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34

通達無我法者 2011. 1. 4. 22:03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오늘도 인간의 조건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인간은 선심과 불선심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여기에 과보심이 있는데,

선과보심과 불선과보심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조건에 의해 결합되어서 말과 행위를 하게 합니다.

이때 과보심을 원인과 결과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과거에 잘못한 행위를 했으면 잘못한 행위는

그 순간에 일어나서 사라지고 없지만,

과보심은 남아서 조건이 성숙될 때마다 나타납니다.

그 과보심은 마음에 저장되어있습니다.


또한 과거에 선한 행위를 했으면 선한 행위는

그 순간에 일어나고 사라지고 없지만,

과보심은 남아서 조건이 성숙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현재 선한 마음을 먹고 싶은데도 잘 안 되는 것은

과거에 만들어 놓은 불선 과보심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입니다.


어느 의미에서는 우리는 업의 과보에 의해서

조정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반대로 유혹에 빠져 나쁜 일을 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도

과거에 만들어놓은 선과보심이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나쁜 짓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보통의 경우에는 선심과 선과보는 함께 만납니다.

그래서 더욱 좋은 쪽으로 상황을 전개시킵니다.

그리고 불선심은 불선과보와 함께 만나서

더욱 나쁜 쪽으로 상황을 전개시킵니다.


동류는 동류끼리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같은 동류가 아니면 배척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수행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행은 선심과 선과보를 일으켜

불선심과 불선과보가 들어오지 못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수행을 계속하면 아라한과 부처님의 마음인 무인작용심을 얻게 됩니다.

무인작용심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지고,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고

누차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무인작용심이 될 때 모든 번뇌가 완전하게 불타버려서 해탈을 합니다.

그래서 다시 태어날 원인이 사라져 윤회가 끝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좋은 머리나 잘 생긴 얼굴은 모두 선한 행위의 결과로 인한 것입니다.

이는 전생의 선과보로 생긴 것이지만, 그렇다고 이 과보가 영원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새로운 선업을 다시 쌓지 않으면 다음에 지금 누리든 것이 보장될 수가 없습니다. 


돈이나 명예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이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소유할 만한 선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새로운 선업을 쌓지 않으면, 그런 것들이 지금 이후에

다시 보장될 수 없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전생의 불선업의 과보를 받아서 태어난 사람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살면서 축생처럼 살고 죽어서도 축생이 됩니다.

어리석으면 수행을 해서 지혜를 얻을 때만이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전생의 수행을 한 결과로 태어난 사람입니다.

지혜가 있는 사람은 살면서 행복하고 죽어서는 윤회를 끝냅니다.

최상의 지혜를 계발하기위해서 우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이렇듯이 우리는 좋은 것이나 나쁜 것이나 모두 과보의 굴레로 이루어집니다.

먼저 윤회를 한다는 것은 세 가지 굴레가 있습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굴레가 있어서 이 굴레의 힘으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번뇌의 굴레라고 말합니다.

굴레는 또 다른 말로 회전이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이것을 빨리어로는 ‘와따 (Vatta)'라고 합니다.


이렇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라는 번뇌의 굴레가 일어나서

선한 행위와 선하지 못한 행위의 굴레를 돌립니다.

그래서 이행위의 굴레가 업의 굴레가 됩니다.

이 업의 굴레는 선한 과보와 선한지 못한 과보의 굴레가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처음 번뇌의 굴레가 업의 굴레를 돌리고,

업의 굴레가 과보의 굴레를 돌려서

다시 또 과보의 굴레가 태어나서 번뇌의 굴레를 돌리고,

번뇌의 굴레가 다시 행위를 해서 업의 굴레를 돌리고,

업을 한 행위의 결과인 과보가 생겨서 그 과보가 굴러가서

다시 또 번뇌를 일으키는 것을 우리는 윤회라고 합니다.


여러분! 이렇듯 인간의 삶은 오랜 여정을 거치면서

생명이 지속되고 있는 하나의 과정 과정들입니다.

그래서 모든 삶은 한낱 과정에 불과합니다.


현재 살아가는 것은 전에 있었던 행위의 연속이고,

앞으로의 삶은 현재의 삶에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지금 이생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인식이 있어야

차분하게 다음을 생각하게 됩니다.


여러분! 모든 것은 과정입니다.

현재 하고 있는 일은 한 순간에 지나가버립니다.

어느 때나 과정의 연속이지

한번 만들어지고 행해진 것은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입니다.


진실한 것은 오직 현재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현재 자신의 일에 대해서 좌절하거나 심각하게 고뇌할 것이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삶이 과정이므로 현재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과거나 다가올 미래에 대한 삶을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생각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미래를 걱정한다고 해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망상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에 대한 기억은 의미가 없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기억일 뿐이지, 실재하는 현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오직 현재입니다.


이미 지나간 과거가 단지 기억 속에 존재하는 과거일 뿐입니다.

이런 기억은 고정관념에 불과합니다. 

잘못된 과거를 기억하고 사는 것은 무지한 일입니다.


이러한 분석은 세간의 관념적 관점이 아니라,

실재하는 과학적인 현상에 기인한 것입니다.


이것은 정신세계에서 내려진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런 문제에 대하여 확신을 가져야합니다.


