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중생에게 이익이
29-10-97 維摩經云 法施會者 無前無後 一時供養一切衆生 是名法施之會. 什法師云 若一起慈心 則十方同緣 施中之最 莫先於此 故曰 無前後也. 肇法師云 夫以方會人 不可一息期 以財濟物 不可一時周. 是以 會通無隅者 彌綸而不漏 法澤冥被者 不易時而同覆. 故能卽無疆爲一會 而道無不潤. 虛心懷德 而物自賓 曷爲存濡沫之小慧 捨江海之大益 置一時之法養 而設前後之俗施乎.
ꡔ유마경ꡕ에서는 “법을 베푸는 모임이란 앞과 뒤의 구분 없이 한꺼번에 일체중생에게 공양하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법을 베푸는 모임이라 한다”고 하였다. 구마라습 법사가 “만약 한 번 자비심을 일으킨다면 곧 이 좋은 인연이 시방세계의 인연과 똑같아지니, 보시 가운데 으뜸가는 보시로서 이보다 더 좋은 보시는 없다”고 하였는데, 그러므로 “앞과 뒤의 구분이 없다”고 한 것이며, 승조 법사도 “사방의 사람을 한꺼번에 모을 수 없듯 아무리 많은 재물일지라도 한꺼번에 중생을 다 구제할 수가 없다”고 한 것이다.
그래서 시방세계에 두루 통하여 소홀한 구석이 없다는 법보시는 일체중생에게 가득하여 조금도 빠짐이 없으며, 법의 혜택으로서 은근하게 가피를 주는 것도 한 순간을 바꾸지 않으면서 중생계를 동시에 덮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곧 어떤 경계 없이 일체세계를 하나의 모임으로 만들어, 부처님의 도로 일체 모든 중생을 윤택하게 적시지 않는 것이 없다. 마음을 비워 덕을 품으면 중생이 스스로 귀해지는 것인데, 어찌 오줌에 이는 거품 같은 작은 지혜에 머물러 강과 바다와 같은 커다란 이익을 버릴 것이며, 일시에 중생을 제도하는 뛰어난 법공양을 제쳐 놓고 앞 뒤 차례가 있는 속된 보시를 베풀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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夫財養養身 法養養神 養神之道 存乎冥益. 何則 群生流轉以無窮 爲塵路冥冥 相承莫能自返. 故大士建德 不自爲身 一念之善 皆爲群生. 以爲群生 故行願俱果 行果則已功立 願果則群生益. 已功立則有濟物之能 群生益則有返流之分. 然則 菩薩始建德於內 群生以蒙益於外矣. 何必待哺養啓導然後 爲益乎. 菩提者 弘濟之道也.1) 是以 爲菩提而起慈者 一念一時 所益無際矣. 則是承宗鏡之光 遍法界之照 寧有遺餘乎.
무릇 재물의 공양은 몸을 기르나 법의 공양은 마음을 바르게 기르는 것으로, 마음을 기르는 도가 훨씬 심오한 이익이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육도에 윤회하는 잘못된 삶으로 무한한 세월을 보냄으로써 고통의 세월이 깊고 깊게 이어져 자신을 돌이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서 덕을 세우심이 자기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요, 한 생각의 선한 생각이 모두 중생을 위하는 것이다.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실행과 원력의 과보가 함께 갖추어지나니, 실행의 과보로는 공덕이 세워지고 원력의 과보로는 모든 중생에게 이익이 있는 것이다. 이미 공덕이 세워진즉 중생을 제도하는 능력이 생길 것이며, 중생에게 이익이 있음은 곧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돌이킬 분수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보살이 마음에 덕을 쌓기 시작하면 중생은 바깥에서 이익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중생을 먹여주고 길러주며 가르쳐서 인도한 후에야 이익이 된다고 하겠는가.
그러므로 깨달음이란 널리 중생을 제도하는 도이다. 그래서 깨달음을 위하여 자비심을 일으킴은 한 생각 한 순간일지라도 끝없는 이익이 있는 것이다. 곧 이것은 종경의 빛을 계승하여 법계에 두루 비추는 것이니, 여기에 어찌 법의 이익을 혜택받지 못할 중생이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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