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문경훈(緇門警訓)

무주좌계산랑선사소영가대사산거서 婺州左溪山朗禪師召永嘉大師山居書

通達無我法者 2008. 3. 17. 15:24
 

 

 

무주좌계산랑선사소영가대사산거서 婺州左溪山朗禪師召永嘉大師山居書[1]

 

① 召 書

自到靈溪, 泰然心意. 高低峰頂, 振錫常遊, 石室巖龕, 拂乎宴坐, 靑松碧沼, 明月自生, 風掃白雲, 縱目千里. 名花香果, 蜂鳥啣將, 猿嘯長吟, 遠近皆聽, 鋤頭當枕, 細草爲氈. 世上崢嶸, 競爭人我, 心地未達, 方乃如斯, 儻有寸陰, 願垂相訪.

영계靈溪에 도착한 뒤로는 마음이 매우 편안합니다. 높고 낮은 산봉우리에 석장을 흔들며 늘상 노닐고 돌집과 바위굴에 먼지를 털고 들어앉으니 푸른 솔과 파란 못으로 밝은 달이 저절로 생겨나고 바람이 흰 구름을 쓸어 감에 시선을 천 리 밖으로 던져 봅니다. 이름난 꽃과 향기로운 과실은 벌과 새들이 물어 나르고 원숭이의 휘파람 소리가 길게 이어져 멀고 가까이에서 모두 들리니 호미 자루를 베개 삼고 가느다란 풀잎으로 포단을 삼아봅니다. 세상은 시끌벅적 너와 나를 다투는 것은 마음 바탕을 통달하지 못했기에 바야흐로 이와 같으니 만약 조금의 시간이 있으시면 원컨대 한 차례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1】溪山.朗尊者, 東陽.傅大士六世孫, 所居左縈碧澗故, 號曰左溪.

【1】계산 낭존자는 동양 부대사의 6세손으로, 거처하던 곳의 왼쪽이 푸른 계곡으로 둘려져 있던 까닭에 호를 ‘좌계’라 하였다.

