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게송 짓는 일 / 축원 묘도(竺元妙道)
스승 축원(竺元妙道)스님은 노년에 천태(天台) 자택산(紫택山)에 한가히 살면서 후학을 가르치는 데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한번은 이런 말을 하였다.
”송을 지을 때는 반드시 사실 [事] 과 이치 [理] 가 동시에 갖추어져야 한다. 비유하자면 두 다리가 똑같지 않으면 걸어갈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천(大川)화상의 “거미에 대한 송 [蜘蛛頌] ”은 잘 지었기는 하나, 그 가운데 세 글자는 이치를 표현한 데에는 손색 없지만 사물의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의 송은 이렇다.
한가닥 줄을 허공에 걸어놓고 머물 때
백억 가닥 엉킨 줄마다 살기가 번뜩이네
상하 사방으로 그물을 얽어놓고
빠져 나갈 수 없을 때 바야흐로 화두가 된다.
一絲掛得虛空住 百億絲頭殺氣生
上下四圍羅織了 待無庄網話方行
마지막 구절의 세 글자 “화방행(話方行)'은 거미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말이다.
그는 또한 석가출산상에 송을 썼다.
빼어난 자품으로 왕궁을 나오셨다가
까칠한 얼굴로 설봉을 내려오면서
온갖 중생을 모두 제도하겠노라 맹세하니
언제나 다 할려는지 알 수 없구려.
龍姿鳳質出王宮 垢面灰頭下雪峰
誓願欲窮諸有海 不知諸有幾時窮
여기서 설산(雪山)을 설봉(雪峰)이라 바꿔 쓴 것은 운(韻)자에 구애된 것이지만, 이곳(중국)에 설봉이라는 이름이 이미 알려진 이상, 설산을 설봉으로 쓴 것은 잘못된 성싶다. 이렇게 해서 완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어 또다시 이어 말하였다.
”허주(虛舟普度)스님이 금산사 주지로 있을 때 눈이 내리자 상당 법문에서 송을 하였다.
하룻밤 사이 강바람 불어 옥가루 휘날리니
고봉은 희지 않아 정신을 흔드네
공중에서 내려왔다가 공중따라 올라가니
뼈속에 사무치는 추위 몇이나 겪을고.
一夜江風攪玉塵 孤峰不白轉精神
從空放下從空看 徹骨寒來有幾人
학인들이 앞다투어 이 송을 암송하고 있으나 허주스님은 옛사람이 말한 참뜻을 몰랐으며 학인들도 으레껏 잘못 이해해 오고 있다.”
그 이유를 물었더니 스님께서는
”옛 사람의 송에, “눈이 천 산에 덮혔는데 어째서 고봉은 하얗지 않나 [雪覆千山 因甚孤峯不白] '한 말은 한마디 전어(轉語)였는데 허주스님이 고봉은 실제로 하얗지 않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고 하였으며, 다시 말씀하셨다.
”대체로 입원불사(入院佛事:주지에 임명되어 하는 첫 법문)에서 정밀하고 오묘하게 법문하기 어려운 것은 송을 지은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동서(東嶼)스님이 정자사(淨慈寺) 주지가 되어 산문(山門)에서 한 법문은 다음과 같다.
청정한 자비의 문
호수의 가을 물이
들어오든 말든
범은 대충(大蟲:범)을 물고
구렁이는 별비사(鱉鼻蛇)를 삼키도다
이 문을 딴 곳으로 옮겨놓아도 쓸모가 없다.
淸淨慈門 一湖秋水
入得入不得 虎咬大蟲
蛇呑鱉鼻 且移他處用不得
죽천(竹泉)스님이 중축사(中竺寺) 불전(佛殿) 불사를 할 때 지은 송은 다음과 같다.
먼지를 털어내고 부처님을 보지만
부처 또한 먼지임을 그 누가 알랴
귀 뚫린 선객 만나기 힘들고
흔히 만나는 건 각주구검하는 어리석은 자.
撥塵見佛 誰知佛赤是塵
罕逢穿耳客 多遇刻舟人
이는 체제가 잘 된 송으로서 학인들이 본받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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