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7

通達無我法者 2011. 1. 11. 20:42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목표는

괴로움을 소멸시키는 통찰지혜를 얻어서

열반을 성취하는 것에 있습니다.


이런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번뇌를 소멸시키는 목표 이외에는

어떠한 능력도 바라서는 안 됩니다.

신통한 능력과 통찰지혜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신통에는 번뇌가 따르지만 지혜는 번뇌를 부숩니다.


신통한 능력을 바라는 것이 새로운 번뇌의 시작입니다.

수행자에게 필요한 것은 번뇌를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사마타 수행으로 특별한 능력을 얻을 수도 있지만

이는 지혜를 얻고자 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여야 합니다.


능력을 얻으려는 수행을 하면 삿된 길로 가기가 쉬워서

궁극의 행복을 얻지 못하고 어리석음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아난다 존자의 전생에 관해서 잠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아난다 존자가 연기법을 쉽게 이해한 것은

전생에 쌓아온 바라밀과 스승들의 지도, 그리고 그의 폭넓은 지혜,

그리고 수다원과 증득이라는 4가지 요소에 기인한 것입니다.


아난다 존자의 전생은 까마득히 먼 옛날

빠두무따라 부처님 시대에 왕의 동생인 수마나 왕자였습니다.

지방영주였던 왕자는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했습니다.

이에 왕은 크게 기뻐하며 왕자에게 원하는 것을 말해보라고 말했습니다.


빠두무따라 부처님은 역대 25분의 부처님 중에서

10번째 부처님에 해당하는 시대입니다.

그러므로 까마득히 오랜~오랜 세월 전의 시대를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의 전생인 수마나 왕자는

안거 석 달 동안 부처님을 시봉하기를 허락해 달라고 했습니다.

왕은 이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 없어서

부처님의 마음은 참으로 알기 어렵다고 하면서

세존께서 왕자의 거처로 가는 걸 내켜하지 않으신다면

자신도 어쩔 수 없다 라고 말했습니다.


비구들의 조언에 따라 왕자는 또 다른 수마나 장로에게

부처님과의 면담을 주선해줄 것을 청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을 뵌 왕자는

세존에게 수마나 장로가 어떻게 다른 비구들의 능력을 넘어선

일을 할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선업을 지어야 그렇게 세존과 긴밀한 관계가 될 수 있는지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보시와 지계를 실천함으로써

수마나 장로처럼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선업을 지어서 미래의 부처님의 거룩한 승가에서

수마나 장로와 같은 특권을 가진 비구가 되고자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자신의 도시로 오셔서 안거를 지내시도록 청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그곳을 방문하면 많은 사람들에게 이로울 것이라고 내다보시고

“수마나여! 여래는 혼자 있는 것을 좋아 하느니라” 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는 수마나의 초청을 넌지시 수락하신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자 왕자는 부처님이 오실 길을 따라서

부처님과 승가가 밤에 편히 쉴 수 있도록 100개 이상의 승원을 지으라고 명령했습니다.

왕자는 동산을 하나 사서 부처님과 많은 비구들을 위한 숙소와 웅장한 승원을 지었습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준비되자 부왕에게 보고한 다음에

부처님께 자신의 도시로 오시도록 초청했습니다.


왕자와 백성들은 부처님과 제자들을 꽃과 향기로 환영하면서 승원으로 모셨습니다.

거기서 왕자는 승원과 동산을 부처님께 정식으로 보시했습니다.


이러한 보시의식을 마친 왕자는 비빈들과 대신들을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들에 대한 연민으로 여기에 오셨소.

부처님께서는 물질적인 이익에는 관심이 없으시고,

법을 닦는 데에만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수행으로 부처님을 공경하면 부처님은 기뻐하실 것이오.

나는 10계를 지키면서 부처님이 계신 곳에 머물 것이오.


여러분은 오늘 내가 한 것처럼

우안거 동안 모든 아라한에게 공양을 올리고 돌봐 드리기 바라오.’

이렇게 전생의 아난다 존자는 말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이처럼 오랜 세월 전에 서원을 세우고 공덕의 과보를 쌓았습니다.


그리하여 왕자는 10계를 지키며 부처님이 계신 곳에 머물면서

뛰어난 시자인 수마나 장로 곁에 머물면서

극진히 부처님을 시중드는 것을 보았습니다.


안거가 바로 끝나기 직전 집으로 돌아와

부처님과 승가에 푸짐한 보시를 올리고는

부처님 앞에서 미래의 부처님의 시자가 되겠다는 서원을 세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왕자를 축복해 주었으며

왕자는 이후 수없는 생에 걸쳐 바라밀을 닦았습니다.


본생경에는 아난다가 고따마 부처님의 전신인 보살과 함께

많은 생에 걸쳐 바라밀을 쌓은 내용이 나옵니다.


때로는 보살이 왕이고 아난다는 대신이었으며

때로는 보살은 인간이고 아난다가 천인이나 제석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의 지위는 가끔 뒤바뀌기도 하고 어떤 생에서는 형제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석은 욕계천상에 있는 33천을 다스리는 왕을 말합니다.


둘은 그렇게 기나긴 윤회의 여정을 함께 거치며 바라밀을 닦았고,

마지막 생에서는 아난다는 숫또다나 왕의 조카가 되었습니다.


