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5

通達無我法者 2011. 1. 7. 21:3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깨달음의 세계에서는 극단적인 투쟁이 없습니다.

모든 것을 알아차려서 관용을 보여야합니다.


내가 남을 배려한다는 것은

남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까지도 수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선(善)을 표방하는 극단은 이미 선(善)이 아닙니다.

선(善)을 표방한 극단은 다른 불선(不善)을 태동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

그는 이미 수행자가 아니고 사회운동가입니다.


깨달음에는 고행과 감각적 욕망을 추구하는 양극단이 없고,

오직 중도(中道)만 있을 뿐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무명을 원인으로 행이 일어난다’에서

그 행에 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난 시간에 이어서 선하지 못한 행,

그리고 공덕이 되지 않는 행에 관해서 계속 말씀드리겠습니다.


사람들은 종교적인 공양 의식에서

동물을 잡아서 손님을 접대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평범한 불교 신자들도 이러한 관습에 대해서 의구심을 품고 있습니다.


보시하는 사람의 목적이 무엇이든 살생은 나쁜 과보를 받으며

살생을 한 사람이 믿는바와 반대로 선한 행위가 아닙니다.

선한 행위는 도덕적인 청정을 특징으로 합니다.


희생자와 처지를 바꾸어 놓고 볼 때 

생명체를 죽이거나 다치게 하는 행위는

어떤 의미로도 도덕적으로 청정하다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피해자는 어쩔 수 없이 죽음과 학대를 당해야만 하는 것입니다.

피해자가 만일 복수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면 반드시 보복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복수를 기원하며,

살생을 저지른 자는 내생에서 죽임을 당하거나

악행으로 인해 지옥에서 고통을 받습니다.


경장에는 살생의 과보에 대한 일화가 매우 많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

어떤 살생도 용납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어떤 사람은 인간이나 천인으로 태어나길 바라며

보시, 지계, 수행에 힘씁니다.


물론 자기가 지은 선한 행위로 인해 바라던 바가 이루어져

내생에 행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늙고 병들고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은

역시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범천계에 가기를 갈망하여 선정수행을 합니다.

이들은 범천이 되어 여러 겁에 걸쳐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그러나 수명이 다하면 인간이나 천인으로 다시 태어나고,

만일 악업을 지었다면 악처에서 태어날 것입니다.


결국 범천이 누리는 영광된 삶이라는 것도 단지 전도된 인식일 뿐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화려한 삶을 살았더라도 다시 윤회해야 되기 때문에,

그 윤회의 세계는 언제 어느 곳에서 태어날지 알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복이라는 환상은 범부에게만 국한 된 것이 아닙니다.

괴로움을 즐거움으로 여기도록 하는 전도와 무명은

수다원과 사다함과에서도 여전히 사라지지 않으며 아나함의 도과에 들어서도

수행자는 색계의 존재와 무색계의 존재의 삶을 더 없는 행복으로 착각하기 일 수입니다.


그러므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세 도과에 들어선 수행자는

선한 행위를 목표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아직 아라한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이 되었다하더라도

아라한이 되고자 하는 선한 의지를 가져야합니다.


범부의 경우에는 무상을 항상하는 것으로,

정신과 물질의 괴로움을 행복으로,

무아를 자아로,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여기는

네 가지 전도에 깊이 빠져있습니다.

이것을 한문으로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때 상(常)은 무상을 항상(恒常)하는 것으로,

락(樂)은 괴로움을 행복으로,

그리고 무아(無我)를 자아(自我)로,

정(淨)은 더러운 것을 깨끗한 것으로 잘못 알고 있는 것을

전도몽상의 대표적인 견해라고 말합니다.


실재하는 것은 무상한 것이며, 괴로움이며,

자아가 없으며, 더러운 것이라고 아는 것이고,

관념적으로 보는 것은 항상하는 것이고, 행복이고,

자아가 있으며, 깨끗한 것이라고 아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전도된 인식이 무명입니다.

이러한 전도와 무명으로 인해

몸과 말과 생각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선하고 불선한 업을 일으킵니다.


선업은 믿음 알아차림 등과 함께 의도적인 노력이 있을 때 생겨납니다.

마음을 그냥 내버려두면 악업을 짓기가 쉽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내버려두지 마십시오.

마음에 알아차림이 없을 때는

반드시 불선업을 해서 불선의 과보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불선의 과보가 한 인간의 운명을,

살아있는 모든 생명의 미래를 지배합니다.


선업을 포기하는 것이 불선업입니다.

그래서 선업을 거부하는 것이 불선업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선하지 못할 때는 거의 과거의 악업의 영향으로 불선업의 행위를 합니다.

그래서 항상 깨어서 알아차릴 때만이 선업을 짓게 됩니다.


수행자 여러분!

어떤 사람은 아라한이 선업이나 악업을 짓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해서

선업도 짓지 말아야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보통 사람이 선업을 거부하면

마치 도시에 선량한 사람들이 다 빠져나가 버려서

오직 바보와 불량배만 남아있는 것과 같습니다.


또 유용한 나무를 다 제거해버리면

쓸모없는 풀이나 잡초만 무성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상태에서는 불선업만 증대하기 마련입니다.


선업을 거부하는 사람은 악처에 떨어지는 불선업만 짓습니다.

