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느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108번뇌도 사실은 모두 느낌입니다.
그러나 어떤 느낌이거나 알아차리면
단지 하나의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에는 알아차리지 못한 느낌과 알아차린 느낌이 있습니다.
알아차리지 못한 느낌은 번뇌이고, 알아차린 느낌은 지혜입니다.
느낌이 아무리 많더라도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게 되면
어떤 느낌이거나 단지 하나의 느낌일 뿐입니다.
느낌은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여기에 다른 어떤 외부적 힘도 개입되지 않습니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느낌은 항상 하지 않고, 매순간 변하며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은 어디서 온 것이 아니고
몸과 마음이라는 조건에 의해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에 사라져서 항상 변하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느낌을 알아차리면 번뇌가 하나의 느낌일 뿐이며,
느낌을 통해서만이 무상과 고와 무아라는 법을 알게 됩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갈애가 없으면 연기가 회전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반응하지 않으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이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알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느낌에서 무상, 고, 무아가 있다는 것을 알면
이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길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오늘도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나는 것에 관해서
계속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맛의 감각접촉 뒤에는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따라옵니다.
좋은 음식을 먹으면 즐겁고 그 음식을 좋아하지만,
나쁜 음식이나 어떤 약의 쓴 맛은 싫어합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느낌은 덤덤합니다.
이는 덤덤한 느낌이지만 그 먹는 기회는 선업의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운 측면을 가지고 있으며 집착에 이릅니다.
그러나 매순간 정신과 물질을 주시하여 계발된 집중을 가진 수행자는
모든 감각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으로 체험해서 알게 됩니다.
감촉, 느낌 등의 또 하나의 근원은 몸의 문이라는 감성물질입니다.
신식(身識)은 몸과 감촉 대상에서 생깁니다.
몸의 감각접촉은 몸과 감촉대상과 신식의 결합에서 생기고
감각접촉은 느낌을 조건짓습니다.
이것에 대해서 좀 설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먹는 것과 같은 각각의 물질적 사건은
눈, 귀와 같이 단지 해당하는 기관과 관계가 됩니다.
그들과 관련된 식은 또한 머리의 어느 일정부분 위에서만 일어납니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적 사건들은 위치와 지속시간에서 제한이 있습니다.
먹을 때는 오직 맛 뿐만을 알고,
들리는 것이 있을 때는 오직 들리는 것만 압니다.
하지만 신식은 모든 부위에 있습니다.
여러분이 언제 어느 때나 몸의 어느 한 곳에서
감촉을 생각할 때는 언제나 그 감촉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촉의 영역은 광범위하고 그 지속시간은 깁니다.
위빠사나의 수행의 초보자는 감촉을 알아차리는 것이 제일 중요하므로
여기에 대해서 조금 더 알아봐야 하겠습니다.
감촉을 받아들일 수 있는 미세하고 민감한 감성물질이
몸 전체에 두루 퍼져있습니다.
그것은 몸의 모든 건강한 부위에 존재하기 때문에
외부나 내부 물질과 맞부딪침으로써
몸의 어디에서든지 신식(身識)을 생기게 할 수 있습니다.
이 물질적 현상은 무상하고 순간에서 순간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구로서 들어가는 빛을 내는 전기의 에너지와 같은 것들입니다.
이렇게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상태에서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몸의 감성의 물질이 외부나 내부의 물질과 충돌하면
그것에 의해서 신식이 생깁니다.
보는 것과 듣는 것 등과 마찬가지로
신식도 감촉대상을 조사하는 마음, 받아들이는 마음,
등록하는 마음과 같은 심찰나의 연속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이 마음은 너무 빨리 일어나고 사라지기 때문에
신식은 단 하나의 심찰나만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뿐입니다.
몸의 감촉을 아는 마음은 항상 있습니다.
마음이 몸 이외의 다른 대상에 몰두하고 있을 때만 분명하지 않을 뿐입니다.
그러나 몸에 주의를 기울이면 어딘가에는 몸과 바닥의 접촉,
몸과 옷의 접촉 등과 같은 감촉이 틀림없이 있습니다.
