 곧 영원도 아니고 단멸도 아니며 움직임도 아니고 고요함도 아닌 데서 사물이 지닌 성품의 근원을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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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德問云 各性而住 似如小乘執諸法各有自性 又 何異納衣梵志言 一切衆生其性各異. 答 爲破去來 明無去來. 所以據體言之 故云各性而住 非決定義. 則以無性 而爲性 不同外道二乘 執有決定自性 從此向彼. 若不執有定性去來 亦不說各性而住. 故論云 言往不必往 閑人之常想 稱住不必住 釋人之所住耳.
옛 스님은 다음과 같은 내용을 물었다.
문 : 제각각의 성품에 머문다는 것은 소승이 모든 법에 제각기 자성이 있다고 집착하는 것과 비슷한데, 또 바라문이 일체중생의 성품이 제각기 다르다고 말한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답 : 가고 옴을 타파하기 위하여 가고 오는 것이 없음을 밝혔다. 근본 바탕에서 말하는 이유로 제각각의 성품에 머문다고 말하였으나 결정적인 뜻이 아니었다. 곧 결정됨이 없는 성품으로 성품을 삼았기 때문에 외도와 이승이 결정된 자기의 성품이 있어서 이쪽에서 저쪽으로 오고 간다고 집착하는 견해와는 같지 않다. 만약 결정된 성품이 있어 오고 간다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또한 제각각의 성품에 머문다는 것도 설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논에서는 “간다고 말하나 반드시 갈 것이 아닌 이것이 할 일을 마친 한가로운 사람의 통상적인 생각이며, 머문다고 하나 반드시 머물 곳이 아닌 이곳이 불자(佛子)들이 머물 곳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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又 劉湛注云 莊子藏山 仲尼臨川者 莊子意 明前山非後山 夫子意 明前水非後水. 半夜有力負之而趨者 卽生住異滅四時 念念遷流不停也. 是以 若心外取法 妄夢所見 情謂去來 則念念輪迴. 心隨境轉 尙不覺無常麤相 焉能悟不遷之密旨乎. 若能見法是心 隨緣了性 無一法從外而入 無一法從內而生 無一法和合而有 無一法自然而成.
또 유담이라는 사람은 장자의 대종사 편에 나오는 이야기로서 “산을 못에 감추고서 어리석게 안전하다고 여긴다”는 것과 공자가 냇가에서 길게 탄식하며, “아! 물이 저와 같이 밤낮으로 흘러가는구나”라고 한 대목에서 “장자의 뜻은 숨기기 전의 산이 숨긴 후의 산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혔고, 공자의 뜻은 앞에 흘러가는 물이 뒤에 흘러가는 물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라고 풀이하였는데, 이것도 무상(無常)을 말하고 있다. 장자의 말에서 “야밤에 힘 좋은 사람이 산을 숨긴 못을 통째로 짊어지고 달아난다”는 것은 곧 생(生)․주(住)․이(異)․멸(滅)의 네 때가 생각생각에 흘러가며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을 비유한 것이다. 그러므로 만약 마음 밖에서 다른 법을 취한다면 허망하게 꿈 속에서 보는 것이며, 알음알이로 오고 감이 있다고 말한다면 생각생각에 윤회하는 것이다. 마음이 경계를 따라서 움직이면 오히려 무상(無常)의 확실한 모습인 오고 감도 깨닫지 못하는 것인데, 어찌 오고 감 속에 오고 감이 없는 비밀한 종지를 깨달을 수 있겠는가.
만약 법이 곧 마음임을 볼 수 있다면 인연을 따라 자성을 요지하여 한 가지 법이라도 밖에서 들어오거나 안에서 생겨날 것이 없으며, 한 가지 법이라도 화합하여 있거나 자연히 성립될 것이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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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是則尙不見一微毫住相 寧觀萬法去來. 斯乃徹底明宗 透峯見性 心心常合道 念念不違宗 去住同時 古今一貫. 故法華經云 我觀久遠 猶若今日 維摩經云 法無去來 常不住故. 若了此無所住之眞心 不變異之妙性 方究竟明不遷矣.
이와 같이 오히려 상에 머무는 것을 조금도 볼 수 없는데, 어찌 온갖 법이 오고 감을 보겠는가. 철저하게 종지를 밝혀 거대한 장벽을 꿰뚫어서 참다운 성품을 보니, 마음과 마음이 항상 도에 계합하고 생각과 생각이 종지에 어긋나지 않아, 가고 머뭄이 동시이며 예나 지금이나 하나로 관통한다.
그러므로 ꡔ법화경ꡕ에서는 “내가 오래 전의 세월을 보는 것이 마치 오늘과 같다”고 하였고, ꡔ유마경ꡕ에서는 “법은 가고 옴이 없으며 항상 머물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만약 이 머물 바 없는 진심과 변하지 않는 오묘한 자성을 요지한다면 바야흐로 구경에 생사의 윤회가 없는 자리를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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