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70

通達無我法者 2011. 1. 12. 00:07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깨달음의 세계관은 우주적인 것이 아니고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의 세계를 말합니다.


몸과 마음을 벗어난 것은 지혜수행의 대상이 아니라서

궁극적 진리를 얻을 수가 없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가

감각 대상인 색, 성, 향, 미, 촉, 법과 부딪쳐서 이것을 12처라고 하며

다시 여섯 가지 정보를 마음이 아는 것이 18계입니다.

그래서 6문에 6경이 부딪쳐서 6식을 하는 것입니다.


18계는 몸과 마음으로 인식할 수 있는 세계이며,

증명할 수 있는 영역이라서 깨달음의 세계입니다.


18계를 일체, 전부, 모든 것이라고 하는데

부처님께서 모든 것을 알았다는 것이 바로 18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직접 인식할 수 없고, 스스로 증명할 수 없는 세계는

실재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것은 상상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인식의 범주를 벗어난 것은 상상의 세계라서

실재를 추구하는 깨달음의 세계관이 아닙니다.

우주적인 세계는 창조주나 신이라고 하는 초월적 대상의 영역이므로

불교의 깨달음의 세계와는 무관합니다.


몸과 마음에 실재하는 것 속에 무상, 고, 무아의 법이 있으며,

이러한 몸과 마음의 대상에서만 깨달음의 지혜가 납니다.


몸과 마음이 아닌 밖으로 나간 대상에서는

법의 성품을 바로 알 수가 없어서 사유(思惟)가 됩니다.


밖에 있는 대상을 볼 때는

내가 본다고 하는 유신견을 가지고 보기 때문에

법을 보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도 깨달음을 얻을 때

낙엽이 떨어지는 자연현상을 보거나,

한 인간의 죽음을 보고서 깨달음을 얻지는 않으셨습니다.


깨달음을 얻은 역대 모든 성인들은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려서

비로소 궁극의 열반을 성취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지난 시간에 이어서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씨앗이 초목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물이 필요합니다. 

물 또는 적어도 공기 중에 습기가 없으면

씨앗은 싹이 트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업이 내 생에 토대를 이루고 있다고 하더라도

갈애가 없으면 재생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아라한의 경우는 범부들처럼

짓는 업이 있고 식이 있다는 점에서 재생의 조건이 있지만

갈애가 소멸했기 때문에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들은 행위는 있지만,

갈애가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없는 행위이기 때문에,

받을 것이 없어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윤회가 끝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윤회가 끝난다는 것은

연기가 회전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갈애는 아라한이 아닌 사람에게 내재해 있으며,

범부에게는 가장 강력합니다.


갈애는 감각 대상을 즐겁고, 매력적이고, 바람직한 것으로 여기게 합니다.

갈애는 즐거움, 행복, 희망이라는 전도된 인식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갈애는 좋은 것을 기뻐하고, 행복과 번영을 인생의 주목적으로 삼게 합니다.


갈애는 다른 마음 상태에 이른, 업의 마음을 자극 합니다.

임종이 다가올 때 이 마음상태가 표상을 일으킵니다.

죽어가는 사람은 즐거운 표상을 보고 기뻐하며 활기차고 유쾌해집니다.

이것은 업의 씨앗이 싹트기 시작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는 괴로운 표상들을 환영하지 않겠지만, 

이 표상들도 자신과 어떤 관계가 있습니다.

이러한 자신에 대한 집착도 업이라는 씨앗을 싹트게 합니다.


그러므로 보통의 사람인 경우에는

재생은 업과 업에 관련된 의식, 갈애를 조건으로 일어납니다.


재생의 기름진 토양인 업은 임종의 표상에서 부각되고,

이러한 표상들과 죽어가는 사람이 보이는 관심으로

씨앗이 싹트는 것이 보입니다.


그래서 죽은 다음에

전생에 마지막 순간의 마음의 상태를 조건으로 재생연결식이 일어납니다.


재생연결식은 전 생애와 관계된 정신과 물질, 여섯 가지 감각장소

그리고 감각 접촉, 느낌과 그들 상호관계를 작동하게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재생연결식을 현생의 씨앗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재생연결식은 정신과 물질과 피할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습니다.

몸 안에 있거나 바깥에 있거나 간에 모든 정신과 물질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우리는 괴롭습니다.


하지만 무명으로 인해서 우리는 괴로움을 보지 못하고

전도된 인식과 집착을 일으키며, 감각적 대상을 끊임없이 추구하고

이로써 새로운 존재로 태어납니다.


새로운 존재의 토대인 재생연결식과 함께

그 재생연결식의 토대인 물질적인 몸과 감각접촉,

느낌과 같은 마음의 작용들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재생연결식이 사라지면 탐욕, 분노, 만족, 인욕 등과 같은

선업이나 불선업을 촉발시키는 다른 마음의 작용들이 뒤이어 일어납니다.

이 마음의 작용들이 이번에는 앉음, 일어섬 등의 육체적 동작들에 이르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경전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세상을 이끄는 것은 마음이다.

세상은 마음에 의해 끌려간다.

바로 마음이 그 모든 것 위에 있어 무엇이든 원하는 대로 한다."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세상은 중생계를 가리킵니다.

그리고 마음은 중생을 바르거나 나쁘게 인도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이 세상은 마음의 미세한 계층을 말합니다.

중생들이 사는 계층이나, 마음의 계층은 동일합니다.


