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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四諦)를 얻기 위해 청정함을 행한다. 마땅히 다시 청정을 행하라고 함은 고(苦)를 알아서 습(習)을 버리고, 다함을 알아서 도를 행하라는 것이다. 해가 뜰 때와 같이 청정은 바뀌어 십이문(十二門)을 나오기 때문이다. 경에서도 도를 따르면 해탈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둠을 떠나서 밝음을 보면 해가 뜰 때와 같다. 비유하면 해가 나와서 보이는 것이 많아지면 모든 어둠을 버리는 것과 같다. 어둠은 고(苦)이다. 어찌하여 고가 되는가. 장애가 많기 때문에 고가 됨을 안다. 무엇이 습을 버리는 것인가. 곧 일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진리를 깨닫는 것인가. 곧 가진 바가 없는 것이다. 도는 고를 알아서 습을 끊고 모두 깨달아서 도를 생각함을 밝힌다.
해설 '사제(四諦)를 얻기 위해서 청정을 행한다.'고 했다. 사제란 고(苦), 집(集)(혹은 습(習)), 멸(滅), 도(道)의 네 가지 진리다. 붓다의 호흡훈련은 이 사제를 얻기 위함이다. 호흡이 나와 더불어 항상 같이하여 청정의 단계에 머물면 지혜가 나타난다. 지혜는 고집멸도의 진리를 있는 그대로 알 수 있게 한다.
고(苦)의 원인은 일체는 고라는 사실과 진실을 있는 그대로 알지 못하고 잘못 보는 데에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고의 원인을 알면 그 원인을 없애는 길도 알 수 있다. 이 길이 팔정도(八正道)이다. 팔정도를 실천하면 고를 없앨 수 있음을 안다. 그러므로 흔히 불교에서는 계(戒), 정(定), 혜(慧) 세 가지 공부를 한다. 계행을 지켜서 올바른 행동을 하려고 애쓰고, 마음의 안정과 움직임의 통일을 위해서 선(禪)을 닦고, 일체의 사물을 있는 그대로 진실하게 알기 위해서 지혜를 닦는다. 여기서 사성제를 아는 것은 지혜에 속한다.
붓다의 깨달음은 지혜의 관성을 의미한다. 여기서 지혜는 명상을 통해 정(定)에서 얻어진다. 지혜는 우주의 근본 진리를 아는 것으로, 그 진리는 모든 사물 속에 있다. 모든 사물이 어떻게 생겨났으며, 어디로 가고, 어떻게 존재하는지가 불을 보듯 훤히 눈앞에 나타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생하고 늙고 병들고 죽는다. 곧 고이며, 일체 사물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그릇된 생각으로 보는 데에서 생긴다. 이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고에서 벗어날 수 없다. 원인을 알지 못하면 그 원인을 없애는 길도 모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붓다는 우리의 삶이 '고' 그 자체임을 있는 그대로 보았다. 그 사실을 모르고 인생이 즐거움이라고만 생각한 지난날의 그릇됨을 깨달은 그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고의 원인이 번뇌, 곧 무명임을 알았다. 또한 그 무명을 없애는 길까지 뚜렷이 제시하였다.
이로써 붓다는 생로병사의 인간고를 멸하게 되었고, 더없는 즐거움 속에서 중생제도에 일생을 바치게 되었다.
또한 붓다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이러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고 했다. 해탈이 신의 은총에 의한 것도 아니고, 인간이 운명적으로 고통 속에서 울면서 살아가야 할 존재도 아니다. 우리의 눈이 뜨이면 갖추고 있는 지혜의 힘으로 이런 사실을 알고 그렇게 살 수 있음을 가르쳤다. 그리하여 붓다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에게 뛰어난 스승이 되었다.
고의 진실을 알면 그 원인을 알고, 또 어떻게 해야 없어지는지도 알 수 있다. 원인 없이 존재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반드시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은 반드시 없앨 수 있다. 모든 것은 생하면 없어지기 마련이다. 어떤 것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것이 필요하고, 그들이 서로 관련되고 의지하여 존립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것이 연기(緣起)의 도리이다. 모든 것은 인연에 의해서 생하고 인연에 의해서 멸하다. 인연이란 이것과 저것의 얽혀 있는 관계요, 서로 주고받는 관계다. 좋든 나쁘든 홀로 존재하는 것은 없고, 모두 어떤 뜻에서든지 뗄수 없는 관계 속에서 주고받으며 의지하고 있다. 나쁜 것은 나쁜 것끼리, 좋은 것은 좋은 것끼리 우리의 생각으로는 헤아릴 수 없는 미묘한 관계로 걸려 있다. 그러므로 나쁜 일이 생기면 그 원인은 나쁜 어떤 것들이 서로 모여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고의 원인이 바로 무명이다. 무명의 원인은 탐진치요, 탐진치의 원인은 그릇된 마음에 있다. 그릇된 마음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보거나 행하지 않는 마음이다. 되어진 도리 그대로 생각하고, 되어진 도리 그대로 보고, 되어진 도리 그대로 행하지 않음이 바로 탐진치라는 잘못된 번뇌이다.
