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3

通達無我法者 2011. 1. 7. 20:49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항상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야 합니다.


수행의 필요는 바른 삶을 영위하는 중요한 의지입니다.

필요해야 보이고 필요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습니다.

필요해서 의지가 일어나야 마음이 일을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필요한 사람의 것이지,

필요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가치가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필요는 조건을 성숙시키는 기초가 됩니다.


열정이 지나치면

필요한 것과 필요하지 않은 것을 구별하지 못해 소득도 없이 늘 분주하지만,

지혜가 있으면 무엇이 필요한지를 항상 알게 됩니다.


선한 행위도 필요로 해서 행하는 것이며,

선하지 못한 행위도 필요해서 행하는 것입니다.


모든 필요는 오직 자신만이 선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필요하지 않은 일을 하면 능률도 없고 괴로움뿐입니다.

수행은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만 가장 가치 있는 것이지

필요로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고통이며 장식품입니다.


여러분! 지금까지 12연기의 시작인 무명에 대해서 말씀드렸고

또 무명에서 벗어나는 지혜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나는데 이 행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도 무명을 원인으로 일어난 행(行) 중에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공덕이 되지 않는 행은 불선업으로 선하지 못한 행위를 말합니다.

선하지 못한 행위는 부도덕한 행위이며, 이러한 행위를 하면 네 가지 악처에 태어납니다.

만약 사람으로 태어났을 때는 용모가 추하거나 병든 몸으로 태어나기도 합니다.

여기서 네 가지 악처인 사악도는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세계를 말합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지옥은 어떤 세계일까요?

지옥은 주석서에서는 아무런 즐거움이 없는 곳으로 설명합니다.

다시 말하면 고통만 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불선행을 행하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에서 태어나는데,

먼저 그 지옥이 어떤 세계인지, 어떤 고통이 있는지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지옥은 여덟 가지로 나누는데

등활지옥, 흑승지옥, 중합지옥, 규환지옥, 대규환지옥,

초열지옥, 대초열지옥, 무간지옥, 이렇게 여덟 가지입니다.


땅속 20만 4천 유순에 이르는 지층을 구분하면,

상층이 12만 유순이고, 하층 12만 유순은 암반층이라고 합니다.

상층에 팔열지옥이 존재하며, 층과 층의 간격은 1만 5천 유순씩 떨어져 있다고 합니다.


인간계에서 1만 5천 유순이 떨어진 곳에 등활지옥이 있습니다.

그곳에는 1만 5천 유순 떨어진 흑승지옥이 있습니다.

지옥의 한 층과 다른 한 층 사이는 1만 5천 유순씩 떨어져 있다고

아비담마에서는 밝히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러한 지옥은 고통만 있는 곳입니다.


먼저 등활지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등활지옥은 불타오르는 형벌을 가하려고,

무기를 손에 거머쥔 저승사자들이 형벌을 받을 사람들을 토막 쳐 잘라 불태우는 곳입니다.

죄인들은 토막이 난 뒤에도 거듭 살아나 고통을 되풀이 합니다.

이 지옥을 등활지옥이라고 합니다.


두 번째 지옥은 흑승지옥입니다.

이 지옥에서는 잔혹한 야수에게 쫓기는 가련한 짐승들처럼

쫓겨 자빠지고 나뒹구는 죄인들을 지옥사자들이 조각조각 난도질하고 줄자로 재단하듯이 자릅니다.

이를 흑승지옥이라고 합니다.


세 번째 지옥은 중합지옥입니다.

이 지옥에서는 쇠로 만들어진 땅속으로 허리까지 파묻힌 지옥인들이 쇠바위로 달구어져 불태워집니다.

이 지옥을 중합지옥이라고 합니다.


네 번째 지옥은 규환지옥입니다.

이 지옥에선 맹렬히 타오르는 검붉은 불길에 태워지는 가련한 죄인들이

연민을 일으킬 만큼의 큰 비명으로 울부짖기에 규환지옥이라고 합니다.


다섯 번째 지옥은 대규환지옥입니다.

이 지옥에선 화염의 연기에 휩싸여 쪄짐과 익혀짐을 당하는 지옥의 죄인들이

크나큰 연민을 일으킬 만큼의 가슴을 찢는 비명으로 울부짖기에 대규환지옥이라고 합니다.