이 세상에 여러 가지의 계층이 있다는 것은

사실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사람들의

많은 미세한 마음들이 있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래서 세상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마음에 의해서 뒤따른 몸입니다.


그래서 불교의 세계관을 감각기관과 감각대상,

그리고 그것을 아는 여섯 가지의 마음 18계를

불교의 세계관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믿음과 계행 등을 닦는 선한 사람의 마음은

선행을 하도록 이끌 것이고,

법문을 듣고 위빠싸나 수행을 하게 할 것입니다.


마음은 그를 높은 중생계에 태어나게 하던지,

열반이라는 궁극의 목표로 인도할 것입니다.


반면에, 못된 사람의 마음은

감각 대상을 추구하고 악행을 하게 할 것이고

죽은 다음에 악도에 태어나서 더 큰 괴로움을 받도록 할 것입니다.


이 게송은 마음이 모든 정신과 물질을 지배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는 식을 조건으로 감각접촉 등의 정신과 물질현상이 일어난다는

연기의 가르침과 일치합니다.


눈에서 일어나는 감각접촉에 대해서 이미 설명했으니

이제 듣는 감각접촉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보는 경우와 마찬가지로 듣는 것도

귀, 소리, 이식(耳識)의 세 가지를 포함합니다.

귀와 소리 없이 듣는 것은 불가능 합니다.


과학자들은 음파가 빠른 속도라고 말합니다.

이는 자연적인 소리의 속도이고,

라디오 방송은 한순간에 전 세계에 소리를 보낼 수 있습니다.


소리가 귀와 부딪힐 때에는 거울에 비추는 것과 같이 들림이 있게 됩니다.

하지만, 귀의 본래 주인이 소리를 듣는다고 생각하면 잘못입니다.

귀의 감성의 물질은 끊임없는 흐름에 있으며,

관련된 물질은 항상 일어나고 사라지고 있습니다.

귀의 감성의 물질은 흐르는 시냇물에서 바뀌고 있는 물과도 같습니다.


물질의 흐름과 음파가 맞부딪힘으로써

이식(耳識)을 촉발하는 것입니다.


이식(耳識)은 한순간만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 다음에 소리를 계속해서 받아들이는 마음과

조사하는 마음과 결정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이 각각의 마음은 한순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매우 빠른 속도로 일곱 개의 속행이 연달아 일어나고

그 다음에 소리에 초점을 맞춘 두 개의 등록하는 마음이 일어납니다.

그런 것들이 들림에 포함된 인식 과정입니다.


하나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귀와 소리를 토대로 하여 이식(耳識)이 새로워집니다.


그래서 사념처 위빠사나 수행자들은

들음이 귀와 소리를 조건으로 있다는 것을,

그리고 거기에는 듣는 사람이나 존재가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사실, 수행자는 볼 때보다는 들을 때

인과관계를 훨씬 더 잘 압니다.


이와 같이 들음이란 귀와 소리와 이식(耳識)의 결합을 뜻합니다.

소리와 맞부딪침이 바로 귀의 감각 접촉이며

명상하는 수행자에게는 아주 이것이 분명하게 보입니다.


어떤 수행자는 너무 민감한 나머지 거친 말을 들을 때

마치 그 소리가 귀를 향해 맹렬히 돌격해와

사정없이 후려치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수행자는 낙엽이 떨어지는 소리에 깜짝 놀라기도 합니다.


귀에 들려오는 다양한 소리 가운데

듣고자하는 소리를 골라서 귀를 기울이면

그 감각접촉은 두드러집니다.


크고, 거칠고, 귀청을 찢는 소리는

듣지 않으려고 해도 듣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즐겁지 못한 대상은 안 볼 수 있어도,

소리는 그렇게 무시해버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듣는, 즐겁거나 괴로운 소리에 따라서

우리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을 갖습니다.


노래와 감미로운 목소리는 귀에 들리는 것을 환영하지만,

거친 소리와 욕설은 듣기가 싫습니다.


평범한 소리를 들을 때에는

즐겁지도, 괴롭지도 않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경우에는 우리는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때 알아차리지 못하는 느낌을 덤덤한 느낌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매우 미세한 느낌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 많은 것들과 부딪칩니다.


제가 미얀마에서 비구계를 받고 수행을 할 때에 매일 아침 탁발을 나갑니다.

탁발을 나갈 때에도 일정한 비구로써의 수칙이 있습니다.


먼저, 멀리 보지 않고 뒤돌아보지 않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앞에 있는 비구를 보거나 서너 걸음 앞을 봅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몸과 마음에 집중합니다.

또한, 밥 공양을 올리는 보시자들에게 말을 걸거나 쳐다보지 않습니다.

그래서 말을 걸거나 쳐다보는 것을 통해서 일어나는 접촉을 차단하는 것입니다.


이토록 위빠싸나 수행은 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와서 부딪칠 때

반드시 알아차림을 통해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무지는 걱정을 사서 즐깁니다.

그러나 지혜는 걱정을 끊어 버립니다.


무지는 긴장하고 엉겨 붙으며,

지혜는 이완하고 소멸합니다.


무지는 몰라서 당하고 살지만,

지혜는 알아서 당하지 않고 삽니다.


무지는 괴로움을 원하며

지혜는 고요함을 원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수행자는 어떤 대상과 접촉할 때에

온전한 알아차림을 가지고,

감각적 욕망이나 극단적 고행의 양극단이 들어오지 않도록,

그래서 항상 중도적인 마음으로

평안과 고요를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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