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은 진실하기 위해서 합니다.
그러나 궁극의 깨달음을 얻기 전까지는 완전하게 진실할 수가 없습니다.
아직 완성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더 진실한 것처럼 위장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스스로 이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모든 일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어서 절대를 추구하는 자가 남보다 더 거짓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때의 진실은 단지 진실하고 싶은 생각에 불과 한 것이나,
어떤 목적을 위해서 진실을 가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지금 진실을 가장하고 있지 않은가 주의 깊게 알아차려야 하겠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다섯 번째 경행을 할 때 마음을 알아차리기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있는 마음을 알아차리기 중에서
다섯 번째로 경행을 할 때의 마음을 알아차리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경행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경행은 걸으면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경행은 특별한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고 걷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좌선과 경행과 일상의 알아차림으로 나누었을 때
경행은 다른 수행과 함께 실천해야 할 중요한 대상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 경행을 하는 이유는
움직이고, 서고, 앉고, 눕는 수행인 행주좌와를 충실히 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주좌와에서 경행은 행에 속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이라고 하면 좌선만을 연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생활하는 모든 것이 수행이어야 합니다.
그 중에 걷는 수행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합니다.
경행은 건강을 위해서 필요한 수행입니다.
수행을 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자칫 건강이 간과되기 쉽습니다.
건강하지 못하면 알아차리기가 어려우며 집중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이 없이는 건강한 마음도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앞서간 수많은 수행자들이 경행을 통하여 건강을 지키고
집중력을 키워서 성자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경전을 보면 수행자들이 경행을 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물론 부처님께서도 경행을 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도 수행처소에서 일정한 거리를 왕복하시면서 알아차리면서 걸으셨습니다.
또한 탁발을 하시면서 알아차리시거나, 전법을 펴시기 위해 길을 걸으실 때도
모두 경행을 하면서 걸으셨습니다.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명상원에서도 수행자들이 경행을 하는 장소를 만들어서
반드시 좌선과 경행을 병행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매일 맨발로 탁발을 하는데 이것이 모두 경행입니다.
사리불과 목련존자가 부처님과 인연을 맺게 된 것도 경행 때문이었습니다.
사리불존자가 재가 수행자였을 적의 이름이 빠띠사였는데
길에서 최초에 비구계를 받은 앗사지가 탁발을 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빠띠사는 그 비구의 걸음걸이로 보아서 훌륭한 스승임을 알고 법을 간청합니다.
앗사지가 탁발을 하면서 경행을 하는 의연한 모습을 보고 위대한 스승으로 알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앗사지는 자기의 스승이신 부처님이 계시다는 말씀을 합니다.
이렇게 해서 인도된 사리불과 목련존자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보시고
부처님께서는 '어서 오너라, 기다리고 있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불교의 중흥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도의 아쇼카 대왕도 처음에는 불교도가 아니었는데
길을 가는 어린 사미의 걸음걸이를 보고 불교에 귀의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또 부처님의 시자였던 아난다 존자도 500아라한이 모인 1차 경전결집에 참가하기 위해
밤새도록 경행을 합니다.
이때의 아난다 존자는 수다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래서 아라한만 참여하는 경전결집에 참여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 평소에 너는 선업의 근기가 있으므로
법을 얻을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믿고 밤새 열심히 경행을 했습니다.
이렇게 걷다가 새벽녘에 피곤하여 자리에 누우려고 하는 순간에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아난다 존자는 1차 경전결집에 참여하여 결집을 성립시켰습니다.
현재 미얀마의 위빠사나 명상원에서는 좌선 1시간에 경행 1시간씩
번갈아 가면서 수행하도록 시간표를 작성합니다.
그래서 하루에 8시간 좌선과 7시간 경행을 하도록 합니다.
그러므로 경행의 비중을 좌선과 같이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식당을 오가거나 거리에서나 일상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까지 합하면
경행을 하는 시간이 훨씬 더 많습니다.
미얀마에서 수행을 할 때 이렇게 경행을 하면서 느낀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숨겨진 힘이 있다면 이것은 바로 경행에서 오는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특히 경행은 몸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위빠사나 수행에서 사용하는 찰나삼매를 키우기에 좋았습니다.
경행이 숨겨진 힘이라는 것은 경행을 해서 정진력을 키우고,
이 정진력으로 집중을 하며, 걷는 수행을 함으로써 건강을 지킨다는 것입니다.
좌선에서 생기는 집중력은 자리에서 일어나면 사라지기기 쉬운데
경행은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이라서 잘 사라지지가 않는 장점이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실재하는 현상과 변화하는 과정을 알아차리는데
경행은 바로 이런 주요 요인을 충족시키기에 매우 좋습니다.
사마타 수행에서는 행주좌와가 없기 때문에 경행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지만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경행이 없이는 수행을 완성하기가 어렵습니다.
수행자에 따라 좌선보다 경행을 할 때 집중이 더 잘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경행만 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무엇이나 좋다고 해서 지나치게 하면 탐욕으로 하는 것이며 다른 힘이 계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경행도 적절하게 해야 합니다.
또 경행을 많이 하면 좌선을 할 때 피곤해서 졸음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경행에서 만들어진 집중력을 가지고 좌선을 하면 다른 때보다도 더 빠르게 집중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좌선을 하기 전에 경행을 하면 망상이 적어지고 쉽게 집중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좌선을 하기 직전에 잡담을 하고 좌선을 하면
잡담을 한 정보가 계속해서 나타나므로 망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좌선이 끝나고 경행을 하면 경직된 몸의 근육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습니다.
