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무심하다
21-7-57 淨名經云 佛說 婬怒癡性 卽是解脫 又云 不斷婬怒癡 亦不與俱. 故云 得之者隱 傍之者現. 若於婬怒癡 情生味著 得其事者 則道隱 若傍善觀之 了其性者 則道現. 雖了而不著 故云 亦不與俱. 若非久行根熟菩薩 不能理事無礙 如先德偈云 久種善根深 逢塵塵不侵 不是塵不侵 自是我無心.
ꡔ정명경ꡕ에서 “부처님은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성품 자체가 해탈이라고 말씀하셨다”고 하였다. 또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끊어내지도 않고 또한 그것과 더불어 같이하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어떤 견해를 가지면 도가 숨으나 놓아 버리면 도가 나타난다고 한다. 만약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에 대하여 알음알이를 내어 그 맛에 집착해서 그 일을 취한다면 도가 숨으나, 이것을 그대로 잘 관찰하여 그 성품을 요달한다면 도가 나타난다. 그 성품을 요달했을지라도 어떤 견해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더불어 같이하지도 않는다”고 한다. 만약 오랜 수행으로 근기가 성숙한 보살이 아니면 이(理)와 사(事)에 걸림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은 옛 스님의 게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오랜 세월 선근이 깊어진다면
번뇌를 만나도 물들지 않네
번뇌가 침범하여 물을 들여도
본래가 스스로 무심하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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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涼疏問 法性身土 爲別不別. 別則不名法性 性無二故 不別則無能依所依. 答 經論異說 統收法身 略有十種. 一依佛地論 唯以淸淨法界而爲法身 亦以法性而爲其土. 性雖一味 隨身土相 而分二別. 智論云 在有情數中 名爲佛性 在非情數中 名爲法性 假說能所而實無差. 唯識論云 雖此身土體無差別 而屬佛法 性相異故.
청량 ꡔ화엄소ꡕ에서 다음과 같이 물었다.
문 : 법성신과 법성토는 다른 것입니까, 아니면 같은 것입니까. 다르다면 곧 법성이라 이름하지 못하리니 법성은 둘이 아니기 때문이며, 같다면 곧 의지하는 법성신과 의지되는 법성토가 나누어짐이 없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답 : 경과 논에서 다르게 말하는 것을 법신의 개념으로 통일하여 말하면 열 가지 종류가 있다. 여기서는 하나만 이야기하겠다.
첫 번째에 이것을 ꡔ불지론ꡕ에 의거하면 오직 청정한 법계로써 법신을 삼고 또한 법성으로써 국토를 삼는다. 법성이 본래 한 맛이라도 몸과 국토의 모습을 따라서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ꡔ지론ꡕ에서는 “유정에 있으면 불성이라 이름하고 무정에 있으면 법성이라 이름하여, 임시로 능(能)과 소(所)로 나누어 설하나 실로 차별이 없다”고 하였다.
ꡔ유식론ꡕ에서는 “법성신과 법성토가 바탕에 차별이 없더라도 불(佛)에 속하고 법(法)에 속함에 따라 성(性)과 상(相)이 달라지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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謂法性屬佛 爲法性身 法性屬法 爲法性土. 性隨相異 故云爾也. 今言如虛空者 唯識論云 此之身土 俱非色攝 雖不可說形量大小 然隨事相 其量無邊 譬如虛空遍一切處故. 如虛空言 通喩身土.
이것은 법성이 불(佛)에 속하면 법성신이 되고 법에 속하면 법성토가 되는 것을 말한다. 법성이 상(相)에 따라 달라지므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지금 법성을 허공 같다고 말하는 것을 ꡔ유식론ꡕ에서는 “이 법성신과 법성토는 모두 함께 색법으로서 거둘 것이 아니다. 비록 형량의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없더라도 나타나는 모습을 따른다면 그 형량이 끝이 없다. 이것을 비유하면 허공이 일체처에 두루한 것과 같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허공 같다고 말하는 것은 법성신과 법성토에 다 통(通)하는 비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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