여섯 번째, 초열지옥입니다.

이 지옥은 붉게 타오르는 쇠로 만든 상자위에 죄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앉혀두고

뜨거운 불로 태우므로 이 지옥을 초열지옥이라고 합니다.


일곱 번째, 대초열지옥입니다.

이 지옥은 죄인들을 붉게 타오르는 산 정상에 오르게 한 뒤에

산 밑에 날카로운 작살 위에 거꾸로 떨어지게 하여 불태웁니다.

이 지옥을 대초열지옥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마지막, 무간지옥입니다.

이 지옥에선 죄인들이 시뻘건 불길에 의해 형벌을 당하는데

그 극심한 고통이 단 한순간도 끊이지 않고 끝없이 계속됩니다.

지극히 어리석은 지옥인들이 머무는 이 지옥을 무간지옥이라고 합니다.


무간지옥에서 일곱 가지 불선과보가 일어납니다.

고통을 수반하는 몸 의식을 제외한 여섯 가지 눈 의식 등은 중립적 느낌을 수반하여 일어납니다.

이에 눈 의식 등이 일어날 때는 한 순간이라도 고통에서 벗어나 중립적 느낌으로 지낸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실제로는 너무 극심한 고통 때문에 중립적 느낌을 수반한다는 언급을 하기조차도 하기 힘듭니다.


즉 압도적인 괴로운 느낌의 하나가

여섯 가지 중립적 느낌으로, 일어난 의식들을 뒤엎어 버린다고 말합니다.

비유하자면 혀끝에 꿀 여섯 방울을 올려놓은 뒤에

그 위에 한 방울의 뜨거운 쇳물을 떨어뜨리면 여섯 방울의 꿀맛을 압도함과 같습니다.


무간지옥에서의 고통은 한 치의 틈조차 없습니다.

타오르는 불길에 시달리는 가련한 지옥인들의 극심한 고통에는 조금의 빈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간지옥(無間地獄)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지옥은 참혹한 곳입니다.

우리들이 잘못된 행을 하면 그 잘못된 행에 대한 과보를 받는 곳이 제일 먼저 지옥입니다.


다음으로 지옥 이외에 축생이 있습니다.

축생은 과연 어떤 곳일까요?

축생계는 서로 죽고 죽이는 약육강식의 법칙이 지배하기 때문에,

사랑, 연민이나 기타 영적인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고,

동물들은 대개 고통과 두려움에 휩싸여 죽기 때문에 다시 악처에서 태어날 확률이 큽니다.


물론 이런 일들을 확률로 따지기는 어렵습니다.

모두 업의 과보를 받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축생으로 태어났을 때는

다시 축생으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로 확률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물론 경우에 따라서는 동물도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내생에 인간계나 천신계에 태어날 수도 있습니다.


사악처 중에서 세 번째인 아귀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귀를 원래는 ‘뻬따’ 라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귀신’이라고도 표현합니다.

아귀는 원래 조령신을 뜻했습니다.

그런데 제사에서 후손들이 올리는 음식을 기다리는 자들이라는 뜻에서

불교에서는 굶주린 귀신으로 정착된 것으로 추정이 됩니다.


아귀는 사는 여경이 따로 없이 숲이나 습지나 묘지 등 인간이 사는 세계에서 같이 산다고 전해집니다.

인간의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간혹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도 있고 천인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삐로꾸따경에 나오듯이 이들 가운데 빠라따뚜 빠지위노만이

살아있는 친척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공덕을 나누어 줄 때

그 공덕을 누릴 수가 있고 더 나은 선처로 나아갈 수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부의 아귀사는 악업으로 인해 이러한 아귀로 태어난 중생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네 가지 사악처 중에 마지막에 아수라의 세계가 있습니다.

아수라는 원어 그대로 아수라입니다.

이는 문자적으로 유의하거나 빛을 발하지 못하는 존재를 의미하고,

경에서는 제석을 왕으로 하여 33천에 천인과 천신들과 싸우는 존재로 나타납니다.


하지만 악처에 속하는 아수라는 그러한 아수라와는 구별해야 합니다.

