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禪)이야기·지묵스님

알면 안다고, 모르면 모든다고 말하라/지묵스님

通達無我法者 2008. 12. 11. 21:06

 

 

알면 안다고, 모르면 모든다고 말하라

조주 어록 보기 ④




“무엇이 道입니까…평소마음인 평상심”



조주스님이 스승 남전스님께 여쭈었다. “무엇이 도(道)입니까?”

남전스님이 일렀다. “평상심(平常心, 평소 마음)!”

조주스님이 여쭈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평상심이 될 수 있습니까?”

남전스님이 일렀다. “평상심이 되려고 의도하면 곧 어그러지느니라.”

조주스님이 여쭈었다. “되려고 의도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도를 알겠습니까?”

남전스님이 일렀다. “도는 알고 모르는 데에 속하지 않아! 안다고 하면 망상(妄想)이고, 모른다면 멍텅구리야! 만약 한 점 의심 없게 도를 진정 통한다면 저 텅빈 허공처럼 호호탕탕하단 말이야! 무슨 알고 모른 것을 논하겠어?”

조주스님은 이 말씀 끝에 불생불멸 도를 통한 마음이 홀연 밝은 달과 같이 빛났다.

강설 재주가 있다는 사람은 잘하려는 것이 병이다. 산골 할아버지의 한 예가 있다. 평소에 표정이 자연스러워 사진작가가 사진기를 들이대자 곧 긴장하고 말았다. 사진기 렌즈를 의식하여 자연스러움이 깨진 것이다.

있는 그대로 자연스러운 것이 좋아 사진작가는 호감이 갔으나 할아버지는 또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중생은 잘하려는 것이 병이다. 잘 보이려는 것이 고속도로의 역주행과 같이 엉뚱하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어떤 장식도 없어서 관세음보살이 화관을 쓰고 목걸이, 팔지를 한 것과는 다르다. 완벽한 자연스러움, 가장 완전한 인격자, 평상심이라는 데에 뜻이 있다.

있는 그대로 꾸밈이 없이 살라는 게 평상심(平常心) 법문이다. 헌데 우리는 평상심을 찾아나서는 데서 평상심을 깬다. 사진작가의 기대가 크게 깨어지는 것도 할아버지가 잘 찍어보려고 의도하고 멋있게 표정관리를 생각한 것이기 때문이다.

슬프면 흑흑흑 하고 울라. 기쁘면 하하하 하고 웃으라.

평상심에서는 울 때 우는 것이 자연스럽고 웃을 때 웃는 것이 자연스럽다.

한 덕이 높으신 스님이 쓴 세 글자 빠진 반야심경을 본 적이 있다. 일본 박물관 특별전에서였다. 수천년 동안 반야심경 사경자가 수도 없이 많지만 모두 완벽주의자였다. 틀린 글자가 나오는 반야심경은 모두 버렸다. 헌데 이 스님의 경우는 다르다. 보는 사람들이 이렇게 생각할지 모른다.

“빠진 글씨가 많네, 반야심경도 모르신가?”

그러나 저러나 한번 쓴 반야심경을 다른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평상심이면 훌륭한 것이다.

산승은 자랄 때에 울지 않은 아이였다고 한다. 머리 정수리 부근에 큰 흉터가 어렸을 때 생겼다. 높은 데서 떨어져서 피가 웃옷을 다 적실 정도로 큰 상처였다. 헌데, 남자가 울면 안 된다는 웃어른의 가르침을 따르느라고 꾹 참으려고 이를 악물었던 것이다. “남자는 울면 안 된다!” 울보를 만들지 않으려는 건 좋으나 공연히 헌법을 하나 더 만들어서 사람을 얽매이게 만든다.

우리 주위에는 이런 헌법이 수도 없이 많다. 보림사 봉덕리에 온 지 이제 반백일이 지났는데 이 동네에도 헌법이 사는 사람 수만큼 많다. 사람들은 제 헌법을 어기면 용납하지 못한다. 별 대단한 헌법이라고 죽을 때까지 금과옥조로 모신다.

화두 이야기이다.

기존의 개개인 헌법을 깨뜨리는 힘이 있다. 헌법이 산산조각 나서 새하얀 백지의 처음처럼 된 게 평상심이다. 허공에 밝은 달이 걸림 없이 흘러가는 광경이다.

알면 안다고 말하라.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라. 세상에는 모르면서 모른다고 말하기를 꺼려해서 애매모호한 태도를 취한다. 특히 깨달음의 문제에서 참선하는 사람의 경우이다. 화두 공부가 순일할수록 솔직담백하다. 평상심이다. 꾸밈이 없다.

부처님과 달마 스님이 공연히 참선이라고 하는 말씀을 꺼내서 평상심을 깬 경우라면 부처님과 달마스님의 허물이 수미산만큼 크다 하리라. 평상심을 의식하면 곧 비상심(非常心)이다.

지묵스님 / 장흥 보림사 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