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덕스님

시공을 초월한 침묵의 세계인 열반

通達無我法者 2008. 11. 25. 19:52

 

 

시공을 초월한 침묵의 세계인 열반

금강정사 3월 설법내용(관음정사 망우법상)

거룩하신 삼보께 귀의하옵니다.
이제 봄을 시샘하는 꽃샘 추위도 물러가고 완연한 봄의 한 가운데에 이른 듯합니다. 즐거운 봄나들이를 포기하시고 반야의 광명을 발하시려는 금강정사 불자님께 진심으로 감사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합니다. 그런데 거룩한 마음을 내어 주신 불자형제 여러분께 오늘은 어떤 금구성언(金口聖言)을 전해 볼까요. 주시하시는 바와 같이 이 달은 부처님의 생애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두 가지가 있지요. 그 하나는 부처님의 출가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부처님의 열반에 대한 내용입니다.


1. 열반의 의미


일반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이 죽은 분에 대해 애도의 뜻을 표할 때 보통 근조(謹弔)라 하지요. 조화를 보낼 때나 조의금을 전달할 때 겉봉투에 흔히 쓰는 말입니다. 그래서 근조(謹弔)는 삼가 조상(弔喪)한다는 뜻으로, 남의 죽음에 대하여 애도의 뜻을 표한 의미입니다. 그런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본래 의미란 불이 타고남은 재마져 완전히 불어서 꺼져버린 상태인 원적(圓寂), 적멸(寂滅), 귀진(歸眞)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번뇌가 완전히 사라진 상태를 비유적으로 나타낸 말입니다.

물론 불교에서도 죽음과 관련된 용어가 많이 있습니다. 열반(涅槃)을 비롯해 깊은 고요에 들었다는 의미와 아울러 입적(入寂, 고요한 본래 자리에 들어감)이라고도 하며, 원적(圓寂, 원만하게 고요함), 적멸(寂滅, 번뇌를 소멸하여 고요해짐), 귀진(歸眞, 진리에로 돌아감)이라고도 합니다. 이 가운데 '열반(涅槃)'은 산스크리트어인 니르바나(nirvana)를 음사한 말로, 불이 꺼지고 재마저 완전히 사라진 고요한 상태라는 뜻입니다. 현재는 스님들이 죽음에 당도한 때를 이르는 말로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몸은 살아 있으면서 번뇌가 완전히 사라져 깨달음에 이른 것이나 몸마저 완전히 소멸하여 완전한 진리의 몸으로 된 상태에 이르는 경우를 모두 열반이라고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육신이 멸하는 상태를 보통 열반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니원(泥洹), 열반나(涅槃那) 등으로 음사하기도 하며 멸도(滅度, 고요한 곳에 다다름), 불수후유(不受後有, 후의 존재를 받지 않음), 무위(無爲, 행하되 집착이 없음), 부작(不作, 행하되 행함이 없음), 무생(無生, 태어나되 남이 없음) 등으로도 의역합니다. 그런데 본래의 뜻은 '불어서 끄는 것', '불어서 꺼진 상태'를 뜻합니다. 마치 타고 있는 불을 바람이 불어와 꺼버리듯이, 타오르는 번뇌의 불꽃을 지혜의 물로 꺼서 일체의 번뇌와 고뇌가 소멸된 상태를 가리킵니다. 그때 비로소 적정(寂靜)한 최상의 안락(安樂)이 실현되며, 영원한 평안과 완전한 평화를 성취한 것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모든 번뇌를 없애고 고요해진 평정의 경지를 얻었을 때, 비로소 해탈하여 열반의 경지를 얻었다고 하지요. 그러므로 열반의 경지는 불교 수행의 최고최상의 목표이며 궁극적인 도달점이며 무아(無我)의 실현이고 아누다라삼먁삼보디의 완성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어떤 스님이 깊은 고요에 들었다는 '입적(入寂)'은 이생의 고통을 벗어나서 열반의 증과(證果)를 얻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즉, 적멸(寂滅)의 경지에 들어섰다는 뜻으로 고통과 번뇌의 세계를 떠나 고요한 적정의 세계로 들어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원적(圓寂)은 모든 무지와 사욕을 제거한 깨달음의 상태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시간 속을 여행하지요. 하지만 부처님은 본래 그대로의 영원한 존재로서 시공을 초월하신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생들은 시간의 제약과 조그만 공간을 점유하여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이러한 한계상황에 존재하는 우리가 부처님과 같은 존재가 되려면 반야의 광명을 통해서 무명(無明)의 번뇌를 벗어나 불성(佛性)을 개현(開顯)하여 시공으로부터 해탈하여 그 해탈한 상태가 지속되는 열반에 안주(安住)해야 한다고 합니다.