② 永嘉答書

自別已來, 經今數載, 遙心眷想, 時復成勞, 忽奉來書, 適然無慮. 不委信後, 道體如何? 法味資神, 故應淸樂也. 粗得延時, 欽詠德音, 非言可述.[1] 承懷節操, 獨處幽棲, 泯跡人間, 潛形山谷, 親朋絶往, 鳥獸時遊, 竟夜綿綿, 終朝寂寂, 視聽都息, 心累闃然. 獨宿孤峰, 端居樹下, 息繁餐道, 誠合如之.[2] 然而正道寂寥, 雖有修而難會, 邪徒喧擾, 乃無習而易親. 若非解契玄宗, 行符眞趣者, 則未可幽居抱拙, 自謂一生歟? 應當博問善知, 伏膺[3]誠懇, 執掌屈膝, 整意端容, 曉夜忘疲, 始終虔仰, 折挫身口, 蠲矜怠慢, 不顧形骸, 專精至道者, 可謂澄神方寸歟.[4] 夫欲採妙探玄, 實非容易, 決擇之次, 如履輕氷, 必須側耳目而奉玄音, 肅情塵而賞幽致, 忘言晏旨, 濯累餐微, 夕惕朝詢, 不濫絲髮. 如是則乃可潛形山谷, 寂累絶群哉![5] 其或心逕未通, 矚物成壅, 而欲避喧求靜者, 盡世未有其方. 况乎鬱鬱長林, 峨峨聳峭, 鳥獸嗚咽, 松竹森梢, 水石崢嶸, 風枝蕭索, 藤蘿縈絆, 雲霧氤氳, 節物衰榮, 晨昏眩晃, 斯之種類, 豈非喧雜耶? 故知! 見惑尙紆, 觸途成滯耳.[6] 是以, 先須識道, 後乃居山. 若未識道而先居山者, 但見其山, 必忘其道; 若未居山而先識道者, 但見其道, 必忘其山. 忘山則道性怡神, 忘道則山形眩目. 是以, 見道忘山者, 人間亦寂也; 見山忘道者, 山中乃喧也.[7] 必能了陰無我, 無我誰住人間? 若知陰入如空, 空聚何殊山谷? 如其三毒未祛, 六塵尙擾, 身心自相矛盾, 何關人山之喧寂耶?[8] 且夫道性冲虛, 萬物本非其累, 眞慈平等, 聲色何非道乎? 特因見倒惑生, 遂成輪轉耳. 若能了境非有, 觸目無非道場, 知了本無, 所以不緣而照圓融法界, 解惑何殊? 以含靈而辨悲, 卽想念而明智, 智生卽法應圓照, 離境何以能觀? 悲起則機合通收, 乖生何以能度? 度盡生而悲大, 照窮境而智圓, 智圓則喧寂同觀, 悲大則怨親普救. 如是則何假長居山谷? 隨處任緣哉![9] 况乎! 法法虛融, 心心寂滅, 本自非有, 誰强言無? 何喧擾之可喧, 何寂靜之可寂? 若知物我冥一, 彼此無非道場, 復何徇喧雜於人間, 散寂寞於山谷? 是以, 釋動求靜者, 憎枷愛杻也; 離怨求親者, 厭檻忻籠也.[10] 若能慕寂於喧, 市廛無非宴坐, 徵違納順, 怨債由來善友矣. 如是則劫奪毁辱, 何曾非我本師, 叫喚喧煩, 無非寂滅.[11] 故知! 妙道無形, 萬像不乖其致, 眞如寂滅, 衆響靡異其源, 迷之則見倒惑生, 悟之則違順無地. 闃寂非有, 緣會而能生, 峨嶷非無, 緣散而能滅. 滅旣非滅, 以何滅滅, 生旣非生, 以何生生. 生滅旣虛, 實相常住矣.[12] 是以, 定水滔滔, 何念塵而不洗, 智燈了了, 何惑霧而不祛. 乖之則六趣循環, 會之則三途逈出. 如是則何不乘慧舟而遊法海, 而欲駕折軸於山谷者哉.[13] 故知! 物類紜紜, 其性自一, 靈源寂寂, 不照而知, 實相天眞, 靈智非造. 人迷謂之失, 人悟謂之得, 得失在於人, 何關動靜者乎? 譬夫, 未解乘舟而欲怨其水曲者哉.[14] 若能妙識玄宗, 虛心冥契, 動靜常矩, 語黙恒規, 寂爾有歸, 恬然無間, 如是則乃可逍遙山谷, 放曠郊廛, 遊逸形儀, 寂泊心腑, 恬澹息於內, 蕭散揚於外, 其身兮若拘, 其心兮若泰, 現形容於寰宇, 潛幽靈於法界. 如是則應機有感, 適然無準矣.[15] 因信略此, 餘更何申? 若非志朋, 安敢輕觸. 宴寂之暇, 時暫思量. 予必誑言無當, 看竟廻充紙燼耳. 不宣. 同友玄覺和南.

작별한 이후 지금까지 몇 해를 지나오며 멀리서 마음으로 돌아보고 생각함에 때로는 오히려 걱정이 되더니 문득 보내 주신 서신을 받음에 적연히 근심이 없어집니다. 서신을 주신 뒤로는 도체道體가 어떠하신지 자세하지 않습니다만, 법의 재미로움이 정신을 북돋울 것이기에 응당 맑디맑은 즐거움에 계시리라 믿습니다. 언뜻 시간을 내어 덕스러운 법음法音을 조심스레 읊조려 보니 이는 말로써 가히 표현할 수 있음이 아닙니다.