이는 진리를 있는 그대로 보는 눈이 멀었기 때문이니 곧 무명이다. 무명으로 인해서 모든 존재가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붓다에 의해서 최초로 발견되었다. 그리하여 붓다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체의 번뇌가 사라져 어두운 밤이 환히 밝은 것처럼 진리를 발견하였고, 실천을 통해서 그 진리를 보여주었으며, 진리 그대로 실천하면 누구나 고를 벗어날 수 있다고 가르쳤고, 실제로 수많은 제자들이 그렇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일체의 존재는 고이다.'라는 뜻을 올바르게 알아야 한다. 이 세상 모든 존재의 실상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뜻대로 하려는 데에서 그릇된 견해와 그릇된 삶이 있게 된다. 그래서 고통받고 남에게도 고통을 주는 삶을 계속하게 된다.
붓다는 고행으로 들어가기 전에 생로병사를 면할 수 있는 길이 없는지를 찾았다. 그러나 곧 그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생로병사를 면하겠다는 생각이 바로 뜻대로 안 되는 일을 뜻대로 해보겠다는 망상이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본래는 존재하지도 않는 죽음과 늙음, 병듦을 있다고 여기고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눈을 뜨고 보니 죽음은 죽음이 아니고, 늙고 병듦 또한 생각한 대로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마음이 생로병사를 일으킨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죽음은 확실히 존재한다. 삶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 삶은 어디서 왔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삶도 결국 무명으로부터 왔음을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는 확실히 존재하는 죽음이 진실한 깨달음에서는 없다는 것은 죽음도 무명 때문에 존재한다는 의미이다. 붓다는 이 무명을 없애면 죽음이나 삶도 없는 것은 아닌지를 살펴보았다. 단지 죽음이나 삶만이 아니라 우리가 생각하고 느끼는 모든 일들이 진실로 존재하지도 않으면서 그릇된 무명에 의해서 생기고, 그에 집착하여 괴로워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열두 가지 인연의 절차에 의해서 모든 존재가 생기고 없어진다. 이를 흔히 십이인연설(十二因緣說)이라고 한다. 이 경전에서는 십이문(十二門)이라고 했다.
그러면 모든 것은 고이며 원인이 있는데, 그 원인을 없애는 길은 올바른 생각, 올바른 행동, 올바른 삶 등임을 알게 되는 것은 어떤 상태인가. 붓다가 깨달은 이 세계는 어떤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청정함이다.
붓다가 사성제를 얻었을 때에는 우주의 모든 사물에 정신이 집중되고, 숨이 죽은 듯이 고요하게 들어오고 나갔다. 숨과 마음, 몸과 마음, 일체의 사물과 붓다 자신은 완전히 하나가 되어 적정 그대로요, 영묘한 움직임 그대로며, 밝은 빛으로 가득 찬 지혜의 바다가 되었다.
여기에 죽음이나 삶, 괴로움이나 즐거움이 어디 있으며, 너와 내가 어디 있으랴. 이렇게 자연법이(自然法爾) 그대로가 우주만상의 생하고 멸하는 세계이다. 죽음과 삶이 있으면서도 없고, 괴로움과 즐거움이 있으면서도 없는 이러한 세계에 자적하는 깨달음의 세계, 이것이 우리의 참된 모습이다.
경에서는 고의 원인을 습(習)이라고 했다. 습은 훈습(熏習)이니 훈습이 업을 지어 그 업력이 모든 것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고의 원인인 습이 없어지면 고도 사라진다는 것을, 해가 동쪽에 떠오를 때에 온 천지의 어둠이 일시에 걷히고 만상의 모습이 있는 그대로 보이는 것에 비유했다. 깨달음의 세계란 이런 세계이다. 이렇게 보이게 된 이유는 새로운 눈이 열린 것이 아니라 단지 눈에 가려져 있던 장막이 사라져서 본래 갖추고 있던 밝은 지혜가 있는 그대로 나타났을 뿐이다. 이러한 눈이 열린 세계를 청정한 마음이라 한다.
청정한 세계에서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것이 곧 십이문, 곧 십이연기의 도리이다. 붓다는 경에서 청정함이 열두 가지 문을 거처서 나온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청정 그래도 십이문을 나오고 들어가는 길이 도이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청정 그대로 십이문을 나오기 때문이다.' '도로부터 해탈을 얻는 것이다.'고 했다.
도는 깨달음의 길이다. 지혜롭게 사는 것이 도를 행하는 길이요, 지혜로부터 해탈에 이른다. 지혜는 어둠 같은 고의 장애를 없앤다. 밝은 빛이 비치는 올바른 길을 걸어갈 때에는 해탈이라는 고의 지멸(止滅이 있고, 고를 떠난 열반의 즐거움이 있다.
