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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⑥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

通達無我法者 2010. 3. 23. 21:46

 

 

나는 누구인가 ⑥ 알음알이의 무더기(識蘊)

마음을 절대화하면 ‘아상’에 떨어져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부처님의 마지막 대답은 알음알이(識, vin~n~ana)이다. 필자가 ‘알음알이’로 옮기고 있는 용어는 중국에서 식(識)으로 옮긴 ‘윈냐나’이다. 윈냐나는 vi(분리해서)+√jna(알다)에서 파생된 명사인데 동사 ‘알다’의 명사 ‘알음’에 ‘알이’를 붙여서 만든 단어로 국어사전에도 있으며 영어로는 consciousness로 정착이 되었다. 알음알이를 몇 가지 측면에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알음알이는 ‘오온 가운데 하나’
 
유신견 있는 한, 예류자도 못돼
 
첫째, 초기불전에서부터 아비달마와 유식에 이르기까지 마음(心)과 마노(意)와 알음알이(識)는 동의어이다. 다만 역할이나 문맥에 따라서 다르게 쓰일 뿐이다.
 
둘째, 초기불전에서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것(了別境)일 뿐이다. 마음은 느낌(수)과 인식(상)과 심리현상들(행)의 도움으로 대상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아비달마와 유식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유식의 아뢰야식도 반드시 종자와 신체와 자연계(種.根.器)라는 대상을 가진다고 <유식삼십송>은 강조한다.
 
셋째, 마음 혹은 알음알이는 조건발생이다. 감각장소(根)와 대상(境)이라는 조건(緣)이 없이 혼자 독자적으로 존재하거나 일어나는 알음알이는 절대로 존재할 수가 없다. 그래서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눈과 형색을 조건으로 하여 눈의 알음알이가 일어난다 …’(S35:60 등)라고 나타난다.
 
넷째, 알음알이 혹은 마음은 무상하다. 그리고 실체가 없는 것(무아)이다. 초기불전의 도처에서 알음알이를 위시한 오온의 무상은 강조되고 있다. 여기에 사무쳐야 염오-이욕-해탈-구경해탈지가 일어나서 깨달음을 성취하고 열반을 실현하여 성자가 된다. 마음을 절대화해버리면 그것이 바로 외도의 자아(아뜨만)이다. 오온을 절대화해버리면 유신견(자아가 있다는 견해)이 된다. 유신견은 중생을 중생이게끔 얽어매는 열 가지 족쇄 가운데 첫 번째요 <금강경>의 4상이다. 유신견이 있는 한 그는 성자의 초보단계인 예류자도 되지 못한다.
 
다섯째, 마음은 찰나생.찰나멸이다. 그래서 부처님은 “비구들이여, 이것과 다른 어떤 단 하나의 법도 이렇듯 빨리 변하는 것을 나는 보지 못하나니, 그것은 바로 마음이다. 비구들이여, 마음이 얼마나 빨리 변하는지 그 비유를 드는 것도 쉽지 않다”(A.i.9)라고 강조하고 계신다. 이러한 가르침은 주석서와 아비달마에서 찰나(刹那, khana, 순간)로 정착이 된다. 주석서는 더 나아가서 이 찰나도 다시 일어나고 머물고 무너지는(생.주.멸) 세 아찰나(亞刹那, sub-moment)로 구성된다고 설명하여 자칫 빠질지도 모르는 찰나의 실재성마저 거부하고 있다.
 
여섯째, 마음은 흐름(상속, 相續)이다. 마음이 찰나생.찰나멸이라면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유지되어가는 우리의 이 마음은 무엇인가. 초기불교와 주석서에서는 지금.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찰나생.찰나멸의 ‘흐름’으로 설명한다. 이를 주석서는 심상속(心相續, 현장스님은 <금강경>에서 심류주(心流注)로 옮김) 등으로 강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강조하고 싶은 것은 마음 즉 알음알이는 단지 오온 가운데 하나일 뿐이라는 점이다. 한국불교는 무상하기 짝이 없는 이런 마음을 유일신 이상으로 절대화하고 있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절대로 안된다. 마음을 절대화하면 그것은 즉시 외도의 자아이론(아상)에 떨어지고 만다. 고정관념(相)의 척파를 부르짖는 <금강경>을 소의경전으로 하면서도 한국불교는 온통 마음을 절대화하여 외도가 되어버린 듯하다.
 
각묵스님 /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
 
 
 
[불교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