이들은 괴물처럼 생기고 집체만한 배에 입이 너무 작아

제대로 먹거나 마실 수 없는 일종의 아귀에 속합니다.

이 가운데 깔라깐지까가 가장 비참하고 고통이 심한 아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들의 삶은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고통을 겪어야 됩니다.

이들 사악처의 마음은 모두 열두 가지인데,

크게 탐욕에 뿌리를 박은 마음과 성냄에 뿌리를 박은 마음과

어리석음에 뿌리를 박은 마음이 있습니다.


결국 사악도의 마음이란

탐진치를 가진 마음에 뿌리를 박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저희 스승은 선하지 못한 행위를 하는 것에 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행복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에

현생과 내생에서 물질적 복리를 증진시키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행동을 특징짓는 것은 대체로 탐욕과 성냄입니다.


선한 마음은 좋은 친구를 사귀고 법을 들으며

합리적으로 사유할 수 있는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그러나 선하지 못한 사람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만 일어납니다.

이기적인 스승에게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도덕적으로 타락합니다.

부처님 당시에 한 재가신자가 선한 비구를 헐뜯었는데

죽어서 자신이 생전에 보시한 사찰의 변소에 사는 아귀가 되었습니다.

그 아귀는 천안으로 자기를 알아본 목갈라나 존자에게

자기가 지은 악업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내생의 행복을 위해 물질적으로 승가에 보시를 했지만

스승에 의해 잘못된 지도를 받은 이 사내의 운명은 얼마나 끔찍합니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찾아야할 스승은 학식 뿐 아니라

선한 기질도 함께 지녀야함을 보여줍니다.


우리가 스승이라고 말했을 때 그 스승은 모두가 선하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만나는 것도 자기의 과보 중에 하나입니다.


선한 사람의 특징은 남을 해롭게 하려는 행동, 말, 생각이 없습니다.

선한 사람이나 선한 비구와 사귀는 사람은 좋은 법을 들을 기회가 생기고,

만약 현명하게 생각하면 그의 마음은 선한 업으로 이어집니다.


반면에 못된 스승이나 친구, 그릇된 가르침과 부적절한 사유는

도덕적 붕괴를 불러올 수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처음에 결점 없는 성품을 지녔지만

결국 타락한 사상으로 인해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들은 도둑질, 강도, 횡령 등으로 유죄를 받아

오랜 동안 쌓아온 명성이 순식간에 무너지기도 합니다.


이 모든 고통은 행복에 대한 전도된 인식에서 비롯합니다.

기대와는 반대로 곤란에 봉착해 있는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너무 늦습니다.


어떤 악행은 즉각적인 과보가 생기지는 않지만

때가 되면 과보가 무르익어 고통에 빠지게 합니다.

만약 현생에서 악을 행한 자에게 업의 과보가 생기지 않는다면

아귀가 된 승원의 보시자의 경우처럼 내생에서는 반드시 그 과보를 받습니다.


재가신자를 잘못 지도했던 스승은 죽은 후에 그 운명이 더 비참했습니다.

자기 제자의 아랫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그 제자의 배설물을 먹으면서 살아야했기 때문입니다.


악업의 과보는 참으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저지른 행위의 과보가

거꾸로 자기를 덮쳐서 무시무시한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다.


밀림의 어떤 부족은 풍작과 안전을 기원하며 신에게 동물을 제물로 바치기도 합니다.

이러한 원시적인 믿음은 도시에 사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아직 남아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기가 모시는 ‘낫’을 부처님처럼 숭배합니다.

여기서 ‘낫’은 미얀마어로 토속신, 정령을 의미합니다.

이 ‘낫’은 인간들의 인생관과 우주관을 지배해온 토속신앙의 대상인데

이것을 귀신이라고도 말합니다.

또는 토지, 나무, 산, 하천 등의 자연정령과 마을의 수호신, 택지의 수호신,

도로의 수호신, 다양한 개인 및 지역의 수호신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미얀마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부처께는 복을 빌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기본적 수준에는 부처는 복을 주는 분이 아니라는 정도의 불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기복을 원할 때는 부처님이 아닌 토속신앙에게 복을 빕니다.


그들은 부처님은 해탈로 가는 가르침을 주시는 분이지

복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다음 시간에도 말씀드리겠습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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