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69

通達無我法者 2011. 1. 11. 22:0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한 인간이 살아온 과거와 살고 있는 현재와 앞으로 올 미래를 통 털어서

어느 때나 자아나 인격체로 보지 말고, 단지 원인과 결과로 보아야합니다.


과거의 내가 살았던 것이 아니고, 그 순간의 정신과 물질이 산 것입니다.

현재에도 내가 살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순간의 정신과 물질이 살고 있는 것입니다.

미래나 다음 생에도 내가 옮겨 가는 것이 아니고, 현재의 원인이 미래의 결과로 갑니다.


여기에 나라고 하는 것은 없고

단지 정신과 물질이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것이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라면

원인이 없을 때는 결과가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한 진실입니다.


우리의 몸이 아픈 것은 원인이 있어서 생긴 결과입니다.

어떤 것이나 결과를 존중하는 것이 관용입니다.


아픔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면 법을 보는 것입니다.

대상을 법으로 알아차리면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겸손해집니다.

겸손해진 마음으로 인해 치유능력이 향상됩니다.


이처럼 아픔을 받아들여서 알아차리는 것만이

새로운 원인을 만드는 가장 좋은 자세입니다.


그러나 몸이 아픈 것을 법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고통이 됩니다.

누구나 고통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탐욕이 일어나며,

없애려고 해도 없어지지 않아서 화를 냅니다.


모든 고통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더 증장됩니다.

이제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것인가?

아니면 고통을 없애려고 할 것인가?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되겠습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난다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선업도 감각접촉에서 생깁니다.

예를 들면 신앙의 대상은 믿음을 생기게 하고,

용서해야하거나 인내해야할 사람들은 우리의 인욕을 길러주고,

부처님과 아라한을 계속 생각하면 알아차림이 강해지고 자비로워집니다.


우리는 감각 접촉이 있기 때문에 볼 수 있으며,

이 접촉은 눈과 형상과 안식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안식과 형상을 구분합니다.

보통 사람들은 안식과 형상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지만,

부처님께서는 안식은 눈과 형상에서 일어나며,

감각접촉은 눈과 형상과 안식의 결합을 뜻한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이 결합이 바로 보는 것의 감각접촉으로, 

눈, 형상, 안식의 세 가지 부딪침으로 필요충분조건을 이룹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감각 접촉의 본성을 체험으로 깨닫습니다.

수행자는 보는 매 순간마다 보는 것을 알아차림으로서 집중이 개발되면,

‘봄’이란 원인이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

또는 누군가가 만들었거나 창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다시 말하면 봄은 눈과 형상을 원인으로 하고 안식을 그 결과로 하는

정신과 물질의 현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감각 접촉은 감각대상의 본성에 따라서

즐겁거나 괴롭거나 덤덤한 느낌을 생기게 합니다.


대상이 아름다우면 즐거운 느낌이, 못생겼으면 괴로운 느낌이,

못생기지도 사랑스럽지도 않으면 덤덤한 느낌이 됩니다. 


이 덤덤한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들지 않고,

심지어는 느낌으로 인지되지도 않지만,

자아가 있을 때는 받아들여집니다.


사실상 이 세 가지 느낌들은 자아나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감각 접촉에서 생기는 정신적 과정의 측면인 것입니다.


연기법을 이해한다는 것은

회의주의와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이런 벗어남은 수다원과를 얻은 수행자에게 꼭 필요한 특성이고

연기법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연기법에 대한 무명은 부처님, 법, 승가에 대한 의심을 일으키는 경향이 있습니다.

의심에는 다음과 같은 여덟 가지의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부처님에 대한 의심입니다.

이것은 부처님은 실제로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분이었을까?

아니면 제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믿도록 한 보통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됩니다.


둘째로 가르침에 대한 의심입니다.

도와 열반은 진정으로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의 소멸을 보장하는 것일까 하고 의심합니다.


셋째 승가에 대한 의심입니다.

진정으로 번뇌에서 벗어난 성자들은 있는 것일까?

전도된 인식과 의심을 극복한 수다원과는 절대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이 희미해진 사다함은 있는 것일까?

감각적 욕망과 성냄에서 완전히 벗어난 아나함은 있는 것일까?

그리고 모든 번뇌에서 벗어난 아라한은 과연 있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습니다.


네 번째 수행에 대한 의심입니다.

계를 지키고 알아차리는 수행은

더 높은 영적인 진보에 유익하고 도움이 되는 것일까 하는 의심을 갖습니다.


다섯 번째 과거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과거에 과연 존재했을까?

나는 과거에 왜, 그리고 어떻게 존재했을까?

나는 전생에 어떠한 사람이었을까?

나는 덩어리에서 생겨났을까, 아니면 자연 발생으로 생겨났을까?

하는 의심을 갖습니다.


여섯 번째 미래에 대한 의심입니다. 

나는 죽고 나서 존재할 것인가?

내생에 나는 어떠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갖습니다.


일곱 번째 과거와 미래에 모두 의심을 하는 것입니다.

복주석서에 따르면 이 의심은 삶의 수레바퀴의 과거와 미래 가운데에서

현재를 가리킨다고 합니다.

이 해석은 다음과 같은 빨리어 경전의 말씀과 일치합니다.