절개와 지조를 받들어 가슴에 품고 홀로 그윽한 곳에 머무르며 사람들 가운데 자취를 없앤 채 깊은 산과 골짜기에 몸을 잠기우고 친한 벗과는 오고감을 끊은 채 새나 짐승과 때때로 노닒에, 밤이 다하도록 간단없이 이어지고 아침녘 한나절을 적적히 지내면 보고 듣는 것이 모두 쉬어지고 마음의 번뇌는 고요해 질 것입니다. 외로운 봉우리에 홀로 머물며 나무 아래로 단정히 거처하면 번거로움을 쉬고 도에 맛들일 것이니, 진실로 이와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른 도는 고요하고도 고요하니 비록 닦음이 있더라도 익혀 알기 어렵고, 삿된 무리는 떠들썩하니 이에 익히지 않고도 가까이 하기 쉽습니다. 만약 이해하는 바가 현묘한 종지에 계합하지 않거나 수행하는 바가 참된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 자라면 아직은 한적하게 머무르며 무위자적無爲自適하는 몸으로 있을 수 없을 것이니 한 생의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말할 수 있겠습니까? 응당 선지식에게 널리 물음에 가슴으로 엎드려 정성을 간절히 하고 합장하여 무릎을 꿇은 채 생각과 용모를 단정히 하고 아침저녁으로 피로함을 잊고서 시종일관 경건히 우러러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꺾고 태만함을 힘써 없앰에 몸뚱이를 돌아보지 않은 채 지극한 도에 이르도록 오로지 정진하는 자 만이 혼과 마음을 맑힌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무릇 오묘한 이치를 채득하고 현묘한 종지를 탐구하고자 하는 것은 실로 쉬운 일이 아니니 결택할 때는 마치 엷은 얼음을 밟듯이 하여 반드시 귀와 눈을 기울여 현묘한 법음法音을 받들고 본성의 티끌을 말끔히 하여 그윽한 이치를 맛볼 것이며, 말을 잊은 채 근본 종지에 편안히 깃들어 번뇌를 씻고 미묘한 이치를 맛들임에 아침저녁으로 삼가 생각하고 다시 물어 실 한 올과 터럭 하나라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으면 곧 몸뚱이를 산 속 골짜기에 잠기운 채 세속의 번거로움을 잠재우고 무리들과의 인연을 끊을 수 있을 것입니다.

혹은 마음의 좁은 길이 뚫리지 않아 사물을 대할 때마다 막힘이 생기게 되면서도 시끄러움을 피해 고요한 것을 구하고자 한다면 세상이 다하더라도 그 방법이 있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빽빽이 늘어선 숲과 높이 솟구친 가파른 언덕에 뭇 새와 짐승들이 목메어 울고 소나무와 대나무는 울창하게 솟아 있으며, 물옷 입은 바위들이 험준하게 엉켜 있고 바람 이는 가지는 쓸쓸히 서 있으며 등나무와 여라이끼가 얼기설기 얽혀 있고 구름과 안개의 기운이 어려있으며 절기마다 사물이 피고 짐을 거듭하고 아침녘과 저물녘으로 어둠과 밝음을 반복하니, 이러한 가지가지의 모습들이 어찌 시끄럽고 번잡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미혹된 것을 보아서 오히려 굽어지면 부딪치는 것마다 막힘이 될 뿐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먼저 모름지기 도를 알고 난 후에야 산에 거처해야 할 것입니다. 만약 도를 알지 못한 채 앞서서 산에 거처하는 자는 단지 그 산을 볼 뿐 필시 그 도는 잊게 될 것이요, 만약 아직 산에 거처하지 않더라도 앞서서 도를 아는 자는 단지 그 도 만을 볼뿐이니 필시 그 산은 잊게 될 것입니다. 산을 잊으면 곧 도의 성품이 정신을 기쁘게 할 것이요, 도를 잊으면 곧 산의 형상이 눈을 현혹케 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도를 보고 산을 잊은 자는 사람들 사이에 있더라도 또한 고요할 것이요, 산을 보고 도를 잊은 자는 산중도 시끄러울 것입니다.

반드시 오음五陰에 나 자신이 없음을 깊이 이해해야 할 것이니 나 자신이 없다면 그 누가 사람들 사이에 머무는 것이며, 만약 오음과 육입六入이 허공과 같음을 안다면 허공이 모인 것이니 어찌 깊은 산 골짜기와 다르겠습니까. 만일 삼독三毒을 미쳐 떨쳐버리지 못했다면 육진六塵이 오히려 어지러울 것이니 몸과 마음이 스스로 서로간에 모순 될 것이므로 어찌 사람들이나 산 속의 시끄러움이나 고요함에 상관이 있겠습니까.

