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법이 없어서 수행을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마음이 하려고 하지 않아서 수행을 못하는 것입니다.
스승이 없어서 법을 배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아가 강하여 스승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스승이 없는 것입니다.
수행을 하려고 해도 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노력을 하지 않기 때문에 수행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자신의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우에도 다른 것을 탓하지 마십시오.
그것은 스스로의 책임을 회피하는 잘못된 행위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 경행은 무게의 이동입니다.
그래서 한쪽 발을 들어서 놓은 뒤에 다른 발을 들어서 옮길 때
몸의 무게가 뒤에서 앞으로 이동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그냥 발만 앞으로 내밀어서는 안 됩니다.
약간 몸을 앞으로 밀면서 이동해야 뒤뚱거리지 않습니다.
발을 들어서 앞으로 밀 때 발의 무게가 느껴집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몸의 고유한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발의 무거움이 앞으로 이동한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으면
알아차리는 힘이 생긴 것입니다.
한쪽 발을 들어서 놓은 뒤에 다른 한쪽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시기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천히 걸을 때는 한발의 움직임을 완전하게 알아차린 뒤에 다음 발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빨리 걸을 때는 한발의 움직임을 모두 알아차리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이때는 두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만큼 적정선에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대상도 중요하지만 이것보다 아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대상을 어떻게 겨냥하던 알아차리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경행을 할 때 처음부터 많은 것을 알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처음에는 그냥 마음을 발에 머물게 하여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정도의
수행을 계속하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부터 많은 의미를 부여하면 부작용이 생깁니다.
또한 알아차림에도 단계가 있어서 자연스럽게 대상의 성품이 보이는 것이지
알려고 한다고 해서 무조건 알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노력하는 것과 무리하게 알려고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노력은 균형이 있는 것이며 무리한 것은 욕망입니다. 경행을 할 때 시작과 중간과 끝을 보라고 말하지만
처음부터 이렇게 알아차리기는 어렵습니다.
시작과 중간과 끝은 대상을 충분히 주시했을 때
알아차리는 힘이 있어서 알 수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이것은 지혜가 성숙되어야 보이는 단계의 알아차림입니다.
그러므로 책에서 시작과 중간과 끝을 보라고 했다고 해서
처음부터 시작과 중간과 끝을 모두 보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경행에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는데
이것이 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의 하나입니다.
이것도 자연스럽게 의도를 보려고 해야 합니다.
움직이면서 하나하나의 의도를 보려고 할 수도 있지만
실 수행에서 모든 의도를 다 볼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처음에 의도를 보려고 하면 쉬운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처음에는 정지된 상태에서 앞으로 가려고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다시 정지된 상태에서 돌려는 의도를 알아차리고
차츰 돌면서 걸으면서 의도를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는 의도와는 달리 수행을 해나가면서
마음을 알아차리면 자연히 움직이려고 하는 의도가 보이게 됩니다.
이때 마음이 발에 가지 않고 전면에서 발의 움직임이나 느낌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 마음이 어디로 가는가?' 하고 마음이 마음에 집중하면
다음 동작을 일으키려고 하는 의도가 자연스럽게 보입니다.
걸을 때 발의 움직임에 대한 명칭은 붙여도 됩니다.
그러나 얼마간 수행을 한 뒤에는 명칭을 붙이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처음에 마음을 대상에 보내는데 명칭의 효과가 있습니다.
그러나 조금 지나면 명칭으로 인해서 발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수 없으며
특히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약간의 집중이 되면 명칭을 붙이지 않고 그냥 알아차리는 것이 좋습니다.
경행은 반드시 위빠사나 수행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생활인이 할 수 있는 수행입니다.
그렇다고 본다면 모든 생활인이 모두 위빠사나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경행은 걷는 모든 동작을 알아차리는 것이라서
운동을 하거나 등산을 할 때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경행을 할 때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마음과 몸을 분리해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일하는 것은 몸이 아니고 마음입니다.
