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이비설신의 無眼耳鼻舌身意
집착할 것 없는 귀의 작용
한 선생님이 늦은 시간에 교문을 나서고 있는데 마침 퇴근하던 교장 선생님이 여 선생님을 보고 차를 세웠습니다. 같은 방향임을 확인한 교장 선생님은 여 선생님에게 타라고 했고, 여 선생님은 정중히 거절했지만 거듭된 권유에 차에 타게 되었습니다. 몇 분이 지나고 나서 교장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마징가?” 여 선생님은 교장 선생님이 너무 어려워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조금 후 다시 교장 선생님이 물었습니다. “마징가?” 여 선생님은 이번에도 말을 하지 않으면 실례가 될 것 같아 나지막한 소리로 말했습니다. “제트(Z)” 이에 잠시 생각하던 교장 선생님이 혼자 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막낸가?”
귀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코드'가 안 맞은 결과 같긴 합니다. 이 귀를 잘 통제하는 것이 인생을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멀쩡한 귀를 갖고도 말귀를 못 알아듣는 사람이 너무나 많습니다. 갈수록 충고나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적어지고, 설령 뼈아픈 충고를 해 주어도 그것을 고맙게 받아드리는 사람도 적어지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게도 종교도 예외는 아닌 것 같습니다. 저는 절과 교회가 마음의 '정비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역할을 하려면 신도들의 딱한 사정을 들어주고 용기를 주는 일도 중요하지만, 엄하게 신도들을 교육시키고 자신의 처지를 잘 알도록 하여 귀가 열리게 만들어주어야 합니다.
제가 하는 법회에는 '축원'이란게 없습니다. '어디사는 아무개 잘되게 해주십시요'라고 부처님 전에 축원을 안 한다는 말입니다. 말이 축원이지 중생들 귀 즐겁게 해주는 것 아니겠습니까? 더구나 신도가 몇 십 명만 되어도 줄줄이 주소부터 손자까지 읽어대는데 걸리는 몇 십분 동안 염불이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것이 더 불교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디 사는 아무개라고 꼭 밝혀야 '말 귀'를 알아듣는 부처라면, 그깟 부처를 무슨 대수라고 믿을 가치가 있다는 말입니까? 그 대신 저는 큰 법회 때는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모든 불자와 가족 등....'이런 식으로 우리말로 다 알아듣게 축원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저는 근 30년 가까이 중 노릇을 해왔지만, 제가 법문하는 법회에 30명을 넘는 신도가 참석한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아쉬워하거나 불평하는 마음을 낸 적은 한 번도 없습니다. 애초에 저는 중 노릇하면서 또 인터넷 홈페이지 운영하면서 나로 인해 1년에 한 명만이라도 제대로 '말귀'를 알아듣는 불자가 나로 인해 생긴다면 그것으로 중 된 밥값은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1년간에 말 귀 알아듣는 불자를 한 명 건졌는데, 기특하여 불이화不二華란 법명을 주었습니다.
※ 성법스님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