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초기불교산책·각묵스님

팔정도④ - 팔정도가 중도다

通達無我法者 2011. 1. 13. 21:19

 

 

 

 

中道, 팔정도 실천체계로 이해해야

 

부처님 최초의 설법인 <초전법륜 경>(S56:11)에서 보듯이 팔정도가 바로 중도다. <초전법륜 경> 뿐만 아니라 37보리분법 전체가 중도의 내용으로 나타나고 있는 <나체수행자 경>1/2(A3:151∼152)를 제외한 모든 초기불전에서 중도는 반드시 팔정도로 설명되고 있다. 물론 37보리분법도 팔정도가 핵심이다. 이처럼 초기불전에서는 팔정도를 중도라고 천명하고 있지 그 어디에도 반야.중관학파의 기본 가르침인 <중론>에서 주장하는 공.가.중 삼관(空.假.中 三觀)의 중을 중도라 부르지 않는다.

 

대승불교에 익숙한 우리는 중도하면 일.이.거.래.유.무.단.상(一.異.去.來.有.無.斷.常)을 여읜 것으로 정의되며 길장(吉藏)스님이 <중관론소>(中觀論疏)에서 주창한 팔불중도(八不中道)나, 공.가.중(空.假.中)으로 정리되는 <중론>의 삼제게(三諦偈, 24:18)를 먼저 떠올리지만 초기경에서의 중도는 명명백백하게 팔정도이다.

 

특히 삼제게는 연기(緣起)적 현상을 공.가.중으로 통찰하는 것을 중도라고 설파하고 있기 때문에 <중론>에서 말하는 중도는 연기에 대한 통찰지이며 이것은 지난 호에서 보듯이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正見)의 내용이다. 그러므로 용수스님을 위시한 중관학파에서 주창하는 중도는 팔정도의 첫 번째인 정견을 말하는 것이지 팔정도로 정의되는 실천도로서의 중도는 아니다.

 

필자는 CBETA로 ‘中道’를 검색해보았다. 아함 등 초기불교에 관계된 한역경전들을 제외한 여러 대승의 한역 경전과 논서들에서 중도는 <중관론소>(中觀論疏)의 팔불중도를 뜻하거나 역시 <중관론소>의 원리이변명위중도(遠離二邊名中道, 양변을 여읜 것을 중도라 한다)나, <법보단경>의 즉리양변(離兩邊, 양변을 여읜 것)이나, 쌍리양변명위중도(雙離兩邊名爲中道, 양변을 둘 다 여읜 것을 중도라 한다)나, <중론송>의 삼제게를 설명하는 산문에 나타나는 이유무이변고명위중도(離有無二邊故名中道, 유무의 양변을 여의었기 때문에 중도라 한다) 등등으로 나타나지 어디에도 중도를 팔정도로 설명한 곳은, 필자가 전체를 다 찾아보지 않은 탓인지는 모르지만, 아직 보지 못하였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뿌리’다

중도는 철학이 아니라 ‘실천’

 

물론 이것은 반야.중관 계열의 경론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유식 계열과 여래장 계열과 선종 계열의 경론들도 그러하다. 심지어 빠알리 주석서들까지도 유무의 양극단을 여읜 중간(中, majjha)을 중도(中道)로 설명하는 곳이 나타나기도 한다.(SA.ii.36)

 

그러므로 중도를 유무중도나 고락중도나 팔불중도로 이해하는 것은 후대 모든 불교에 다 적용되는 시대적인 상황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요즘은 초기불교가 한국에 급속히 뿌리내리면서 중도는 팔정도라고 인정하는 분들이 점차 많아지는 것 같아서 참으로 다행이다. 초기불교는 불교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이제는 중도를 견해나 철학으로만 보지 말고 부처님께서 고구정녕히 말씀하신 팔정도라는 실천체계로 이해해서 중도를 실천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 필자가 거듭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중도는 철학이나 견해가 아니라 실천이다. 우리는 중(中)의 의미를 철학적 사유에 바탕하여 여러 가지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그러한 설명은 오히려 실천체계로서의 중도를 관념적으로 만들어버릴 위험이 크다. 중도가 팔정도인 이상 중도는 부처님께서 팔정도의 정형구로써 정의하신 내용 그 자체를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고 강조하고 싶다.

 

 

각묵스님  / 초기불전연구원 지도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