또한 무릇 도의 본 성품은 그윽이 비어 있는 것이기에 만물은 본디 그것의 번뇌가 쌓여진 것이 아니며 진실한 자비는 평등하니 소리와 빛깔이 어찌 도가 아니겠습니까. 보는 바가 거꾸러져 의혹이 생겨남에 특별히 기인하여 마침내 윤회의 바퀴가 구르게 될 뿐입니다. 만약 모든 경계가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깊이 이해할 수 있으면 눈에 닿는 것이 도량 아님이 없을 것이며 깊이 이해해야 할 것 또한 본디 없음을 알 것이니, 그러한 까닭에 인연에 끄달리지 않고 원만융통한 법계를 비추어 본다면 올바른 견해와 잘못된 미혹이 어찌 다르겠습니까. 중생이 있음으로써 자비가 분별되고 상념想念에 나아감으로써 지혜가 밝혀지니 지혜가 생기면 곧 법이 응당 원만히 비춰질 것인데 이러한 경계를 여의고 무엇으로써 능히 들여다 볼 것이며, 자비심이 일어나면 곧 모든 근기를 통틀어 거두어 들여야 할 것인데 중생과 괴리되면 어찌 능히 제도할 수 있겠습니까.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면 자비가 커지고 궁극적인 경계까지 비추어 보면 지혜가 원만하여질 것이니, 지혜가 원만해지면 시끄러움과 고요함이 똑 같이 들여다보일 것이고 자비가 커지면 원수나 친한이나 두루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산 속 골짜기에 오래도록 거처함을 빌미 하겠습니까, 머무는 곳에 따라 인연에 맡길 뿐입니다.

하물며 모든 법은 공허롭고도 융통하며 일체 마음은 고요하고도 고요하여 본래 스스로 존재하지 않는데 그 누가 굳이 말하여 ‘없다’라고 하겠습니까. 시끄럽고 떠들썩한 그 어떤 것이 가히 [그것을] 시끄럽게 할 수 있을 것이며, 적막하고 고요한 그 어떤 것이 가히 [그것을] 적막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만물과 나 자신이 그윽하게 하나임을 안다면 저곳이나 이곳이나 도량 아닌 곳이 없을 것인데 다시 어찌 사람들 사이에서 떠들썩하고 혼잡함을 따르고 산 속 골짜기에서 고요하고 쓸쓸함을 흩뿌리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추구하는 것은 목칼을 미워하면서 쇠고랑을 좋아하는 꼴이요, 원수를 멀리 여의고 친한 이를 가까이 하려는 것은 수레감옥을 싫어하면서 죄인덮개를 즐기는 꼴입니다.

만약 시끄러운 가운데에서 고요함을 능히 사모할 수 있다면 저잣거리도 참선의 자리가 아닌 곳이 없을 것이며, 어긋남을 징계하고 순리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원수거나 빚진 이도 본디 착한 벗일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곧 위협하여 빼앗거나 헐뜯으며 욕함이 나의 근본되는 스승이 어찌 아닐 것이며, 규환지옥의 시끄럽고 번잡함도 적멸 아님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알진대, 오묘한 도는 형상이 없으므로 일체 모습에서 본래의 이치가 어그러져 있지 않으며 진여는 적멸하므로 일체 소리에서 본래의 근원과 다르지 않으니, 이에 미혹되면 곧 견해가 전도되어 의혹이 생기게 되고 이를 깨달으면 곧 어기는 것이나 따르는 것이나 자리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고요함은 본디 존재하지 않으나 인연이 모이면 능히 생겨나고, [아상과 분별 같이] 높고도 높은 것은 없지 않으나 반연이 흩어지면 능히 소멸할 것입니다. 소멸은 이미 소멸이 아닌데 무엇으로써 소멸을 소멸시킬 것이며, 생겨남은 이미 생겨남이 아닌데 무엇으로써 생겨남을 생겨나게 하겠습니까. 생겨남과 소멸이 다하여 텅 비게 되면 진실한 모습이 항상 머물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선정의 물줄기가 고요하고도 맑으면 어떠한 망념의 티끌일지언정 어찌 씻겨지지 않을 것이며, 지혜의 등불이 밝게 타오르면 어떠한 미혹의 안개더라도 어찌 떨쳐 없애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이 어긋나면 곧 육취六趣에서 순환할 것이요, 이것을 익혀 깨달으면 곧 삼도三途로부터 멀리 벗어날 것입니다. 이와 같다면 어찌 지혜의 배를 타고서 법의 바다에 노닐지 않고 산 속 골짜기에서 바퀴 축이 부러진 수레를 몰고자 합니까.