몸의 물리적 접촉에 대해 알아차리는 수행자는 그 조건을 압니다.
몸의 물리적 접촉은 원인이 없는 것도, 창조된 것도 아니며
사실상 감촉대상과 건강한 상태의 감성물질의 결합을 의존한다는 것을 압니다.
감촉의 대상은
땅의 요소, 불의 요소, 바람의 요소라는 세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땅의 요소는 견고함, 혹은 거침의 특성이 있으며
이 특성은 분명한 감촉을 느끼게 하는 것으로,
몸의 일부에 주의를 집중하거나 조사하면 즉시 드러납니다.
부드러움과 거침은 또한 땅의 요소로 간주되는데
부드러움과 거침은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둘투둘한 표면은 그보다 거친 많은 것들과 비교했을 때 부드러운 대상이라고 하지만
사람의 눈처럼 부드러운 부위에 맞닿았을 때는 거친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러므로 부드러움과 거침은 종류가 다른 것이 아니라
정도에서 다를 뿐인 상대적인 용어입니다.
부드러움과 거침은
땅의 요소의 특성인 견고함을 나타냅니다.
주석서에 따르면 땅의 요소의 핵심인 견고함은
다른 요소들이 의지해야 하는 거처인데,
이는 마치 모든 대상이 땅에 의지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를 들면 쌀가루를 물로 반죽하면 덩어리로 변하게 되는데
그렇게 되면 견고함, 즉 단단한 성질이 훨씬 더 많아지기 때문에
그것을 땅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분말의 입자는 물의 요소에 의해 서로 결합되고 뭉쳐집니다.
그 덩어리는 또한 열이나 차가움과 관련된 불의 요소와
딱딱함과 뻣뻣함을 지원하는 바람의 요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쌀가루로 만든 덩어리는
네 가지 요소를 모두 함유하고 있고
그 중에서도 땅의 요소는 다른 요소들의 기반입니다.
그래서 마치 쌀가루가 물의 요소 등을 지탱해주듯이
땅의 요소는 그것과 관련된 물질을 지탱해줍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의 역할입니다.
그런 식으로 수행자에게는
땅의 요소가 다른 요소들의 기반으로 보입니다.
이것이 땅의 요소에 나타남으로 무거움과 가벼움입니다.
아비담마 칠론의 하나인 법집론과 그 주석서인 아따싸리니는
땅의 요소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물건을 옮길 때 무거움과 가벼움을 느낀다면
그 느낌 혹은 생각은 땅의 요소의 나타남에 포함된다는 것입니다.
수행자는 거침이나 부드러움이나 반드러움을 통해서 땅의 요소의 특성을 압니다.
수행자는 땅의 요소가 다른 물질의 기반이 된다는 것을 알 때 그 기능도 알게 됩니다.
또 수행자는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에 있고, 그것은 다른 물질을 생기게 하고,
무거움이나 가벼움이라고 알 때 땅의 요소가 나타나는 것을 압니다.
수행자가 다른 물질은 땅의 요소에 의존해있고
땅의 요소는 다른 물질을 지탱하고,
또 땅의 요소는 무거움과 가벼움이라고 알 때 그것이 나타남이라고 압니다.
그렇게 땅의 요소를 특성과 역할과 나타남으로 아는 것은
진리의 깨달음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뜻합니다.
그렇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땅의 요소와 접촉할 때
일반적으로 손과 발과 옷과 사람 등으로 이해합니다.
이러한 사고방식은 잘못된 것으로
수행자는 사념처 수행으로 진실을 깨닫습니다.
우리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 있는 땅의 요소는,
그 특성은 다른 물질이 지대에 의존해 있다는 것이고
역할은 다른 물질을 지탱하는 것이고,
땅의 요소의 나타남은 무거움과 가벼움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우리가 땅의 요소를 느낌으로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불의 요소는 열을 뜻합니다.
몸의 어떤 부분이 뜨겁고 눌려있기 때문에
자세를 바꿀 때 불의 요소가 두드러집니다.
차가움도 약한 불의 요소의 일종입니다.