마음이 의도해서 움직이는 것이므로 마음을 알아차릴 수가 있어야 합니다.
달리는 것이나 등산이나 테니스, 골프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것을 하든지 먼저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이 워낙 빠르게 변하기 때문에 이런 마음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하면서도 괴롭고, 중도에 쉽게 포기할 수도 있습니다.
또한 마음이 긴장하고 있는지, 싫어하고 있는지, 고통스러워하고 있는지를 알아차려야
비로소 하는 일에 적응할 수가 있습니다.
다음으로 몸을 알아차릴 때 움직이는 모양을 알아차리는 방법과
느낌을 알아차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에는 모양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시작하는 것이 좋습니다.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고정하면 집중력이 생겨 피곤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집중력이 생기면 다음에는 느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이 앞서 말씀 드린 네 가지 특성을 알아차리는 일련의 과정입니다.
일반 수행자들이 마라톤을 할 때도
전면에서 가장 강력한 대상으로 나타난 호흡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이때는 발의 움직임보다도 헉헉거리는 호흡이 강하다면
헉헉거리는 호흡에 마음을 고정하면 좋습니다.
그러면 하기 싫다거나, 힘들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원하는 완주를 알맞게 끝낼 수 있을 것입니다.
뛸 때 가장 강한 대상을 알아차리되 가능하다면
알아차리는 대상에 마음을 모아서 머물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더 강한 대상이 나타나면 그 대상을 선택해서 알아차리면 됩니다.
그냥 막연히 걸으면서 운동을 할 때와
한발 한발을 알아차리면서 걸을 때의 힘은 매우 다릅니다.
순간순간 피로회복도 될 뿐만 아니라 집중이 되기 때문에
모든 스포츠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가 있을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행을 할 때 시선은 서너 걸음 앞에 두고 하되 마음은 발을 겨냥해야 합니다.
경행을 할 때는 주위의 이것저것을 살피면 안 됩니다.
오직 발의 움직임에 마음을 집중해야 합니다.
마음이 밖으로 나가면 알아차림을 놓치게 됩니다.
시선이 가는 곳으로 마음이 달아나기 마련이므로 좌우를 돌아보아서는 안 됩니다.
일반적으로 수행자들은 고개를 들고 멀리 쳐다보거나 또는 뒤를 돌아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볼 때 알아차림을 놓칩니다.
경행을 할 때 꼭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상황에 따라서 종아리나 관절의 움직임을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처음에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들을 위해서 알아차릴 대상을 발에 한정하는 것이지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차츰 몸 전체에서 일어나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발의 움직임을 전면에서 알아차리기 때문에
마음이 꼭 발에 가야하는 것은 아닙니다.
계단을 걸을 때도 발의 무게를 알아차려도 좋고
몸 전체가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려도 좋고
근육이 땅기고 단단하고 부드러움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리고 산을 걸을 때는 전면에서 헉헉거리는 호흡을 알아차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때는 호흡이 가장 강한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실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경행을 할 때
손을 흔들면 알아차림이 분산되어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마음을 온전하게 발에 겨냥하기 위해서 손은 앞으로 모으거나,
팔짱을 끼거나, 뒷짐을 지는 것도 좋습니다.
차렷 자세로 하면 팔을 흔들면 부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밖에서 걸을 때는 손을 모을 필요가 없습니다.
속도를 내면서 걸을 때는 자연스럽게 팔을 흔들면서 걸어도 좋습니다.
명상원에서 경행을 할 때는 한정된 공간에서 일정한 거리를 왕복합니다.
이때 다른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정해진 곳을 일정하게 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이곳저곳을 걸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남이 가는 길을 가로막아서도 안 됩니다.
걸을 때는 특별한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야 합니다.
수행처가 아닌 곳에서는 걷는 모든 행위가 전부 경행에 속합니다.
길을 걸을 때나 집에서 움직일 때나 이동하는 모든 움직임이 경행입니다.
경행을 위해 특별히 넓은 공간이 필요한 것은 아닙니다.