열반의 즐거움은 여덟가지 올바른 생활에서 비롯된다. 팔정도는 반드시 열반으로 가는 길이다. 열반은 즐거운 세계이며 또한 고가 없기 때문에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청정한 세계이다. 이러한 청정한 세계는 호흡을 조절하는 '아나파나사티'의 즐거운 삶 속에 있다. 열반은 먼 곳에 있지 않고 지금 이 순간의 들어오고 나가는 숨 속에 있다. 숨과 하나가 된 집착하지 않는 이 마음속에 있다. ≪성실론(成實論)≫ 제 14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어떤 것이 물인가. 만일 팔직성도(八直聖道)로써 물을 삼으면, 곧 마땅히 안과 밖의 육입(六入)으로써 기슭을 삼거나 탐희(貪喜) 등을 중류(中流)로 삼을 수 없다. 또한 마땅히 썩지도 않는다. 만일 탐애를 물로 삼으면 어찌 이에 따라서 열반에 이를 수 있으랴.'
답하여 가로되. '팔직성도로써 물을 삼는다. 비유는 반드시 꼭 같은 것은 아니다. 이 나무가 팔난(八難)을 떠나면 반드시 콘 바다에 이르게 되는 것처럼 비구도 이와 같이 여러 흐름의 재난을 떠나면 곧 팔성도수(八聖道水)에 따라서 흘러가 열반에 드나.' 이는 곧 '젖은(乳) 조개와 같다.'고 할 때 단지 그 빛만을 보고 취하되 굳고 여림을 취하지 않는 것이요, '얼굴이 달과 같다.'고 할 때 단지 그 풍성함만을 취하고 형태를 취하지 않음과 같다.
또한 행자로서 거룩한 길을 나와서 안과 밖의 육입(六入)에 집착하면 이 나무가 물속에서 이 기슭, 저 기슭에 붙어서 부패함과 같다.
어떤 존자는 말하기를 '항하(갠지스강)의 물이 반드시 큰 바다로 들어가는 것처럼 팔성도는 반드시 열반에 이르기 때문에 이런 비유로써 한다.'고 열하나의 정(定)을 갖춤을 설했다. 만일 '이 법'이 있으면 자연히 정(定)을 얻는다."
여기서 '이 법'이란 '아나파나사티법'을 말한다. 붓다의 호흡법은 정에 드는 호흡법이니 팔정도 중에서 정정(正定)이 가장 중심이 된다. '정정은 번뇌가 일어나지 않는 고요하고 움직임이 없는 청정이다. 쓸데없는 욕심이 일어나지 않으므로 습을 버리면 일을 행하지 않음과 같다.'라고 했다. 일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업(業)을 짓지 않는다는 뜻이다.
다음에 '깨달아 아는 것이 다하면 무소유'라고 했다. 깨달음은 고가 없어진 상태이므로 마음에 번뇌가 없으며, 어떤 것에도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무소유는 비어 있는 마음이다. 비어 있는 마음으로 재산을 가지면 갖고 있지 않음과 마찬가지다. 번뇌가 없으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탐진치가 완전히 없어진 것이지만, 번뇌는 깨달음의 조건이 되기도 한다. 번뇌가 없으면 깨달음도 없다. 다시 말하면 고는 없애야 하지만 그 고를 앎으로써 원인을 알고 없앨 수 있다. 즉 고는 깨달음의 동기가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고는 나쁘면서도 고맙기도 하다. 그러므로 대승불교에서는 '번뇌가 곧 깨달음(煩惱卽菩提)'이라고 한다.
번뇌는 없앨 것이 아니라 잘 살려야 한다. '즉(卽)'은 같다는 뜻이 아니라 부정과 긍정의 의미를 동시에 담고 있다. 번뇌 역시 나쁘면서도 좋은 것이다. ≪금강정경(金剛頂經)≫에서는 '일체가 청정하니 반야바라밀다는 청정하다.'고 했다. 일체가 청정하면 번뇌도 청정하다.
청정한 세계는 일체가 가치의 전환으로 살아나는 세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경에서는 '도는 고를 알아서 습을 끊고 깨달아 알아서 길을 생각함을 밝힌다.'고 했다. '~을 밝히는 것'은 가야 할 바른 길이 마음에 환히 나타나는 것이니 바로 도이다. 우리가 가야할 길은 환히 밝혀진, 즉 어둠이 밝음으로 바뀐 길이다. 밤이 없으면 아침해의 밝음도 없다. 번뇌인 밤은 깨달음인 아침의 밝음을 가져온 인연이 된다. 그래서 밤은 부정할 대상인 동시에 긍정할 대상이기도 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올바른 여덟 가지 길은 어떤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전환하여 살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사람은 악한 사람을 미워하지 않고 자비로 착한 사람으로 교화하니 이미 번뇌는 깨달음의 자랑(資糧)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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