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56

通達無我法者 2011. 1. 7. 23:01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수행을 할 때에는 먼저 알아차릴 대상이 있어야 하고,

다음에는 반드시 대상을 겨냥해서 알아차려야 하며,

그런 뒤에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은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입니다.

마음이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거나,

또는 마음이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몸과 마음이 아닌 밖에 있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에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에서 대상을 알아차리거나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마음자리에서 알아차릴 수가 있습니다.


몸과 마음에서 알아차릴 대상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느 것도 대상으로 선택하기에 쉽거나 편안한 것이 없어

알아차리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수행을 시작하고 처음에는 대상을 선택하기가 어렵습니다.

이는 아직 수행 경험이 없고,

대상을 정확하게 겨냥하지 못한 탓이며,

집중력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특별한 대상만을 선택하지 않습니다.

어떤 대상이 되었거나 대상을 아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가볍고, 부드럽게, 정확하게 해야 합니다.

알아차리는 힘이 없을 때는 힘이 없는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는 대상을 찾기 어려운 것을 알아차리는 앎을 해야 합니다.

특별한 대상을 알려고 하지 말고 현재의 상황을 알아야 합니다.


대상을 잡을 수 없다고 서두르거나 조급해 해서는 안 됩니다.

이때는 대상을 잡을 수 없는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

몸으로 가서 눈꺼풀, 입술, 손, 엉덩이 등을 차례로 알아차리면서

알아차림을 지속하면 바른 수행을 할 수가 있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공덕이 되지 않는 행,

바꾸어 말하면 불선행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은 무명과 전도된 인식에 관해서 잠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 전도된 인식을 전도몽상이라고도 합니다.


무명과 지혜는 서로 배척하는 것처럼

진실과 지혜는 서로 배척합니다.

동류가 아닌 것들은 반발합니다.


그래서 진실을 모르면 거짓을 받아들이고,

거짓을 모르면 진실을 받아들입니다.


사성제를 모르는 사람은 괴로움에 대한 잘못된 생각으로

행복을 가장하거나 자신을 속이고 억누릅니다.


갈애가 충족되면 잠깐 즐거움을 줄뿐이며,

감각적 세계에 있는 모든 것은 괴로움입니다.

감각대상은 모두 끊임없이 변하고, 불확실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무지한 사람은 이러한 감각대상을 좋고 즐거운 것으로 여깁니다.


이런 전도된 인식으로 인해

과거에 행복하다고 여겼던 날들에 대해서 향수를 느끼거나,

미래에 대해서 낙관적인 생각을 갖습니다.


여러분!

과거에 사랑했던 연인에 대한 추억도 사실은 괴로움뿐인데,

이것을 즐거움으로 알고 집착해서 계속 생각을 합니다.


수행이란 이것이 괴로움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실제 과거의 즐거움을 기억하고, 과거의 연인을 기억하는 것은

연인이 대상이 아니고 그 순간에 연인을 생각하는 그 느낌,

그 즐거움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지, 결코 거기에 연인은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단지 기억일 뿐입니다.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느낌을 기억하여, 그 느낌을 갖고자

과거에 빠져서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무지한 사람들은 그릇된 인식 때문에

삶에서 좋다고 여겨지는 것을 갈망합니다.


바로 이것이 괴로움의 원인이지만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오히려 행복은 이러한 욕망을 충족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쾌락에 대한 욕망에 대해서 어떠한 잘못도 보지를 못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감각적 쾌락이란 것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에 부딪쳤을 때,

즐거움을 느끼는 것, 즐거움을 집착하는 것, 즐거운 욕망을 갖는 것을

감각적 쾌락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괴로움의 소멸에 대한 진리와, 괴로움의 소멸에 이르는 도의 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것입니다.


지금까지 남에게 배웠거나, 지성적으로 받아들인 사람도

이 진리의 참다운 가치를 알지는 못합니다.


그 사람들은 열반이나, 열반에 이르는 도에는 참된 관심이 없고,

다만 이 도는 고난과 결핍으로 점철되어 있다고만 생각합니다.

그래서 행복을 스스로 외면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위빠사나 수행을 통하여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성품인

무상과 고, 무아를 알아차리면 수행자는 지혜로워집니다.

그렇지만 무상과 고, 무아라는 단어만 암송한다던지,

피상적인 알아차림에 머문다면 수행자는 지혜로워지지 않습니다.


통상적인 의미에서는 도덕적 가치 분별이

업의 법칙에 대한 믿음과 결부되어 있으면 지혜롭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지은 자가 지은대로 받는다는

업자성정견(業自性正見)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로운 보시 행을 하려면,

반드시 보시자와 보시를 받는 사람과 보시물의 무상 고 무아를

알아차리는 것이 결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견해는 보시를 하고 나서 모든 것의 무상함에 대해서

알아차리라고 언급하고 있는 앗타살리니 경에 근거한 견해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러나 이것은 보시행을 하기 전이나 하는 도중이 아니라,

보시를 하고나서 알아차림에 대한 언급을 말하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목적은 보시행을 지혜롭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선업을 지으라는 것입니다.


만약 이러한 알아차림을 전제로 한 보시만이 지혜로운 보시라고 한다면,

불자가 아닌 사람이 하는 모든 보시는 지혜롭지 못한 보시라고 해야 할 텐데

이는 터무니없는 이야기입니다.


