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불교/12연기와 위빠사나·묘원법사

12연기와 위빠사나/143

通達無我法者 2011. 3. 11. 21:05

 

 

  

 

안녕하십니까? 묘원입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는 것은

하루를 마무리하는 중요한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면 잠을 잘 때 숙면을 취할 수 있게 되어 많은 이익을 얻습니다.

만약 이러한 알아차림 없이 자게 되면 하루에 있었던 일들에 대한 기억을 가지고 잡니다.


또한 잠을 잘 때는 특별한 욕망을 가지고 자지 않기 때문에

긴장하지 않게 되어 집중력이 생깁니다.


잠들기 전에 알아차리면 죽을 때와 같은 상황을 경험하는 것으로

이는 잘 죽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죽을 때의 마지막 마음이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재생연결식으로 이어지므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잠자리에서 알아차리는 수행은

먼저 ‘지금 무슨 마음으로 잠자리에 누웠는가’ 하고 알아차리십시오.

그리고 괴롭거나, 미워하는 마음이 있거나, 불안한 마음이 있거나,

어떤 마음이 있거나 ‘그냥 있네!’ 라고 알아차리십시오.


마음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알아서 어떤 조치를 취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냥 있어서 아는 것입니다.


새로 알아차리는 마음이 생기면 있던 마음은 사라지고

새로운 마음이 일어난 것이므로 이것으로 된 것입니다.


잠자리에 누워서 현재의 마음을 알아차린 뒤에는

아랫배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움직임을 조용히 지켜보십시오.

호흡이, 움직임이 희미해질 때는 희미한 상태로

계속해서 알아차림을 유지하면서 잠에 드십시오.


만약 알아차리는 힘이 생겨서 잠이 달아나면

누운 채로 알아차리거나 일어나서 좌선을 하십시오.


잠을 자지 않아서 큰일 났다는 마음이 일어나면

그 마음을 알아차리고 나서 정진을 계속하십시오.

자기 전의 알아차림은 하루를 마감하는 매우 중요한 수행의 순간이기도 합니다.


수행자 여러분!

제 23장, ‘범부와 아라한에게 느낌이 미치는 영향’ 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느낌은 머리카락, 손톱, 발톱, 피부, 각질 등을 제외한 몸 전체에서

항상 어느 순간에나 나타납니다.


느낌과 마음은 동시에 발생하는 구생법으로서

함께 일어나서 함께 존재하고 함께 소멸합니다.

이처럼 오온은 분리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아는 것은 모두 이러한 오온들이 작용해서 아는 것입니다.


사성제의 진리를 잘 알지 못하는 어떤 범부가 나무뿌리에 걸려서 발을 삐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인 아픔으로 괴로워할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 고통을 받고,

또한 다시 아픔이 낫기를 간절히 바라는 갈애로 인해서 고통을 겪습니다.


그는 정신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한 것뿐만 아니라,

빨리 낫기를 바라는 갈애가 일어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무명입니다.


이렇듯 범부가 느낌으로 괴로워하는 것은 네 번이나 창에 찔린 것과 같습니다.

첫째, 그는 통증이라는 육체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으로 인해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창에 한 번 찔린 것입니다.

둘째, 그는 정신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느낌이 진행하여 두 번째 창에 찔린 것입니다.

셋째, 그는 고통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욕망인 갈애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이것이 세 번째 창에 찔린 것입니다.

넷째, 정신적 괴로움과 갈애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무명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사실은 네 번이나 창에 찔린 사람으로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범부는

첫째, 육체적 아픔의 화살을 맞습니다.

둘째, 정신적 아픔의 화살을 맞습니다.

셋째, 갈애로 인한 욕망의 화살을 맞습니다.

넷째, 무명의 화살을 맞은 것인데,

원래 괴로움이 있는데 갈애가 일어난 것으로 인해서

이것을 없애려고 하기 때문에 무명의 화살을 맞은 것입니다.


이렇게 한 번 일어난 느낌으로 인해 네 번의 화살을 맞고 계속해서 네 번의 화살을 더 맞습니다.

네 번이 한 번으로 그친 네 번이 아니고, 연속적으로 네 번씩 화살을 맞게 되어서

우리는 슬픔과 비탄에 빠지고 자살을 하거나, 자기를 학대 하거나, 고통에 떨어지기도 합니다.