그러므로 사물은 종류가 어지러이 많다지만 그 성품은 본래가 하나이며 신령스러운 근원은 고요하고 고요하지만 비추지 않고도 알 수 있으니 진실한 모습은 천진하며 신령한 지혜는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사람이 미혹하면 그것을 일컬어 ‘잃었다’하고 사람이 깨달으면 그것을 일컬어 ‘얻었다’하니, 얻고 잃음이 사람에게 있을지언정 어찌 움직임과 고요함에 연관되겠습니까. 비유컨대, 아직 배타는 법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물줄기가 굽어져 있는 것만을 원망하고자 하는 것과 같다 할 것입니다.

만약 현묘한 종지를 능히 잘 알아 텅 비운 마음으로 그윽이 계합하면 움직임과 고요함이 항상 법다웁고 언어와 침묵이 늘 모범되어 고요한 마음이 돌아갈 바가 있으며 편안한 마음은 간단間斷이 없으리니, 이와 같으면 곧 산 속 골짜기를 자유로이 거닐고 성밖 저자거리를 활달하게 노닒에 겉모습은 즐거이 노닐지라도 속마음은 고요히 머물러 있으며 안으로는 담박하게 쉬고 밖으로는 조용하고도 한가롭게 드날리니 그 몸은 마치 얽매인 듯 하나 그 마음은 마치 태연한 듯하여 모습을 천하에 드러내고 그윽한 영혼을 법계에 침착히 잠길 수 있습니다. 이와 같으면 곧 근기根機에 응하여 감응이 있게 됨에 자유로워서 [따로이] 준칙이 없을 것입니다.

서신에 답하여 이처럼 간략히 적으니 나머지 말은 다시 어찌 펼치겠습니까. 만약 뜻 있는 벗이 아니면 어찌 감히 가벼이 범하여 들었겠습니까. 한적함을 즐기는 여가에 때때로 잠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내 필시 미친 듯이 한 말은 [그대에게] 해당되는 바가 없을 것이니 다 보고 난 뒤 불쏘시개로나 사용하여 주십시오. 이만 줄이겠습니다. 도반 현각 합장.

【1】上問候, 下領旨.

【2】下省己求反.

【3】胸也, 爲首俯伏於胸也.

【4】下, 隱居得失, 先明得.

【5】下卞失.

【6】下約道結得失.

【7】下約行結得失.

【8】下悲智由道.

【9】下喧寂在人先雙覈喧寂.

【10】次雙會喧寂.

【11】下雙結喧寂.

【12】下約定慧責.

【13】下約迷悟責.

【14】下結旨應機.

【15】下敍謙光.

【1】이상은 문안을 나눈 말이고, 아래는 편지글을 이해한 내용을 얘기하였다.

【2】아래는 자기 자신을 살펴보고 반대되는 내용을 구한 것이다.

【3】가슴이니, 머리를 가슴에 부복하는 것이다.

【4】아래는 은둔하여 거처하는 득실을 말함에 먼저 그 이득을 밝혔다.

【5】아래는 손실을 밝혔다.

【6】아래는 道를 지니고 있음과 있지 못함에 [산에 거처하는] 득실이 달려있음을 말하고 있다.

【7】아래는 行을 지니고 있음과 있지 못함에 [산에 거처하는] 득실이 달려있음을 말하고 있다.

【8】아래는 자비와 지혜가 道에 말미암았음을 밝혔다.

【9】아래는 시끄럽고 고요함이 사람에게 있으니 먼저 시끄럽고 고요함에 대한 사실을 함께 조사하여 밝힌 것이다.

【10】그 다음으로 시끄럽고 고요함을 함께 會通시킨 것이다.

【11】아래는 시끄럽고 고요함을 함께 結付시킨 것이다.

【12】아래는 선정과 지혜에 기준하여 책망하였다.

【13】아래는 미혹과 깨달음에 기준하여 책망하였다.

【14】아래는 종지에 결부되어 근기에 반응함을 말한다.

【15】아래는 겸손한 빛을 서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