어떤 물체는 다른 것에 비해 뜨겁거나 차갑습니다.
나무그늘은 태양의 열기에 비해서 서늘하겠지만
동굴이나 집의 내부에 비해서는 뜨겁습니다.
항아리 속의 물은 노천에 있는 물에 비해서는 시원하겠지만
얼음물에 비하면 뜨겁습니다.
뜨겁고, 따뜻하고, 차가운 것은
본질적으로 불의 요소를 뜻하는 상대적인 용어일 뿐입니다.
불의 요소인 열은 성숙과 성장에 꼭 필요합니다.
열의 역할은 유기체를 성숙케 하고 숙성하게 합니다.
나무, 건물, 대지, 바위 등이 낡아가고 쇠퇴하는 것 역시 태양 때문이고,
흰 머리카락, 이가 빠짐, 주름살, 다른 노화의 징후가 생기는 것은 몸의 열 때문입니다.
열이 많으면 성숙의 과정은 더욱 더 빨라집니다.
불의 요소는 물질을 부드럽게 하고 유연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뜨거움을 알아차리면 부드럽고 느슨한 불의 요소를 깨닫게 됩니다.
열이나 차가움이 몸 안에서 드러나면 위빠사나 수행자는
불의 요소를 그 특성으로 아는 것입니다.
불의 요소가 사물을 부드럽고 유연하게 한다는 것을 알면
그 역할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를 얻어서
불의 요소를 손, 남자, 여자 등과 같은 본질과 실체로 생각하는
전도된 인식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바람의 요소는 뻣뻣함과 경직됨의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똑바로 앉아서 등을 펴고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뻣뻣함을 발견할 것입니다.
다시 발을 펴고 마음을 발에다가 고정시켜 보십시오.
그러면 뻣뻣함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앉아있는 것을 정신적으로 주시하면
특성으로써 바람의 요소를 알게 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자아나 영원한 것이 아니라
그냥 뻣뻣함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바람의 요소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이러한 통찰지혜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수행자는 통찰지혜가
반드시 뻣뻣함이라는 실체에 국한할 필요는 없습니다.
실체나 자아 등에 대한 관념이 마음에 끊임없이 떠오릅니다.
왜냐하면 보통 사람은 초기에 집중력이 약해서
마음을 자유로이 방황하게 내버려 두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고요함이나 통찰지와 상충하고
정신적 진보를 방해하는 감각적 욕망이나 다른 장애들에 의해 늘 휘둘립니다.
그 결과로 마음은 근본요소인 사대들의 실체에 고정되지 않습니다.
어떤 스승들은 모든 관념적인 개념은
처음부터 떨어져 나간다고 믿게끔 하였지만 이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초보 수행자가 장애로부터 자유롭고,
마음과 견해가 청정해지는 것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님에게 직접 법을 듣고 성스러운 도를 성취한 사람들은 예외이겠지만
그렇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경우에는 그러한 성취를 생각할 수가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을 한다고 처음부터 통찰지가 생기지는 않습니다.
정신과 물질을 관찰하는 동안 수행자가 집중력이 강해져서
망상할 여지가 거의 없어지면 지속적으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이렇게 마음이 청정해진 단계가 되어야
정신과 물질의 진정한 본성에 대한 통찰지혜가 생깁니다.
그렇게 된 다음에도 소멸의 지혜를 얻기 전까지는
관습적인 개념들이 좀처럼 떨어져 나가지를 않습니다.
그리고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한 지혜의 초기 단계에서
수행자는 탑의 난간 위에 있는 광명,
꽃이나 바다 속의 물고기와 거북이를 보려하는 경향이 있다고
청정도론에서는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알아차릴 대상인 정신과 물질,
그리고 알아차리는 마음이 차례대로 사라지는 것을 발견할 것입니다.
청정도론에서 주의력은 소멸, 사라짐, 무너짐에 모아져 있다라고 설하듯이
모양, 형태 등과 같은 관습적인 개념들이 더 이상 일어나지를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초기에 자신이 알아차리고 있는 대상만을
바르게 알아차리고 있으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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