모두 느낌이 진행되어서 나타난 현상의 결과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이 나의 느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느낌의 질곡에서부터 벗어나질 못합니다.


아라한의 경우는 느낌으로 고통을 받을 때,

단지 육체적으로만 고통을 받을 뿐 정신적인 고통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은 이미 도과에 의해서 정신적인 괴로움을 근절하고 뿌리 뽑았기 때문입니다.

성자들이 성취한 열반은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불타버린 정신적 완성의 단계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부처님께서는 전지(全知), 전선(全善)하시지만 전능(全能)하지는 않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모든 것을 선한 마음으로 하십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마음대로 행할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지혜가 나시고, 육신통까지 계신 분인데,

전능하지 않다는 것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지,

타인의 업에 개입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누구나 자신이 지은 행위의 결과는 자신이 받기 때문에

다른 생명의 업에 개입할 수가 없습니다.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할 수 있으면 초월적 존재입니다.

부처님께서 지혜로 보시니 그런 존재는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자신의 번뇌를 해결한 지극히 자연스러운 한 인간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몸소 가신 길을 우리에게 이 길로 오라고 열어 보이신 것입니다.


이것이 7청정과 16단계의 위빠사나 수행의 지혜입니다.

이 길은 상상의 길이 아니고 실재하는 길이며,

관념의 길이 아니고 실재하는 진실한 길입니다.

그래서 이 길은 증명할 수 있으며 실천할 수 있는 길입니다.


아라한은 전지전능하지 못하고 오직 전선(全善)합니다.

아라한은 모든 것을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위없는 깨달음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을 선한 마음으로 합니다.

그래서 전선(全善)합니다.


아라한도 부처님처럼 전능하지 못하며

자신의 번뇌를 불태워 자유를 얻으신 분입니다.


범부는 전지, 전능, 전선(全善)하지 못합니다.

무명에 눈이 멀어 사물의 이치를 알 수가 없으며,

완전히 선하지 못하고 부분적으로 선합니다.

물론 전능하지 못해 자신의 마음대로 할 수가 없습니다.

범부는 습관대로 살며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더 많은 삶을 삽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몸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 육체적인 아픔을 겪습니다.

인간이기 때문에 육체적인 통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단지 몸만 아플 뿐이지 마음까지 아프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육체적 느낌으로 그치지 정신적 느낌으로 진행시키지 않습니다.


이미 정신과 물질을 구별하는 지혜로부터

무상(無常), 고(苦), 무아(無我)의 지혜까지 모두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를 해친 사람에게도 증오하는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단지 일어난 사건을 원인과 결과로 보고, 자신의 육체적인 아픔만 알아차립니다.

그래서 새로운 원인을 만들지 않아서 윤회가 끊어집니다.


부처님이나 아라한은 갈애가 끊어졌기 때문에

더 이상 바라는 것이 없어서 더 이상 받을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윤회가 끊어지는 것입니다.

이 분들은 성스러운 지혜가 나서, 가야 할 길을 아시는 분들입니다.


범부는 몸에 통증이 일어났을 때 육체적인 아픔과 함께 정신적인 아픔을 함께 느낍니다.

몸이 아프면 즉시 마음까지 아파서 괴로움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그리고 외부나 내부로부터 온 자극에 대해서 미워하는 마음을 갖습니다.

자아가 있기 때문에 나와 남이 있다는 생각으로 삽니다.


느낌을 느낄 때  단지 느낌으로 알지 못하고

항상 일어난 느낌을 더 키워서 새로운 원인을 일으켜 윤회를 거듭합니다.

그래서 원수를 갚으려 하고 미움과 증오를 끊임없이 계속합니다.


범부는 계속해서 갈애를 일으키기 때문에

바라는 것이 많아 스스로 윤회를 선택합니다.

범부는 성스러운 지혜가 나지 않아 가야할 길을 모릅니다.

그래서 윤회의 세계를 떠돌며 괴로움뿐인 끝없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바로 범부입니다.


이제 우리는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의 성자가 되어서

느낌을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성자나 성자의 제자들에게 육체적으로 즐겁거나 괴로운 느낌이 일어나고 사라질 때,

이것을 알아차려서 느낌으로 인해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난다거나

느낌으로 인해 갈애가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대신 느낌을 원인으로 지혜가 일어나도록 해야 합니다.