알아차리지 못해도 보시 자체는 선업입니다.

다만 알아차리고 하는 보시만이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더 큰 공덕이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먼저 바라더라도 보시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더 큰 보시는 바라지 않고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바라지 않는 보시행을 원하면

아예 바라는 보시행 조차 하지 않게 되어서,

보시의 싹을 자르는 결과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들은 자기 수준에 맞는 단계가 필요한 것입니다.


보살의 보시에 대한 이야기에는 알아차림에 대한 언급이 없으며

부처님 또한 알아차림이 보시행에 꼭 필요하다라고 말씀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경전에서는 보시를 받는 사람의 정신적 단계에 따라

보시의 과보가 다르다고만 설하고 있으며,

이것이 보시를 할 때 우리가 고려해야 될 유일한 가르침인 것입니다.


만약 보시자와 보시를 받는 사람을

무상을 조건으로 하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여기면

그 둘은 평등한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보시행은 그것을 행하고자하는 영감과

보시라는 선업의 잠재되어있는 힘이 적어질 것입니다.


사실 보시의 목적은 위빠사나 수행의 알아차림이 아니라,

보시자가 그것을 행함으로써 얻는 이익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누구에게 보시를 해야

커다란 이익을 받을 수 있는지를 말씀하셨으며,

업에 대한 바른 숙고의 중요성을 지적하셨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악행을 저지릅니다.

그들은 잘살기 위해서 남을 죽이고, 훔치고, 강탈하거나, 법정에서 거짓 증언을 합니다.

심지어 제 부모를 죽이는 사람조차도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위해서 그러한 행동을 합니다.


예를 들면, 아자타삿뚜 태자는 왕이 되기 위해서

이미 수행을 해서 수다원이 된 자기 아버지인 부왕을 죽입니다.

그의 스승인 데와닷타의 사주를 받아 부왕을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면

보다 더 오랫동안 왕으로서의 삶을 즐길 수 있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수다원인 아버지를 죽인 무거운 죄로 인해서

그는 후회와 불안에 사로잡혀 육체적인 병까지 얻었습니다.


나중에 데와닷타는 자기 아들의 손에 죽고 지옥에 떨어져

지금 무간업의 고통을 혹독히 받고 있습니다.


까꾸산다 부처님당시에 두시라는 마라가

부처님과 승가를 해치려고 갖은 노력을 다했습니다.

하지만 이 목적을 이루지 못하자 마라는 한 사내의 몸에 깃들어

부처님 뒤에 있던 한 상수제자를 돌로 죽였습니다.


이 끔직한 악업으로 인해 마라는 그 즉시 서른한 가지 중생계 중에

가장 낮은 무간지옥에 떨어졌습니다.

마라였을 때 그는 중생들 위에 군림하였지만,

무간지옥에서는 지옥지기의 발에 밟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이토록 자신이 저지른 악행은 그 과보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할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 중에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그것이 와서 보라고 나타나는 것들입니다.


망상은 이것이 있으므로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통증도 이것이 있으므로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졸림도 이것이 있으므로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과 악한 의도도 와서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어떤 대상이거나 그것들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로

이러한 내용을 설명하기위해 직접 보라고 나타난 것입니다.


이처럼 저 스스로를 드러내어 법의 성품을 보이려하지만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애써 진리를 보지 않으려고 외면합니다.


오히려 대상에 대하여 투정을 하거나 화를 내고

급기야는 증오심을 드러내면서 대상을 없애려는 노력만 기울입니다.


모든 대상은 저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서 나타난 법이므로

수행자는 언제나 있는 그대로 몸과 마음에서 나타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와서 보라고 나타난 대상을 두려워하거나 없애려고 하면

법이 드러내는 성품을 알지 못해 미혹하게 살아야합니다.


여러분! 누구나 번뇌가 있지만,

번뇌가 있는지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있고,

번뇌가 있는지 아는 현명한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가 있는지 아는 사람 중에서

번뇌를 바르게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고,

번뇌를 불선업으로 해결하려는 사람이 있습니다.

번뇌를 해결하려고 나쁜 방편을 쓰면 더 나빠지지만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번뇌가 차츰 줄어듭니다.


수행자 여러분!

번뇌가 있는 것을 알고, 번뇌가 있는 것을 수용해야 합니다.

번뇌를 알아차리되, 단번에 번뇌가 소멸되기를 바라서는 안 됩니다.

번뇌가 소멸되려면, 번뇌가 쌓여온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함께 필요하므로,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하늘과 땅은 모든 것을 받아드리지만 저 스스로 뽐내지 않습니다.

위빠사나 수행도 내가 있다고 뽐내지 않는,

단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하늘과 땅은 무엇이나 받아들입니다.

위빠사나의 알아차림도 하늘과 땅처럼

모든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마십시다.

올 사람은 올 이유가 있어서 온 것이며

갈 사람은 갈 이유가 있어서 간 것입니다.


이렇듯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도

오는 것을 막지 말고 가는 것을 잡지 말아야 합니다.


통증, 망상, 졸림, 가려움, 괴로움, 슬픔이 왔을 때는 오는 것을 막지 말아야 하며,

행복, 기쁨이 가버렸을 때는 가는 것을 잡지 말아야 합니다.

싫은 것을 혐오하거나 좋은 것을 집착하는 것이 괴로움입니다.


우리는 오고감을 지켜볼 수 있을 때만이 자유를 얻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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