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세상의 속된 일로 인해 내가 시시비비를 가리고 반응한다면 나도 똑같이 속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일이 속되더라도 물들지 않는다면 출세간을 사는 청정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속된 일을 보고 흥분하는 것은 나도 그것과 같은 부류의 정신을 가진 것입니다.
그래서 속되다고 비난하는 상대는 나와 하등의 다를 것이 없습니다.
세상에는 세상의 일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일이 있습니다.
그것을 분리하지 못하면 나도 남과 하등의 다를 것이 없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렇지 않고 자신을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바로 세상의 모든 일에 초연해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지난 시간에 이어 계속해서 경행을 할 때 모양의 특성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단순하게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해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까지 걸으면서 살아왔지만 자신의 발의 움직임을 지켜보면서 걸은 적은 별로 많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무슨 일을 하거나 할 때 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수행이기 때문에
걸을 때는 걷는 발의 움직임을 알아차립니다.
하지만 마음은 발에 머물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단 한걸음도 바르게 겨냥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발의 움직임을 계속 알아차리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지금까지 걷는 것을 모르고 걷는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고 반문할 수 있겠지만
사실 누구나 모르고 걸었습니다.
여기서 알고 걷는다는 것은 발이라는 대상과 발에 마음을 보내는 알아차림이라는 행위와
그리고 이것을 아는 마음, 이 세 가지가 정확하게 일치해야 비로소 걷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행은 전에 해 보지 않은 새로운 수행입니다.
마음이 움직이는 발을 고정하여 알아차리면 집중력이 생겨서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들어올 수 없기 때문에 계율을 지키는 것입니다.
계율이 선행되어서 다음 단계로 고요함이 생기고 그리고 이 결과로 지혜가 납니다.
이렇게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자연스럽게
다음 단계인 발의 고유한 특성을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가령 들 때는 가볍고, 내릴 때는 무겁고, 닿았을 때는 단단하거나 부드럽거나
차갑거나 따뜻함을 느낍니다.
그리고 발이 앞으로 나아갈 때는 바람을 일으키는 요소가 있는 것을 압니다.
이것은 몸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을 아는 것입니다.
이 고유한 특성이란 지수화풍이라고 하는 사대의 요소입니다.
이 요소를 아는 것은 관념이 아닌 실재를 아는 것으로 중요한 법을 보는 것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느낌으로, 앞으로 수행을 발전시키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간에는 이런 것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졌지만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비로소 이런 느낌 하나하나가 모두 훌륭한 법이고
이런 법을 통해서 궁극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대상의 고유한 특성을 아는 것으로부터 본격적인 위빠사나 수행이 시작됩니다.
마음이 몸을 움직이는 것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대상과 아는 마음이 지속되어서
차츰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가 생깁니다.
다음 단계로 계속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조건 지어진 특성을 아는 지혜가 생깁니다.
조건 지어진 특성은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를 말합니다.
모든 것들은 조건인데 그 조건이란 원인과 결과입니다.
고유한 특성을 아는 지혜가 생기면 발의 이러한 움직임이
그냥 저절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것을 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차츰 이때 가려고 하는 의도에 의해서 발이 움직이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려는 마음이 있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경행을 할 때는 반드시 움직이고자 하는 의도가 있고,
다음에 움직임이 있고, 그리고 이것을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조건이 갖추어져야 경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경행이란 의도와 풍대, 의도와 풍대로 지속됩니다.
이처럼 걸으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의 움직임이 있고,
다시 걸으려는 의도가 있어서 발의 움직임이 일어나는 현상을 거듭 알아차리면
나중에는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납니다.
모든 것들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는 사실을 알면
세상의 일이나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많은 의문이 풀립니다.
그러므로 신비가 풀리고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한 중요성과 책임을 느낍니다.
모든 것들이 원인과 결과라고 안다면
결국 그 모든 것의 책임은 자신이라는 자각이 생겨서 사람이 겸허해질 수 있습니다.
이렇게 조건 지어진 특성을 알게 된 뒤에는 다음에 ‘일반적인 특성’을 아는 단계가 옵니다.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난 뒤에는 현상이 가지고 있는 법의 성품을 아는 단계가 옵니다.
발의 고유한 특성은 느낌인데 이 느낌은 매우 빠르게 움직입니다.
이 움직임이 바로 무상입니다.
이 움직임이 진동인데 이것들이 매순간 변하는 것이고 이 변하는 것이 무상입니다.
이러한 무상은 필연적으로 두려움과 괴로움을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러한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바라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되지 않아서 비로소 마지막의 법인 무아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대상이 가지고 있는 성품인 무상과 고와 무아를 발견합니다.
이러한 법을 ‘일반적 특성’ 또는 ‘보편적 특성’이라고 합니다.
존재하는 모든 대상들은 하나 같이 무상, 고, 무아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특성을 알아야 비로소 오온을 집착하지 않아 열반에 이르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여기서 최고의 법이란 모든 것에 공통하는 특성이라는
일반적 특성이 있다고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는 특별한 것을 아는 것이 아니고
모든 것들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보편적인 진리를 아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이르러 얻은 지혜가 일반적이고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가장 보편적인 것이라는 사실이 나타내는 의미는 매우 중요합니다.
진리는 특정한 사람의 것이 아니고 살고 있는 것,
그 자체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얻기 위해서는 특별한 곳에 가서,
특별한 사람을 만나서, 특별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여기에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모든 법이 다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여러분들은 앞으로 법을 얻기 위해서 다른 곳을 헤매지 마십시오.