달리 말하자면 이때의 느낌은 정신적 괴로움이나 갈애의 원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혜의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느낌을 있는 그대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느낌은 무상하고 영원하지 않으며 오래 지속되지 않고

연속적인 두 순간의 동일한 모습으로 유지될 수 없습니다.


미혹한 상태에서는 느낌이 오래 지속되며 그치지 않는 고통이라고 믿어집니다.

수행 중에 육체적으로 일어난 괴로운 느낌을 경험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은 창에 한 번 찔린 것으로 비유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매 번 창에 찔릴 때마다 반드시 이에 따른 조처가 따라야 합니다.

즉, 육체적인 고통으로 인해 정신적 괴로움이 일어날 때마다

일어남과 사라짐에 대해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렇게 일어남과 사라짐을 즉시 알아차리면

정신적인 괴로움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슬픔, 비탄, 번뇌 또한 일어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식으로 연기(緣起)가 중간에서 끊어집니다.

연기가 중간에서 끊어졌다는 사실은 연기(緣起)가 끝에서도 끊어지고

시작부터 끊어진다는 것을 말합니다.


무명은 갈애, 근심, 비탄, 정신적 괴로움 등 다른 요소들과 함께 일어나고,

함께 존재하며, 함께 사라지는 요소라는 점을 분명하게 이해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이들 요소들이 제거되면 무명 또한 무명으로 남아있을 수가 없습니다.

대신 그것은 지혜의 일어남이 됩니다.


지혜가 무명의 자리를 대신해서 나타나면 연기(緣起)는 시작부터 끊어집니다.

무명이 소멸되면 업의 형성이 소멸됩니다.


수행 중에 몸에서 가려움이 느껴지면 가려움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을

놓치지 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놓치게 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끼어들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수행자 여러분!

느낌이 소멸되면 갈애가 소멸됩니다.

갈애의 소멸이 위빠사나의 도(道)입니다.


즉 느낌이 소멸되면 갈애는 자동적으로 소멸되며

갈애가 소멸되면 곧 도(道)를 얻게 된다는 뜻입니다.

원인이 없어지면 그에 따른 결과 또한 일어날 수 없으므로

느낌을 무상으로 알아차릴 때 갈애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수행자 여러분!

우리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은 곳이 보리수 아래라고 하지만,

사실은 느낌에서 갈애로 넘어가지 않는 위빠사나의 도(道)가

바로 깨달음의 황금의자인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래서 위빠사나가 아니면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부처님께서 선언하신 것입니다.


고(古) 대장로 모곡 사야도께서는 궁극의 의미로 볼 때

우리의 스승 부처님께서는 최고의 깨달음을 얻으신 곳이

바로 갈애가 느낌으로부터 잘려 나간 그 자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로 갈애가 느낌으로부터 잘려 나간 그 자리가 깨달음의 황금의자이고,

열반이고, 해탈이고 자유입니다. 그리고 연기(緣起)가 끝나는 자리입니다.


이제 연기의 부분 2에서 부분 3으로 연결을 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수행자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우리는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연기의 고리를 끊는 것이란

바로 느낌의 일어남과 사라짐이라는 무상을 알아차려서

갈애가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세속의 범부를

비참한 존재계인 사악도에 떨어질 위험으로부터 구해줄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깨달음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곡 사야도께서는 다시 한 번 강조하셨습니다.

 


다시 태어나는 대부분의 모든 생명들은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태어납니다.

그 중의 매우 소수가 인간으로 태어납니다.


그래서 고통뿐인 네 가지 악처에 태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원인과 결과를 알아서

느낌이 갈애로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팔정도 위빠사나 수행을 하면 악처에 태어나지 않는 것은 물론,

살면서 괴로움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깨달음을 얻어 고통뿐인 윤회계를 영원히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지각이 있는 인간은 반드시 이 길을 가야만 합니다.

이 길은 그냥 저절로 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의 노력과 스승의 가르침만으로 갈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선업의 과보가 있어야만 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선한 일을 많이 해야 하겠습니다.

선한 일 중에 가장 선한 일은 수행을 하는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상좌불교한국명상원 원장/묘원법사 

http://cafe.daum.net/vipassanacen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