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의 알아차림에는 일정한 용례가 있습니다.
생각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하며,
대상을 복잡하게 보지 말고 단순하게 봐야 합니다.
매사를 부정적으로 보지 말고 긍정적으로 보아야 하며,
관념으로 보지 말고 실재를 보아야 합니다.
대상과 하나가 되지 말고 대상을 분리해서 보아야 하며,
근본집중을 하지 말고 찰나집중을 해야 합니다.
하나의 대상을 고집하지 말고 다양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밖에 있는 대상보다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힘을 주지 말고 가볍게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린 것으로 그치지 말고 알아차림을 지속해야 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보지 말고
관용과 자애와 지혜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법문을 들을 때는 선입관을 가지고 자신에게 맞는 말만 들으려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법을 말하는 사람을 보지 말고 법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상대와 대화를 할 때도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에게 맞는 것만 바란다면 진실을 알 수가 없습니다.
남의 말을 들으려는 것은 진실을 알기 위한 것입니다.
또한 말에는 항상 상대가 있습니다.
고정관념을 가지면 자신에게 맞지 않을 때는 배척을 하기 때문에 눈 먼 범부가 됩니다.
법문은 단지 알아차릴 대상으로서의 법으로 들어야 합니다.
선입관을 가지고 듣는 사람은 지혜를 얻을 수 없습니다.
남의 말을 들을 때 유익한 것은 받아들이고 유익하지 않은 것은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계속해서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열반은 알아차린 결과로 자연스럽게 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열반을 바라는 한 열반에 대한 욕망 때문에 수행이 퇴보합니다.
그래서 수행은 반드시 스승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때 수행자가 열반을 성취했어도 스승은 열반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아는 마음이 사라진 것으로 말합니다.
그러므로 스승이 열반을 인가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인의 세계는 누군가가 무슨 자격증을 가졌다고 하는 인가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아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내가 열반을 얻은 것이 아니고 단지 정신과 물질이 열반을 경험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인정할 스승도 열반을 인정받을 나도 없기 때문에
세속적인 관점에서 인가라는 말이 있지만,
출세간에서는 인가라는 말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열반을 체험한 정신과 물질은 있어도 열반을 얻은 자는 없는 것입니다.
도는 있어도 도를 얻은 자는 없는 것입니다.
아라한은 있어도 아라한이 된 자는 없습니다. 무아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는 있어도 부처가 된 자는 없습니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아의 법을 알아야만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열반을 성취해서 도과를 얻었다고 하면
그 자는 아직 열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이런 말은 매우 큰 허물에 속합니다.
부처님께서는 자신이 열반을 성취했다고 말하는 자를 자기 제자가 아니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진정으로 열반을 성취한 사람은 법의 성품을 본 자로서 내가 열반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도를 얻지 않고 얻었다고 말하는 것은 큰 죄악으로 부처님께서는 보십니다.
수행은 번뇌를 해결하여 행복하게 살려고 하는 것인데
오히려 이런 것에 반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은,
정직하지 못하고 부도덕한 것이라서
부처님께서는 엄격하게 금하셨습니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열반(涅槃)의 열(涅)자도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만약 이런 말을 하면 스승께서 나무라십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매우 천박한 것으로 말씀하십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음은 네 가지 단계의 성인의 도과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출세간의 마음인 수다원의 마음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성인의 반열에 듭니다.
수다원이란 말은 빨리어로 ‘소따빠나’ 라고 하는데 이는 ‘흐름에 들어감’ 이라는 말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일곱 생 이내에 아라한이 되어서 윤회가 끝납니다.
그래서 해탈을 예약했다고 해서 예류과라고 합니다.
수다원에 도가 붙으면 열반을 지향하는 것이고,
과가 붙으면 열반을 경험하고 깨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모든 도는 반드시 과를 경험합니다.
이는 들어갔으면 나와야 하는 이치와 같습니다.
이와 같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팔정도의 길을 가야만 합니다.
팔정도는 정견, 정사유, 정어, 정업, 정명,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이것을 계정혜 삼학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팔정도를 중도라고도 하고 위빠사나 수행이라고도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도의 항목은 다섯 가지입니다.
정견, 정사유, 정정진, 정념, 정정입니다.
이것이 계정혜 중에서 혜와 정에 속하는 도지(道支)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의 도지 중에는 정념이라는 알아차림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계율에 속하는 정어, 정업, 정명이 자연스럽게 팔정도 안에 포함됩니다.
그래서 정념으로 인해 계가 포함되어서 위빠사나 수행을 팔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위빠사나의 도지는 다섯 가지이지만 그 다섯 가지 도지 안에 정념이 있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정어, 정업, 정명이 포함되어서 팔정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념은 바른 알아차림입니다.
바르게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선한 마음이며, 계율을 지키는 행위라서
정과 혜에 계가 포함되는 것입니다.