그리고 일단 악처에 떨어지면 인간계로 되돌아오기가 매우 힘들어집니다.


우리가 바라지 말라는 것은 감각적 욕망을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과 극단적 고행은 윤회를 돌리는 불선업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선한 의도는 필요한 것입니다.

아라한이 선업에서 벗어났다는 것은

무명을 제거했기 때문에 모든 행위가 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사실 아라한은 윗스님을 공경하거나, 설법을 하거나, 보시를 하거나 ,

곤경에 처해있는 중생을 도와주는 등의 선행을 합니다.

아라한의 삶은 오직 남을 돕는 것으로 가득 찹니다.


하지만 아라한은 사성제를 완전히 체득하고 무명을 제거했기 때문에

이러한 선행은 어떠한 업의 효력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라한은 선업을 짓지 않는 것이지

선행을 아예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선행은 반드시 불선행을 수반하는

선과 불선의 관계를 말합니다.


그러나 아라한은 그 자체의 행위가 모두 다 전선(全善)할 뿐만 아니라

반드시 불선행을 수반하지 않는 그런 온전한 선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이러한 아라한의 마음을 무인작용심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라한의 마음이 바로 부처의 마음인 무인작용심입니다.


이 무인작용심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인과 결과가 없는 마음으로 열반의 상태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단지 작용만하는 마음이라고 해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을 뜻합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업을 포기하는 것이 불선업이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리고 업을 행할 때

알아차림에 의해서 선과 불선을 떠난,

단지 필요해서 하는 모든 선한 행위는

바로 아라한의 마음이며 부처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내가 선행을 해서 그 과보를 받기 위해서 하는 것이지,

선행을 해서 선한 과보를 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아야 되겠습니다.


선행을 해서 선한 과보를 받으려고 할 때, 그때의 선행은

바라는 것이 있기 때문에 완전한 선행이라고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이런 선행을 뒤섞인 행, 반쪽짜리 행이라고 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명과 잘못된 견해로 선행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는 범부는

악처에 떨어지는 악업만 짓습니다.


사실 선행을 하려는 욕구가 없다는 것은

성스런 도와 열반에서 멀어지는 깊은 무명의 표시이기도 합니다.


무명이 엷어질수록 마음은 선행을 하려는 쪽으로 기웁니다.

수다원이 된 수행자는 범부였을 때보다도 더 많은 선행을 하고 싶어 합니다.

성스런 도의 상위 단계에 있는 성자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도(道)와 상관없는 일을 하지 않으려는 욕구가 더 커지고,

더 많은 시간을 수행을 하면서 보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한 행위를 불선한 행위와 하나로 뭉뚱그려서

의도적으로 회피해서는 안 됩니다.


무명과 결부된 모든 행위는 선업이나 불선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선업이 없다면 모두가 불선업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자신의 몸과 마음을 의지처로 삼는 것만이

가장 안전하고 확실하게 사는 길입니다.

그러나 가장 믿을 수 없는 것도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몸과 마음이 있어서 관용과 계율을 지키고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지만,

오히려 몸과 마음이 있어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으로 악행을 일삼아

괴로움이 생기기도 합니다.


선행과 악행의 선택은 인간만 할 수가 있습니다.

이것을 선택하는 방법이 바로 알아차림입니다.


알아차림이 있으면 선행을 하고

알아차림 없으면 악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만이

번뇌로부터 자유로워질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 이 시각에도 공연히 들떠서 다른 곳을 찾아서 서성거리지 말고

현재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무엇을 해야 하며,

오늘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를 자각해야 되겠습니다.

가장 바른 것은 자신에게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헤매는 사람은 헤매는 것을 좋아서 합니다.

단지 습관적으로 서성거리며 관심을 보일 뿐이지

정작 무엇을 얻고자 하는 간절한 소망조차도 없이 헤매는 것입니다.


지금 하고 있는 수행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면서

이런저런 수행을 찾아다녀야 아무 소득이 없습니다.


현재 하고 있는 수행 하나라도 제대로 하십시오.

하나를 바르게 했을 때 다른 것도 바르게 할 수가 있습니다.


때로는 수행방법을 바꾸어서 할 수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수행자의 바른 마음가짐입니다.


하나를 만족하지 못하면 무엇도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방황은 죽어서도 끝나지 않는 괴로움의 긴 여정입니다.


이제 그 방황을 끝내고 한 자리에서

조용히 자신의 몸과 마음을 지켜보아야 되겠습니다.


흔히 상좌 불교를 저만 안다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구업을 짓는 말입니다.


이는 부처님을 저만 아는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상좌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수행을 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 그러신 것처럼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습니다.


수행자는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출발해야합니다.

자신을 알아차리는 것은 스스로의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며

자신의 문제를 해결함으로서 궁극에는 남을 위해서 봉사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

위빠사나 수행은 8정도의 가르침을 실천하는 수행이라서

결코 자신만을 아는 이기적인 삶을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과 남을 함께 배려하는 전인적인 삶을

살게 하는 것이 위빠사나 수행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알아차리는 순간에는 선한 세계에 살고 있는 것이며

알아차림이 없으면 번뇌의 세계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이 순간 깨어서 알아차림을 가지고

선한 행위를 해서 선한 과보를 받아서

지금도 행복하고 지금 이후도 행복하시기를 빕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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