그리고 경행은 수행과 수행을 연결해주는 연결고리 역할을 합니다.
그리하여 알아차림이 끊어지지 않게 하여 빠른 시간 내에 열반을 성취하도록 이끌어 줍니다.
이처럼 경행과 좌선은 상호보완적인 수행입니다.
경행은 지구력을 갖게 하는데 좋습니다.
경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팔정도의 정정진(正精進)입니다.
그래서 경행은 정진력을 키우고 좌선은 집중력을 키웁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수행이 균형을 이루어야 합니다.
게으름은 무지인데 게으름에 빠진 수행자는 경행으로 정진력을 얻어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할 때 노력이 부족하여 나태해 질 때도 경행을 해야 합니다.
경행과 노력은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나태하고 게으른 수행자는 움직이기를 싫어합니다.
게으른 수행자는 편하게 앉아 있으려고만 하지 힘들여서 걸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게으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도 반드시 경행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경행을 할 때는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합니다.
그렇지 않고 하려는 마음을 내지 않으면 하게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경행을 하는 것을 노력을 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뿐더러 실제로 경행을 하는 것이 힘들기도 하고
집중력을 요구하기 때문에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행의 이익은 다섯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먼 곳을 갈 수 있는 지구력을 갖습니다.
부처님 당시에는 교통수단이 없어서 모두 걸어 다녔으므로
평소에 걷는 연습을 하지 않으면 먼 길을 걸을 수가 없습니다.
현대에는 운동이 부족하므로 경행을 통해서 운동을 할 수도 있습니다.
부처님 당시부터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특별한 운동을 하지 않고 경행으로 체력을 증진시켰습니다.
신체단련을 위해서 걷는 것이면 수행자에게는 충분합니다.
둘째, 수행을 할 때 지구력을 갖습니다.
경행을 하면 위빠사나 수행의 전반적인 지구력과 집중력을 키웁니다.
경행을 통해서 힘이 생기면 좌선과 일상의 알아차림을 할 때 함께 집중할 수 있는 힘이 배양됩니다.
경행을 한다는 것은 노력을 한다는 것입니다.
노력은 수행의 기본입니다.
그래서 경행을 통해서 인내가 키워집니다.
인내는 열반으로 이끈다고 하는데 그때 인내하는 것이 바로 노력입니다.
그래서 경행을 오래하면 지구력을 키우는 좋은 효과가 있습니다.
셋째, 건강에 좋고 수행의 진전에 도움을 줍니다.
좌선을 지나치게 오래하면 건강에 해롭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극단적인 고행을 하지 않습니다.
건강한 몸에서 선한 마음이 생깁니다.
좌선을 통해서 굳어진 근육을 이완시키고 혈액순환을 활발하게 해 주어야 합니다.
수행을 한다고 병이 나는 것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적당히 걷는 것은 건강과 수행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
넷째, 소화가 잘되게 합니다.
수행자들은 일반적으로 노동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소화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소화를 위해서도 반드시 경행이 필요합니다.
음식을 먹고 소화가 되지 않으면 집중력이 생기지 않습니다.
또한 경행을 하면 식곤증을 예방하는데 도움이 되어서 졸지 않게 됩니다.
다섯 번째, 지속적인 집중력을 길러 줍니다.
경행의 집중력은 움직이면서 하는 것이므로 일상의 움직임까지를 모두 알아차리게 하는 힘을 키웁니다.
또한 좌선을 한 뒤에 알아차림을 놓치기 쉬운데 경행을 함으로써
한 가지의 수행과 다음 수행을 지속적으로 연결시켜줍니다.
그래서 알아차림과 집중력이 식지 않고 유지되도록 합니다.
이렇게 알아차림이 지속될 때만이 대상의 성품이 보이고 지혜가 납니다.
걸으면서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찰나삼매가 생기는데
이때의 집중력은 쉽게 사라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움직이면서 생긴 집중력이기 때문입니다.
좌선을 할 때 생긴 집중력에 비해 경행을 할 때 생긴 집중력의 힘이 더 강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가 경행을 할 때 그냥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운동을 위해서 막연하게 걷는 것이 아닙니다.
발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법을 향해서 가는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수행자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은 모두 법을 향해서 가는 구도의 과정입니다.
경행을 할 때도 일정한 과정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경행을 할 때 처음에는 모양의 특성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뒤에 고유한 특성을 파악합니다.
이렇게 수행을 하다보면 조건 지어진 특성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반적 특성을 아는 과정을 거칩니다.
이처럼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 마지막에 일반적 특성인
무상, 고, 무아를 아는 지혜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행을 할 때는 처음에 발의 ‘모양의 특성’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자가 처음에는 발의 움직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발의 모양을 알아차리는 것은 발의 움직임이 알아차리기에 좋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발의 모양을 계속해서 알아차리면 차츰 알아차리는 힘이 생깁니다.
수행자가 처음부터 많은 것을 알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움직이는 발의 모양에 마음을 모아야 합니다.
이렇게 해서 방황하는 마음을 몸에 묶어 두는 효과가 생깁니다.
마음은 항상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달아나기 때문에
먼저 발이라는 대상에 마음을 묶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차츰 순화되는
일련의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을 순화하는 과정을 위해서 먼저 모양의 특성을 붙잡는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다음 단계의 수행을 하면 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 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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