어디서고 서서 몇 걸음만 걸을 수 있으면 됩니다.
그런 공간조차도 없다면 선채로 그냥 발을 들어 올리고 내리고 하는 동작으로
걷는 것을 대신할 수도 있습니다.
걷는 공간의 넓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서
어디고 자신의 발걸음을 알아차릴 수 있는가 없는가 하는 것만 중요히 여기면 됩니다.
이런 경행은 집안의 거실에서 혼자 조용히 걸으면서 해보면 집중이 잘 될 것입니다.
또한 가족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조용히 경행을 하면
가정의 분위기가 차분해지고 교육의 효과도 뛰어납니다.
한정된 곳에서 왕복을 하면서 경행을 할 때는 서있는 것과,
가는 것과 도는 것을 반복해서 알아차립니다.
먼저 경행을 하기 위해서 바닥에 발을 디디고 섭니다.
이때 서있을 때는 발이 바닥에 닿아있는 느낌을 느낍니다.
처음에는 단지 서있는 것만을 알아차리다가 차츰 발이 바닥에 닿아있는
무거운 느낌이나 딱딱한 느낌을 느낍니다.
그런 뒤에 현재의 마음가짐을 알아차립니다.
‘지금 마음가짐은 어떤가?’를 살펴봅니다.
언제나 무엇을 시작할 때는 일하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런 뒤에 손을 앞으로 모으고 시선은 서너 걸음 앞에 고정한 뒤에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밉니다.
그런 뒤에 다른 한쪽 발을 앞으로 내밉니다.
이렇게 일정한 거리를 간 뒤에 그 자리에 섭니다.
이때 수행자들이 서는 것을 좋아 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움직임의 가속도가 있어서 계속 움직이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일단 서는 것이 좋습니다.
경행은 움직임과 함께 정지된 상태도 필요합니다.
처음에는 정지된 상태에서 의도를 알아차리기가 쉽습니다.
그리고 동적인 움직임과 함께 정적인 서있는 모습을 알아차리면
한층 경행의 조화를 이룰 수가 있습니다.
발을 움직일 때 처음에 뒤꿈치를 들어 올리는 것 하나의 방법입니다.
이것을 ‘일어남’이라고 해도 좋고 ‘들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오른발 왼발의 뒤꿈치가 들리는 것만 알아차리는 것은
발의 움직임의 절반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발의 움직임은 드는 과정이 있고 놓는 과정이 있습니다.
그러나 더 세분화하면 들어서 앞으로 내밀고 그리고 놓는
세 가지 과정으로 나눌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는 일어남 하나만을 알아차립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것은 처음부터 많은 것을 알아차리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마음의 여유가 있어서 마음이 싫증을 내지 않고 대상으로부터 달아나지 않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린 뒤에 다음 단계로 발이 바닥에 닿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사라짐’이라고 해도 좋고 ‘놓음’, 또는 ‘닿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닿음을 할 때도 일어남을 알아차리지 않고
오직 발이 내려가서 닿는 것 하나에 마음을 집중합니다.
닿음을 하는 시간은 일어남을 하는 시간처럼 적절하게 합니다.
이때의 닿음도 일어남처럼 일어나고 닿음의 움직임의 절반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런 뒤에 이번에는 발의 움직임의 전 과정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이때는 ‘일어남 사라짐’이라고 해도 좋고 ‘들어서 놓음’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이것은 호흡을 알아차릴 때의 방법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리다가 다음에는 사라짐을 알아차리고
마지막으로 일어남과 사라짐을 알아차리면
이런 단계적 알아차림을 통해서 차츰 무상을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것이 경전에서 밝힌 부처님께서 사용하신 수행방법입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일어남 하나만 알아차리다가
다음에는 사라짐 하나만 알아차리다가
그리고 마지막에는 일어남 사라짐을 알아차려서
단계적인 수행으로 마음이 대상으로부터 달아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좋은 효과를 얻을 것입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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