불교에서는 특별히 계율을 말하지 않습니다.
물론 계율은 모든 수행자들에게, 모든 생명들에게, 골격이 되는 요소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딱딱한 계율을 먼저 말씀하시지는 않습니다.
계율 대신에 가장 중요한 알아차림을 권하십니다.
알아차리는 것 자체가 선한 행위이기 때문에
불선한 행위가 붙지 않아서 그것 자체를 계행으로 봅니다.
그렇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극단적 욕망으로 사회운동을 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은
바로 팔정도에 근거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깨달음을 얻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누구나 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이러한 팔정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팔정도에 감각적 욕망과 극단적 고행은 없습니다.
만약 이런 행위를 했을 때는 불교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사회운동의 차원이지 불교의 깨달음과는 무관하다고 이해하셔야 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르는 제자라면 마땅히 팔정도를 실천해야 합니다.
불교에 전쟁이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수다원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데
이때 7가지 청정과 16단계의 지혜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 과정을 거치는 것이 사람마다 빠르거나 늦는 차이는 있어도
누구나 겪어야 하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이라는 실천적 체험을 해서 지혜가 나지 않고서는
결코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지 못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10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과 회의적 의심과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집착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롭습니다.
그래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습니다.
물론 이러한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을 일을 하기 때문에 태어나지 않는 것이지
수다원이란 자격증이 있어서 가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누가 누구를 어디로 보내는 것은 없습니다.
오직 자기가 행한 대로 받기 때문에 지옥에 가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 것도 아니고
천상에 가는 것을 누가 결정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사람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불선과보보다는 선과보를 많이 축적해서 그 선과보의 영향으로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수다원이 되면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을 일을 합니다.
그 결과의 과보를 받아서 선한 곳에 태어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을 하려면 나타나는 10가지 족쇄가 있습니다.
이 족쇄는 우리를 존재의 세계에 붙들어 매는 것이라고 해서 족쇄라고 합니다.
이 10가지 족쇄를 한문으로는 오하분결과 오상분결이라고 합니다.
분결은 붙들어 맨다는 것입니다.
오하분결은 5가지가 있는데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집착,
감각적 욕망, 악의입니다. 여기서 악의는 악한 의도를 말합니다.
다음으로 오상분결 5가지입니다.
오상분결은 미세한 물질인 색계와 정신세계인 무색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족쇄를 말합니다.
오상분결은 색계에 대한 욕망, 무색계에 대한 욕망, 아만, 들뜸, 어리석음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이상의 족쇄가 하나씩 벗겨집니다.
수행의 단계에 따라 오하분결에서부터 오상분결까지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나갑니다.
마지막에 아라한의 마음을 갖게 되면 모든 10가지 족쇄로부터 다 벗어납니다.
그래서 아라한이 되어야 비로소 해탈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음은 성인의 두 번째 단계인 사다함의 마음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사다함의 마음은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사다함을 빨리어로 ‘사까다가미’ 라고 합니다.
이는 ‘한 번 더 돌아오는 자’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일래자라고 합니다.
사다함이되면 인간으로 한 번 더 태어나서 아라한이 됩니다.
그래서 한 번 더 온다고 해서 일래자입니다.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기 위해서는
수다원에서 경험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새로 수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수다원의 도과에 이를 때와 똑같은 수행과정을 거칩니다.
그리고 과거에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할 때 나타난 망상과 몸의 통증, 졸림 등도
역시 똑같이 경험합니다.
이러한 과정을 반복하는 것은 아라한이 될 때까지 누구나 겪어야 합니다.
다음 단계인 아나함, 그 다음에 아라한이 되기 위한 단계에서도
이처럼 수다원이 사다함이 되는 과정을 거치는 것처럼 매단계마다 똑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그래서 같은 몸과 마음을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같은 지혜를 되풀이한다는 것은
우리의 고정관념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사다함이라고 해서 다른 지혜를 얻는 것이 아닙니다.
역시 똑같은 무상, 고, 무아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나 사다함이 되면 수다원에서 알게 되는 무상, 고, 무아의 지혜보다는
더 깊은 지혜를 얻습니다.
그래서 사다함이 되면 10가지 족쇄 중에서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수다원의 마음보다는 더 확실하게 소멸합니다.
그리고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가 조금 약해집니다.
이상이 사다함의 마음의 상태였습니다.
다음으로 세 번째 성인의 단계인 아나함의 마음입니다.
아나함의 마음은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한 뒤에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한 마음입니다.
아나함을 빨리어로 ‘아나가미’ 라고 합니다. 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자’ 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한문으로는 불환자라고 합니다.
아나함이 되면 인간으로 태어나지 않고 색계 4선정의 세계인 정거천에 태어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수행을 해서 아라한이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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