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힘 있는 말은 진실하고 간결해/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04

 

 

힘 있는 말은 진실하고 간결해

조주어록 보기 ③




‘무’자 화두에 8만4천 법문 녹아



힘이 있는 말은 진실하고 간결하다. 설사 진실하다고 해도 간결하지 않으면 힘이 반감한다. 왜 그럴까? 이 장에서는 간결한 말이 곧 강력한 힘이라는 입장에서 이야기를 할까 한다.

시골에 무서운 영감님이 한분 계셨다. 이 영감님은 통 말이 없어서 벙어리가 아닌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마지못해 말을 할 때가 있다. 이때 짧고 확신에 차 있는 말만을 하고 곧 입을 다물어 버린다.

“돌아다니는 시간에 농사나 지어!” “저는 모릅니다.” “네에.”

산승이 기억하는 말은 세마디 정도이나 그 분에 대한 존경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남에게 감동을 주는 말은 이렇게 간결한데 있구나 하고 느끼게 한 분이다. 안동 어느 집에서 철야하면서 뵌 지가 벌써 스무 해가 넘었다.

한자어는 선종(禪宗)의 발달사에서 둘도 없는 효자 역할을 하였다. 언어학자들의 연구에 따르지 않더라도 이 말은 명백하다. 만일 한자어가 아니었다면 선종의 법문은 그렇게 돋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조주스님이 하신 무(無)라는 말씀 한마디가 8만 4000 법문을 다 녹여버렸다. “무(無)!”

한자어는 선종에서 뜻글자로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화두에서 보면, 소리글인 인도말이나 한국말, 일본말은 한자가 주는 간결함에 미치지 못하여, 한자어를 버린다면 문제가 심각하다는 지적을 아니 할 수가 없다. 선종에서는 거의 바탕 밑뿌리와도 같은 것이다.

지난 날에 고암(古巖) 노사를 모시고 법문을 들은 적이 있다. 노사는 말씀하셨다. “선어록은 한자로 하고 한국에서 해라!”

LA에서 지낼 때의 일이다. 점심 때 대중공양이 있는 다운타운으로 가는 길이었다. “불교학문은 미국에서 하지만 참선은 한국에서 하도록 해라!” 단 두어마디 말씀이나 오래 기억에 새롭다.

명령어의 예를 들어보자. 짧고 간결한 말이라야 영(令)이 선다. 반대로 길고 번다한 말은 영(令)은 커녕 해야 좋을지 안 해야 좋을지 몰라서 애매모호하게 받아들여진다.

“가요!” “와요!”

설명이 필요치 않다.

조주스님의 법문에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란 한자어 화두가 있다. 한 스님이 조주스님에게 묻는다.

“스님, 무슨 까닭에 달마 조사께서는 서쪽에서 오셨습니까?”

말하자면 달마스님이 인도에서 중국으로 오신 연유가 무엇인지 묻는다. 조주스님은 바로 이르셨다.

“정전백수자(庭前栢樹子, 뜰 앞의 잣나무)!” 그러나 이렇게 말한다고 하자. “저어기, 법당 앞에 가보면 알지? 법당 뜰 앞에 높이 자란 잣나무가 바로 그것이야!”

늘어진 말은 그만큼 설명구에 떨어져서 단도직입(單刀直入)인 화두와는 거리가 있다. 노숙한 선사는 짧은 법문을 좋아하는데 지난날의 경봉스님이나 성철스님의 격외(格外) 법문이 그것이다.

이와는 달리 소위 보살 법문이라는 게 있다. 인과법문이라고도 하여 시간을 떼운다면 선(禪)법문, 선사(禪師)법문이기는 어렵다. 그리하여 어르신들은 상단법문을 짧게 끊어 마치고 그 뒤를 이렇게 잇는다.

“이제 법문을 마치고 여기서부터는 여담입니다. 들어도 좋고 듣지 않아도 좋습니다.” 혹은, “보충설명으로 좀 부언해서 말씀드립니다. 그냥 지나는 이야기로 들어주시오.”

상단 법문의 옛 법도대로라면 청법대중은 모두 일어선 자세에서 짧게 듣고 마쳤다고 법정스님은 말씀하신다. 오래 앉아 졸면서 별생각 다 하는 망상 속에서 법문을 들을 수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상 뜻글과 소리글의 차이를 살펴본 것이나 문제는 발심(發心) 여하가 더 중요하다는 데에 있다. 부처님이나 달마스님의 경우는 어떠하셨는가. 상근기(上根機)는 이렇게 밖의 조건, 글의 문제에 속하지 않으셨다.

춘래초자청(春來草自靑)! 봄이 옴에 풀이 절로 푸르러진 이치이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