이 현생에서 자아에 대한 의심이 생긴다.

그러한 의심에서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가 있습니다.

나는 진정 나 자신인가?

자아는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만약 자아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어떤 종류의 자아인가?


그것은 큰가, 작은가?

왜 어떻게 자아가 존재하는가?

그것은 창조되었는가, 아니면 자연 발생으로 생겨났는가?


자아는 어디서 왔으며

마지막에 몸이 무너지고 난 다음에 어디로 가는 것일까?


이러한 의문은 과거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미래에 대한 다섯 가지 의심,

현재에 대한 여섯 가지 의심을 나타냅니다.


수행자가 자아나 나에 대한 모든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나게 될 때 

이러한 모든 의심을 극복하게 됩니다.

이것은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이라고 합니다.

연기를 이해하면 바로 이런 의심에서 해방되는 청정에 이르게 됩니다.


의심의 여덟 번째는, 많은 의심이 일어나는 마지막 주제는,

중생계의 인과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연기법입니다.


행(行)은 정말 참된 법에 대한 무명에서 비롯된 것일까?

재생은 정말로 업을 조건으로 일어나는 것일까?


정말 내생의 악업은 해롭고, 선업은 유익한 것일까?

모든 현상에 정말 원인이 있는 것일까?

모든 것은 원자와 전자가 우연히 결합된 결과가 아닐까?


이런 의심들은 연기법에서 설명하고 있는 인과 관계의 사슬에서

원인의 고리인 무명과 행과 그 결과인 식의 재생연결식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이러한 의심은 결국 그릇된 견해를 생기게 합니다.

연기와 모순 되는 그릇된 견해는 이런 의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자신의 지적 수준을 넘어 삶의 본성에 대해 추론하면

처음에는 의심이 생기지만 

나중에는 전도된 인식에 대해서 집착하는 회의주의자가 되어버립니다.

그런 회의주의자와 그릇된 견해는 연기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됩니다.

 

연기법을 분명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전도된 인식은 말할 것도 없고

의심도 갖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 분석하면 지구, 태양, 나무 등등의 무정물이 그렇듯이

중생도 원인과 결과의 복합체입니다.

우주를 지배하는 인과법은 창조나 우연발생에 여지를 두지 않습니다.


현대 과학은 생명 없는 물질계가 원인과 결과의 상호 작용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압도적인 증거를 제시합니다.


이는 생명이거나 마음이거나 물질이거나 간에

이 세상 모든 것은 조건 지어져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의 진리를 확인 시켜줍니다.


부처님께서는 사람의 내적 삶에 조건 지어진 본성을 강조하셨습니다.

물질계는 윤회계가 없고 재생과 괴로움을 받지 않기 때문에

불교에서는 외적인 무정물의 세계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오직 마음이 있는 유정물인 중생들에 대한 것들이 불교의 관심사입니다.


불교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이토록 중생입니다.

중생을 이루고 있는 정신과 물질은 수없이 많은 생을 거치면서

대부분 악처의 괴로움을 겪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신과 물질의 과정을 이해하고

지혜롭게 행동한다면 해탈에 이르는 도에 점점 가까이 나아갈 것입니다.


설영 아직 해탈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우리는 윤회에서 더 좋은 삶과 행복한 운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12연기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것은

번뇌를 완전하게 소멸시키는데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행의 원인으로서 무명과, 

재생의 원인으로서 업의 결과를 설명했습니다.

이제 재생연결식의 근원에 대해서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존재경에서

의도를 가진 선업과 불선업을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들판에,

식을 씨앗에,

갈애를 들판을 촉촉하게 하는 수분에 비유하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업의 들판에 식이라는 씨앗을 뿌려,  

갈애라는 수분이 있어서 자라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무를 심으려면 들판과 묘목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재생연결식은

업이라는 기름진 들판을 전제조건으로 합니다.


업은 재생의 잠재력을 생기게 하고, 앞선 식의 상태는 사라졌지만

재생의 잠재력은 정신과 밀접하게 남아있습니다. 

 

마치 초목이 아직 싹트지는 않았지만

적당한 조건이 갖추어지면 실제로 싹이 트는 것과 같고,

죄를 저지른 사람이 잠재적인 죄수와 같으며,

공장에서 두각을 나타낸 근로자가 그 공로를 치하하여 상을 받는 것과 같은

잠재적인 수상자인 것과 같습니다.


초목이 발아하려면 씨앗에 의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재생은 선하거나 불선한 식에 의존합니다.


선한 식이나 불선한 식이 일어나고 소멸하지만,

유사한 상태의 식이 끊어지지 않도록 흐르고 자극을 줍니다.


이런 작용은 뱀이 허물을 벗는 것처럼, 앞선 업식의 결과입니다.

그런 식(識)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업이나, 업의 표상이나, 태어날 곳의 표상에 중심을 둔 임종할 때의 마음입니다.


죽어가는 사람이 표상을 만나는 것을

업의 형성력을 조건으로 한 내생의 전조를 의미하는 현현의 구족이라고 합니다.

이 현현의 구족은 나타남이 빠짐없이 갖추어져 있다는 뜻입니다.


죽음의 마음이 재생연결식으로 전이됨을 나타내는 점에서

씨앗이 싹터 초목으로 성장하는 것과 어느 정도 유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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