첫 번째 안거를 베나레스 근처에서 보낸 다음에 부처님께서 라자가하로 갔고

거기서 부왕의 초청을 받아 까삘라왓투로 향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고향을 떠날 때 아난다와 몇 명의 석가족 왕자들은

부처님을 따라 승가에 들어갔습니다.


수많은 생에 걸쳐 쌓아온 바라밀로 인해

아난다는 많은 사람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연기법을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아난다는 스승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는 스승과 같이 살았을 뿐만 아니라, 

교리에 대해서 배우고 질문하고 뛰어나게 기억을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공부한 아난다는 연기법을 이해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아난다는 저명한 설법가인

뿐나 장로의 설법을 들은 다음에 수다원과를 성취했습니다.

아난다 존자는 뿐나 장로의 감로 같은 법문에 깊은 찬사를 보냈습니다.


그 법문의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자만은 몸, 느낌, 기억, 행, 식에 대한 집착에서 생깁니다.

거울이 없이는 거울에 비친 사람의 얼굴이 생기지 않는 것처럼

오온이 없이 자만은 생기지 않습니다.


몸과 느낌, 또는 오온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영원하지 않으므로 오온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의 것이나 내적이거나 외적이거나 거칠거나 미세하거나

좋거나 나쁘거나 멀리 있거나 가까이 있거나 간에

나의 것이나 나라고 하는 자아가 아니라고 관찰해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진리를 깨달은 잘 배운 부처님의 제자는

오온에 대한 환상을 깹니다.

그리고 집착을 버리고 해탈을 합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해탈했음을 알고,

해야 할 일을 다 했음을 알고,

해탈을 위해서는 달리 해야 할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이것이 뿐나 장로가 아난다에게 설법한 내용입니다.


수다원인 아난다는 연기법의 원인과 결과를 깨달았습니다.

아난다는 위빠사나 수행을 하여 이러한 지혜를 얻었습니다.


그는 무명, 갈애, 집착, 업, 재생, 식 등이 인과관계라는

사슬의 고리를 이루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부처님의 제자들 중 다문제일인 아난다 존자는

지식에 있어서도 스승에게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난다는 대개 부처님의 전법 여행에 동행했고 모든 법문을 기억했습니다.

또한 일단 한 번 들은 법문은 그대로 되풀이할 수 있었습니다.


아난다가 없을 때 부처님이 하신 법문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들어서 기억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아난다가 배운 법은 8만 4천 법에 이른다고 합니다.


이때 통상적으로 8만 4천 법문이라고 할 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8만 2천이라고 하고

그리고 제자들이 말한 법을 2천이라고 해서 도합 8만 4천 법문이라고 말합니다.


아난다 존자는 뛰어난 기억력으로 유명했는데

유명대경 주석서에 따르면

아난다는 짧은 시간에 수백 개의 게송을 외울 수 있었다고 합니다.


불법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가진 부처님의 주요한 제자였던 아난다에게

연기법이 그다지 어렵지 않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오늘날도 삼장에 정통한 사람은

연기법의 인과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기법은 결과, 원인, 가르침과

경험적인 지혜인 통찰의 측면에서 볼 때

여전히 난해한 것이 사실입니다.


보통 깨달음에 이르기 전에는 빠리얏띠라고 하는

경장, 율장, 논장의 교학을 바탕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다음 단계로 빠띠빠띠라고 하는

사마타와 위빠사나 수행을 하는 단계를 거칩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빠띠웨다라고 하는

뚫어서 보는 통찰지혜로 도과를 얻는 일련의 과정이 있습니다.


이처럼 깨달음으로 가는 일련의 과정에는

반드시 난해한 연기법이 먼저 숙지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연기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들어도

그 뜻을 부처님의 수준으로 이해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지속적으로 반복해서

여러분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먼저 무명과 다른 원인의 결과로서 행을 이해하기가 대단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신과 물질에서 생기는 괴로움을

행복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명으로,

사람들은 이를 전도된 무명으로 알지 못합니다.


생각하는 것은 실재하는 자아라고 믿고

업의 형성력인 행이 무명의 결과라는 것을 모르며

노력하는 것은 자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무명의 결과로서의 선업과 불선업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전생의 행과 현생의 재생연결식 사이의 인과관계입니다.


마찬가지로 정신과 물질과 여섯 가지 감각장소,

육입이 식에 의해서 조건지어진다는 것도 참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파악하기 어려운 것은 연기에 포함되어 있는 원인입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자기 운명을 스스로 만들어 간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신이나 범천이 자신을 창조했다고 말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모든 것은 우연히 발생했다고 주장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의 주요 원인으로서의 무명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원인은 과보로, 보이지 않는 힘입니다. 이것을 지혜로 밖에 모릅니다.


또한 연기에 대한 부처님의 어떤 가르침은 무명에서 시작해서 죽음으로 끝납니다.

다른 가르침은 역순으로 전개됩니다.


또 어떤 가르침은 12연기의 사슬의 중간고리에서 시작해서 처음이나 끝으로 전개됩니다.

연기법의 이러한 다양한 설명은 그것을 더욱 더 이해하기 어렵게 합니다.


여러분!

연기법에 대한 통찰지혜를 얻으려면

실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인과관계의 사슬을 체험으로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연기를 위빠사나로 접근하여 공부를 하는 것이 반드시 전제되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바른 연기법을 숙지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연기법의 통찰지혜는

위빠사나 수행과 떨어져 따로 양립될 수 없는 과정 안에 항상 함께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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