2. 열반의 실천적 의미


이렇듯 열반이란 아주 평안한 상태의 지속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열반은 번뇌의 소멸을 전제로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에서 완전한 존재로의 회귀, 또는 본원의 회귀라고 하지요.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것은 바로 시공을 초월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리인 법신진여(法身眞如)에 귀환하신 침묵을 말합니다. 그리하여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영원하고(常), 즐거우며(樂), 참 나인(我) 상태의 자성이 본래청정(淨)한 4덕(德)을 구조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법신(法身)으로 상주하시고 반야(般若)의 작용을 일으켜 유여(有餘)열반과 무여(無餘)열반, 무주처(無住處)열반, 자성청정(自性淸淨)열반을 시현(示現)하시어 해탈(解脫)하시고 일체중생도 해탈케 하십니다. 이는 본래로 누구나 불성(佛性)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부처님의 4덕과 4열반을 구족하기 위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반니원경}에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유훈에, "너희들은 저마다 자기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기 자신을 의지하여라. 진리를 등불로 삼고, 진리에 의지하여라. 이 밖에 다른 것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 내가 간 후에 내가 말한 가르침이 곧 너희들의 스승이 될 것이다. 모든 것은 덧없으니,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자등명법등명(自燈明法燈明)'의 유훈입니다. 즉, '자등명자귀의(自燈明 自歸依), 법등명 법귀의(法燈明法歸依), 제행무상 불방일정진(諸行無常 不放逸精進)'하라는 것입니다.

또 대승열반경에서는 제석천왕이 나찰로 변하여 설한 "제행무상(諸行無常) 시생멸법(是生滅法) 생멸멸이(生滅滅已) 적멸위락(寂滅爲樂)"이란 구절의 법문이 중요하지요. 이것이 열반경의 위법망구(爲法忘軀)의 핵심법문입니다. 그리고 열반의 실천적인 의미는 {승사유범천소문경(勝思惟梵天所問經)}에서, "보시(布施)가 곧 열반이니 온갖 사물의 진실한 모습을 얻음 때문이며, 지계(持戒)가 곧 열반이니 만들어진 것이 아니오 생긴 것이 아님 때문이며, 인욕(忍辱)이 곧 열반이니 하나하나 생각이 소멸되는 까닭이요, 정진(精進)이 곧 열반이니 취사(取捨)가 없는 까닭이며, 선정(禪定)이 곧 열반이니 탐닉(眈溺)하지 않는 까닭이며, 반야(般若)가 곧 열반이니 유위상(有爲相)을 찾을 수 없는 까닭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벽암록}의 제9칙은 {조주록}에 수록된 조주화상의 동서남북 네 개의 문(四門)에 대한 선문답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떤 스님이 조주 화상에게 질문하였습니다.
"어떤 것이 조주(趙州)입니까?"

조주 화상은 말씀하십니다.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지."

조주스님의 안목을 시험하는 질문을 받고 '문이 없는 문'을 활짝 열고 자비로 응대하신 것입니다. 위와 같이 조주스님은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대답하였지요. 스님을 곤경에 몰아넣고 안목을 시험하려던 그 스님은 조주스님의 대답에 오히려 본인이 곤경에 처하게 된 상황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조주스님의 대답은 단순히 조주성의 동서남북에 있는 문에 대한 대답인가. 아니면 조주스님 자신의 입장을 대답한 것인가. 전혀 알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조주성에도 동서남북에 많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이 있기 때문이며, 또한 조주 화상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발심(發心), 수행(修行), 보리(菩提), 열반(涅槃)의 네 개의 문(四門)인데, 밀교의 태장만다라에서는 이것을 동서남북의 네 개의 문(四門)에 배치하고, 발심(發心)은 동문, 수행(修行)은 남문, 보리(菩提)는 서문, 열반(涅槃)은 북문으로 하며, 불법 수행은 이 네 개의 문(四門)을 통과하는 순서로 삼고 있습니다.

조주스님처럼 위가 없는 불도를 이루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한 원력을 세우는 발심은 출가수행의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으며, 원력을 성취하기 위한 끊임없는 수행과 정진을 통해서 깨달음의 보리(菩提)를 성취하여 불법의 지혜를 체득하는 것입니다. 즉, 여기서는 발심수행하여 깨달음을 체득하여 [열반적정의 경지]에서 살고 있는 조주화상의 입장을 밝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발심과 수행, 보리와 열반의 경지에서 중생을 구제하고 있는 조주스님은 원오스님의 수시(垂示)에서 말씀하신 것처럼, 밝은 거울과 같은 지혜를 구족(具足)하고, 마음대로 죽이고 살리는 살활자재(殺活自在)의 지혜의 칼(寶劍)을 손에 쥐고 어려운 질문을 한 스님에게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라고 한 것은 정말 의미심장한 대답입니다.

그런데 불교의 8만4천의 법문(法門)에는 8만4천의 번뇌가 출입하지요. 하지만 {무문관}에는 "불법을 체득하는 위대한 도(道)에는 고정된 문이 없다(大道無門)"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고정된 문이 없는 문을 [진리의 문]이라고 하는데, 이는 일체의 모든 것이 깨달음의 문이기 때문이지요. 문이 없는 문이라면 문을 열거나 닫거나 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문은 언제나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깨달아 열반의 경지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당대 관계(灌溪)화상도 "시방에 울타리가 없고, 사면에 문이 없다"는 것은 온 천지가 그대로 완전히 열려 있는 텅 빈 허공의 세계인 깨달은 열반의 경지라는 것이지요.

이와 같이 시공을 초월한 본원의 회귀가 열반이고 그것은 바로 근심과 걱정이 없는 지극히 행복한 자리입니다. 이것이 바로 완전한 진리에 안주한 열반의 침묵이며 진리의 몸이 되신 열반의 세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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