우리가 어느 한 순간에 잘못된 일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히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인간의 사회 통념상 그것을 문제로 삼지

실제로는 이미 지나가버린 기억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인간들은 어리석기 때문에 그런 사실을 기억하고 고뇌합니다.

이것은 무지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나는 이미 어떤 사람이다’라고 하는 고정관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결코 없습니다. 

오직 매순간의 조건만 있고,

또 그 조건은 새로운 조건으로 흘러가므로

단지 과정만 있을 뿐입니다.


조금 전의 마음과 지금의 마음은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이후의 마음은 또 다릅니다.

어느 게 내 마음입니까?


마음은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으로

그 연속선상 위에 있을 뿐입니다.

거기에 나의 마음은 없습니다.


하지만 인간은 업의 적용을 받습니다.

업의 적용 범위는 매우 판단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많습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우리가 이런 얼굴로 태어나고, 이렇게 사는 것이

모두 여러 가지 형태의 업의 적용을 받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업이란 자신이 한 행위를 말합니다.

자신이 선한 행위를 했으면 선한 과보를 받고,

불선의 행위를 했으면 불선의 과보를 받습니다.


이것은 실제로 업이 적용되는가, 아닌가에 상관없이

상당히 공평한 이야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실재하는 현상입니다.


여러분!

다음에 원인과 결과에 대한 과보가 어떻게 적용되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여러 가지 행위를 했을 때 인간으로 태어나면 어떤 결과가 주어지는지 보겠습니다.


사람이 살생을 많이 했다면 인간으로 태어났을 때 그 과보로 수명이 짧습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에 대해 자비롭고 동정적이면 그 과보로 장수를 합니다.


여기서 살생의 과보를 강조하는 사상은 생명을 평등하게 보는 생명존중 사상입니다.

이것은 자연 현상계의 질서를 가장 잘 따르는 인간만의 정신입니다.

살아있는 모든 생명을 동등하게 여긴다는 것은 불교의 특성입니다.


사람이 생명을 해치는 습관이 있다면 그 과보로 병을 얻어서 고생을 합니다.

그러나 살아있는 생명을 해치지 않고 돌보면 그 과보로 건강한 삶을 누립니다.


사람의 성질이 난폭하고 하찮은 말에도 짜증을 내고,

화를 잘 내고, 악의가 있으면 

그 과보로 얼굴이 못생기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성질이 온순하고, 말을 조심하며,

화를 잘 내지 않고, 남을 미워하지 않으면

그 과보로 얼굴이 아름답게 태어납니다.


사람이 질투심이 많고, 남의 존경을 받는 것과 명예를 시기하면,

그 과보로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질투심이 없고,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것을 기꺼이 환영하고 성원해준다면,

그 과보로 사회적인 지위를 얻습니다.


사람이 남을 도울 줄 모르고, 인색하고, 자기만 아는 탐욕이 있으면,

그 과보로 가난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남을 돕고 인색하기보다 관용을 가지면

그 과보로 부자로 태어납니다.


사람이 고집이 세고, 거만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을 존경하지 않으면,

그 과보로 비천하게 태어납니다.

그러나 반대로 고집이 세지 않고, 거만하지 않으며, 남을 존경하면,

그 과보로 좋은 가문에서 태어납니다.


사람이 학문을 배우지 않고, 닦아야할 것을 탐구하지 않으면,

그 과보로 어리석은 자로 태어납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학문을 닦고, 덕망이 있는 사람과 교분을 두터이 한다면,

그 과보로 총명한 사람이 됩니다.


이상에서 보듯이 모든 것은 자기가 한 행위에 의해 그 결과가 주어집니다.

그래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가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음란한 행위를 했을 때는

그 과보로 다음 생에 거세를 당하거나 임신을 할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제자인 아난존자가 전생에 음란한 행위를 한 과보로

몇 생을 동물로 태어나서 거세를 당하는 고통을 겪기도 했습니다.


이런 사실이 주는 교훈은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므로 의미가 없습니다.

현재 내가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이 지금 이후나 다음 생을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존귀한 인간으로 태어난 것에 대해서 그 가치를 부여하고

이제 어떻게 하면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는가에 대해서 우리가 고뇌해야 됩니다.

이것은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고 실행이 필요합니다.


이렇게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키거나 퇴보시키거나 하는 것은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결정됩니다.

그래서 이것을 신구의 3업이라고 말합니다.


현재에 좋은 조건을 가진 자가 인색하거나 잘못된 행동을 한다면,

지금 이후가 좋아지기를 기대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뿐더러 다음 생에서 현재에 행한 과보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하지 않고 오히려 해놓은 저금을 까먹으면 안 되겠습니다.


여러분!

철학은 지식을 다루지만 수행을 지혜를 나게 합니다.

지혜는 안다는 것입니다.


알면 당하지 않고 잘못을 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르면 당하고 잘못을 행합니다.

행복하지 않고 불행을 자초하는 이 모든 것이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인간을 단죄할 이유는 없습니다.

누구나 업의 과보를 받기 때문에 남의 업에 개입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노력해야합니다.


남의 일은 그가 해결할 것이니 내가 상관할 것 없습니다.

나의 일은 내가 해결할 것이니 남이 상관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니 각자가 자신의 일을 자신이 알아서 해야 합니다.


여러분!

자신의 일을 하는 것 중에 가장 우선하는 것이 관용과 지계와 수행입니다.

오늘도 여러분과 함께 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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