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간록(林間錄)

43. 주지를 사양하는 태도 / 회당 조심(晦堂祖心)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3. 12. 11:56

  

 

 

회당(晦堂) 노스님은 지난날 가벼운 병환으로 장강(漳江)에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때 전운판관(轉運判官)인 의공(倚公) 하립(夏立)이 문병차 찾아와서 불법의 오묘한 뜻을 이야기하던 중 “만불을 모아 자기로 삼으니 나아가서는 유정과 무정이 모두 하나이다”라는 말을 하게 되었다.  

때마침 향안(香安) 아래에 개 한 마리가 누워 있었는데,

스님은 자〔尺〕를 들어 개를 때리고 또 다시 향안을 두드리며 말하였다.

 

   “개는 마음〔情〕이 있기에 때리자 달아나 버리지만 향안은 마음이 없기에 그대로 제자리에 있는데,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는가?”

   하공이 대답하지 못하자 스님이 말하였다.

   “조그만큼이라도 사유(思惟)가 들어 있으면 쓸모없는 것이다.  

어떻게 만물을 모아 자기로 삼을 수 있겠는가?”

 

   황룡(黃龍) 노스님이 입적하자 승속 간에 모두 회당스님이 도량의 주지를 계승해 주기를 원하였고,

법회는 전에 비하여 조금도 손색 없이 융성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성품이 진솔하여 주지맡기를 꺼려 다섯 차례나 사양하고서야 주지를 그만두고 한가히 지낼 수 있었지만 학인들은 더욱 스님을 따랐다.  

 

사직(師直) 사경온(謝景溫)이 담주(潭州) 태수로 있을 때 대위산(大潙山: 湖南省 長沙府 소재)이 비어 스님을 모시려 하였으나 세 차례나 굳이 사양하고 끝내 부임하지 않았다.  

그러자 또다시 강서(江西)의 기자(器資: 강서의 轉運判官)를 팽여려(彭汝礪)를 통하여 장사(長沙)로    “사공(謝公)과 만나보는 일이야 내 바라지만 대위산을 맡는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마조(馬祖)와 백장(百丈)스님 이전에는 주지라는 직책이 없었으며,

도 닦는 이들은 서로가 한가하고 고요한 곳만을 찾았을 뿐입니다.  

그 이후에 주지의 직책이 있기는 하였으나 임금이나 관리들도 그를 존경하고 예우하여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었는데,

오늘날에는 그렇지 못하고 관청에 이름을 걸어 놓은 꼴이 마치 백성의 호적처럼 되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관청에서는 심지어 마부를 보내어 쫓아다니고 불러들이니, 이것이 어디 할 노릇이겠습니까.”

 

   팽기자가 그대로 전하자 사사직은 이를 계기로 서신을 보내어 한번 뵙기를 바라며 감히 주지해 달라는 것으로 스님의 뜻을 꺽지는 않겠다는 뜻을 전하니 스님은 드디어 장사(長沙) 지방으로 그를 찾아갔다.  

스님은 사방의 벼슬아치들과 뜻이 맞으면 천리 길이라도 찾아가지만 맞지 않으면 십리 길도 찾아가지 않았던 것이다.

 

   황룡사에서 개법(開法)한 지 12년만에 암자에 은거하며 20여년을 지냈다.  

천하 사람들은 스님을 가리켜 ‘도가 있는 곳’이라 불렀으니 말세 큰스님〔宗師〕들의 모범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