자기 스스로의 몸과 마음이 대상이며 자기가 경험한 것이 스스로의 중요한 가르침입니다.
이처럼 지혜가 성숙되는 과정은 단순하게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처음부터 엄청난 것을 대상으로 해야 지혜가 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이면 됩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단순하게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다음 단계의 지혜가 나타납니다.
수행자마다 지혜의 계발속도가 다르겠지만
누구나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혜를 얻지 못해서 괴로울 것이 없습니다.
지혜는 바르게 알아차림을 지속한 결과로 오는 것이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얻으려고 하는 순간에 욕망이 생겨 오히려 지혜를 가로막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자는 몸의 어느 부분을 알아차리거나 상관이 없습니다.
모두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도과를 성취합니다.
그래서 호흡이나 발의 움직임 하나에도 모든 법이 다 포함되어있습니다.
아직 우리가 그것을 볼 수 없어서 모르지만,
그것을 지속적으로 지켜보면 차츰 그것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초보 수행자는 처음에 발의 움직임 밖에 알아차릴 수 없지만
위빠사나 수행은 지혜수행이라서 단계적인 과정을 거쳐서
차츰 더 높은 단계의 지혜가 성숙하므로 알아차릴 대상에 대해서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걸을 때 한걸음 한걸음이 모두 소중한 법을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경행 중에 망상이 떠오를 때는 사소한 망상이면 그냥 발에 집중 하는데,
계속 같은 망상이 떠오를 때는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망상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나서
망상하는 마음을 봅니다.
그러면 망상을 알아차리는 순간에 즉시 사라집니다.
왜냐하면 망상하는 것을 아는 마음이 새로 일어났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망상하는 마음은 사라집니다.
그러나 집요한 망상은 완전하게 소멸한 것이 아니고
순간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에 다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망상이 다시 나타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먼저 대상을 정확하게 알아차려야 하고,
그리고 망상한 것을 알아차린 뒤에 즉시 다음 동작에 집중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망상이 다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고 느슨하게 알아차렸거나 다음 동작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경행을 하는 동안 계속해서 망상만 하다가 맙니다.
우리는 평생 망상만 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누구도 망상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그러니 망상의 힘이 있는 만큼 노력의 힘도 함께 필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경행은 걷는 움직임을 알아차리는 것이라서 좌선보다 망상이 적습니다.
그러나 경행 중에도 망상이 계속 떠오르면 알아차림과 집중이 약한 상태이므로
"지금 내 마음가짐은 어떤가?" 알아차리고 나서 다시 경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또한 경행 중에 지나치게 피곤하다고 느끼면 잠시 앉아서
얼마간 적당한 휴식을 취하는 것이 좋습니다.
알아차림이 있는 휴식시간도 수행의 하나의 과정입니다.
경행을 할 때 눈을 감으면 안 됩니다.
걸으면서 장애물이 있는지를 확인해야 합니다.
눈을 감는 것은 좌선을 할 때로 충분합니다.
더 자세하게 알아차리기 위해서 눈을 감는 것은 탐욕으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알 수 있는 만큼 알아차려야 합니다.
아직 알아차리는 힘이 없는데도 더 많이 더 자세히, 더 분명하게 알려고 하면
그것은 탐욕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하겠습니다.
그리고 뒤로 걷거나 부자연스럽게 걸으면 안 됩니다.
걸음걸이는 자연스러울수록 좋습니다.
발을 크게 들어 올리지 말고 보통사람이 걷는 걸음을 걸어야 합니다.
경행을 한다고 조금이라도 이상하게 걸으면 힘이 들고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다른 목적이 있어서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과시일 수도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좌선이 끝나고 경행을 시작할 때 약 10분이나 15분 정도 빨리 걸어서
피가 통하지 않아 단단해진 근육을 풀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런 뒤에 조금 속도를 줄여서 조절하면 됩니다.
의외로 약간의 속도를 냈을 경우에 더 많이 알아차릴 수 있고 집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꼭 천천히 걸어야만 알아차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적당한 속도가 좋습니다.
마음을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인위적으로 억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장소에 따라서 알맞게 걸음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경행은 상황에 따라서 알맞은 속도가 필요합니다.
특별하게 천천히 걸어야 할 때는 천천히 걸어도 되는데
무조건 천천히 걷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지도자에 따라 천천히 걷는 것을 강조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너무 천천히 걷는 것이 갖는 장애도 있습니다.
너무 천천히 걸으려고 하면 인위적으로 걷는 것이라서 마음이 위축될 수도 있습니다.
특히 지나치게 천천히 걷거나 힘을 주어서 걸으면 상기의 위험이 있습니다.
너무 집중을 하려고 힘을 써서 두통이 생기게 되고 열이 올라 정신이 맑아지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또 너무 힘을 들여서 걸으면 긴장하게 되고 좌선을 할 때 졸음에 떨어지기 쉽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은 무엇이나 자연스러운 것이 좋습니다.
걸을 때 뒤뚱거리는 것도 천천히 걷거나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상이 생기면 다시 현상이 생긴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론 한정된 공간에서 하는 경행은 약간 천천히 해야 합니다.
그러나 경행은 천천히 하거나 빠르게 하거나 알아차리는 것이 문제이지
속도에는 큰 의미가 없습니다.
알아차리고 하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알맞게 유지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명상원이 아닌 일상에서도 걸을 때 알맞은 속도를 유지해야 합니다.
다음 시간에 계속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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