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계 내지 무의식계 無眼界 乃至無意識界
☆ 반야심경과 용수의 중론
용수가 설파한 중론의 핵심을 법法으로서 '자성自性의 존재'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용수는 자성을 연기緣起 혹은 공空의 상대 개념이라 말하는데, 이 사상의 근저에는 이른바 법이 실재한다는 '법유'法有 사상에 대한 강도 높게 비판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연기와 공의 근본이치로 사물이 존재하니, 사물에는 존재의 대한 자성自性이 당연히 없다는 말입니다. 나아가 그렇기에 법 자체가 공하다는 인식을 확실히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가 반야심경의 이해에 왜 중론의 공사상이 필수적인지, 또 한국불교가 공이란 용어를 제대로 받아들이고 있는지에 강한 의문을 제기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사상의 연장에서 공을 의미하는 '무아'無我란 용어는 오해의 소지가 있으니(아니면 많은 부연 설명이 필요하니) '공아'空我로 대체하자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다시 차분히 이 책의 목적지와 중간 정리를 하겠습니다. 반야심경을 이해하는 핵심은 공의 이해에 달려있는데, 저는 처음 공이란 단어가 나왔을 때 설명을 피했습니다. 그리고 말하길 '공은 설명도 이해도 간단치 않다, 이 책의 전체에서 공이란 글자를 쓸 때마다 공을 설명하는 것이니 그 사실을 잊지 말라'고 오히려 당부 드렸습니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이유를 짐작 하셔야 합니다.
용수가 중론에서 말하는 공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모든 존재는 상의상관相依相關의 관계(緣起)에 있으므로, '이것이다'라는 스스로의 성품을 갖지 못하며(無自性), 공이란 이같이 고정된 자성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모든 존재의 실재實在는 다만 연에 의한 잠깐의 이름(假名)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세상의 어떤 존재가 있게 되고 없어지는 것은 이름뿐이지 그 '있고', '없음' 자체가 자성이 될 수는 없다. 결국 일체의 존재는 '있고','없고'의 존재를 떠난 것(中道)이다.
여기서 또 한 가지 주의하셔야 할 점은 중도란 말이 '중용中庸' 혹은 '가운데 길'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중도란 유, 무의 양 극단을 초월한 언어임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용수의 저서 중에 '반야바라밀다찬'般若波羅蜜多讚이 전해지는데, 이것만 보더라도 중론의 기반이 반야와 공사상에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더 이상은 너무 깊어지니 이쯤 해두고 서양철학의 마음의 접근의 깊이가 어느 정도 깊이까지 마음에 접근 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 본 내용은 성법스님 저서인 '마음 깨달음 그리고 반야심경'을 보내드리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